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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불길이 올랐다. 그 불길 속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 등 몇 마디 구호가 짐승의 소리처럼 들렸다. 옆에 있던 한 사람은 근로기준법 책을 그 불길로 던졌다. 주위에 있던 사람은 감히 불을 끌 생각도 하지 못했다. 몇 분 후 결국 그 불길은 쓰러졌다. 그 불길의 정체는 한 남자였다.

 

도저히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몰골을 한 채 그는 쓰러져서도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외마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기자들은 그의 옆에서 취재를 시도했지만 그는 더 이상 말을 지속할 수 없었다. 쓰러진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1970년 11월 13일 낮 2시경이었다.

 

한 여인이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며칠째 계속된 기도는 그녀를 지치게 한 듯 했다.잠이 든 그녀는 흰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들이 그녀의 아들을 보자기로 싸서 데려가는 꿈을 꾸었다. 깨어난 후에도 그녀는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보였다. 어느새 나타난 막내딸과 그녀는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오니 아들은 평소와는 다르게 집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다. 더구나 이발도 하고 평소에 아끼던 옷들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음날 평화시장에서 시위를 하는데 꼭 와달라는 말을 하였다. 그녀는 장사를 해서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다. 평소와 다르게 아들은 그녀에게 계속해서 부탁을 했다. 마치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과 같았다. 그녀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신앙인으로서 그녀는 구역예배 담당이기도 했지만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런 어려운 집안 사정은 아들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다음날 구역예배를 보던 그녀에게 아들의 친구들이 교회까지 찾아왔다. 집에 큰일이 났다는 소식에 집으로 향했다. 마침 동네 국숫집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나왔는데 도봉구 쌍문 2동 208번지 전태일이가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는 소리였다. 그녀는 그 소리에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집에 잠시 들렸다가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들어섰는데 "선생님 나 물 좀 주세요. 내 혓바닥에다가 물 좀 주세요"라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덴 데 바르는 약을 떡칠하고 하얀 가제를 감아 입과 콧구멍만을 드러낸 사람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아들임을 느낄 수 있었다. 아들은 "어머니 담대하세요. 마음을 굳게 가지세요"라면서 그녀에게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는 "엄마, 배가 고프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전태일의 어머니에서 모두의 어머니로

 

1979년 11월 18일 아들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그녀는 가슴 한가운데서 불덩이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 억울했다. 지독하게 아끼고 좋아했던 아들이 검은 관안에 들어있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아들이 "숨이 막혀요, 꺼내 주세요, 살려 주세요"라고 외치는 듯했다.

 

관을 잡고 아무리 오열해도 죽은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귓가에는 아들이 남긴 마지막 말이 맴돌뿐이었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뿐이었다. 세상에 순종적이던 그녀의 인생은 아들의 장례식을 계기로 180° 바뀌었다.

 

우선 아들이 그렇게 만들고 싶어하던 노동조합을 만드는 데 그녀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 결과 아들이 죽은 지 2주 만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물론 이 과정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죽은 아들뿐 아니라 산 아들들이 있어 그녀는 더욱 힘을 낼 수 있었다. 아들과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던 친구들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태일이를 대신하여 아들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들들'과 노동조합을 만들어냈다. 그녀가 아들의 뜻을 받아 활동을 하면서 점점 '아들들'은 늘어만 갔다. '아들들'은 전태일의 친구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로, 전태일이 그렇게 가지고 싶다던 대학생 친구들로, 심지어는 그녀보다도 나이가 많았던 문익환 목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아들'을 자처했다.

 

'아들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녀를 찾는 곳도 그녀가 해야 하는 일도 늘어갔다. 노동교실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교육 시켰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리라면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녔다. 어떤 힘든 일, 어려운 장소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을 부르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갔다. '죽은 아들'은 없었지만 산 '아들들'은 그녀와 함께 했다. 그녀의 이름은 이소선이라고 쓰고, '어머니'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녀와 '아들들'의 노력에도 노동자들의 삶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암울한 상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나온 <전태일평전>(1983). 이 책을 읽은 노동자들과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바쳐 불합리한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그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그녀의 '아들'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남은 자들의 아픔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들'의 평전으로 인해 그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서 미안하기도 했다.

 

이런 마음들로 그녀가 힘들어할 때 독재 정권에 자식을 잃은 송광영의 어머니, 김종태의 어머니, 신호수의 아버지가 그녀를 찾았다. 이들은 그녀와 함께 민주화를 위해 자식을 잃은 유족들의 모임을 만들자는 제의를 하였다. 자식을 잃는 사람들에게 자식이 왜 목숨까지 잃어가면서 항거했는지를 설명하고 낙심한 유족들을 위로하자는 취지였다.

 

그녀는 당시 어려웠던 청계노조 때문에 고민하기는 했지만 아들의 죽음과 같은 젊은이의 죽음을 막기 위해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출범한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은 집회와 시위 현장에 가서 그들의 '아들들'을 지키는 일부터 시작했다.

 

어느새 그녀의 나이는 81세가 되었다. 얼굴에 주름도 늘고, 몸은 안 아픈 곳이 없지만 그녀는 아들이 죽으며 남긴 부탁을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도 쉬지 못하고 있다. 아들의 분신 이후 40년이 지났음에도 아들이 꿈꾸던 세상은 아직도 요원하기 때문이다.

 

아들과의 약속을 지킬 때까지 그녀의 활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슬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녀가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활동한 40년 동안 생긴 '아들들'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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