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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만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평화회의에 모인 연합군 측이 장차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조건하에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고 현 일본의 통치하에서 해방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저희들의 자유원망을 평화회의의 탁상에서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원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위임통치안' 문서의 한 구절이다. 이 청원서는 이승만과 정한경이 서명해서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당시 이승만은 44세, 정한경은 28세였다. 2년 후 정한경은 아메리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음으로써 한인으로 미국에서 이승만을 이어 두 번째 박사가 됐다.

 

 아메리칸 대학의 박사학위 수여식(1921년). 오른쪽에서 3번째가 정한경, 4번째가 대통령 부인, 5번째가 미국 제29대 대통령 하딩.

'위임통치안'은 상해 임시정부의 반발을 불러온 악재였다. 그것은 '독립'을 선언한 임시정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망언이었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이 일어난 즉후인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에서 선포됐다. 이승만과 정한경이 청원서를 작성한 것은 바로 그 얼마 전인 2월 25일. 실제 이들이 백악관 비서에게 서류를 건넨 것은 3월 3일이었다. 지금처럼 통신이 실시간이었다면 3월 1일 본국을 뒤흔든 독립만세의 함성을 듣고 청원서를 찢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둘의 생각은 달랐다.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을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3월 16일 기자회견을 가졌다. 거기서 '한국위임통치청원서'를 각 신문사에 돌려 기사화하게 했고 일제의 가혹행위를 미국과 영국이 막아줄 것을 요구했다.

 

3월 20일자 뉴욕타임스에 한국은 자치능력이 없고 일본의 통치가 마땅하다는 소퍼 선교사의 기고문이 실렸다. 정한경은 그 다음 날짜 신문에 반박문을 싣고 일본은 한국에 자치권을 허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위 이 '자치론'도 '독립론'과는 거리를 둔 거였다. '아세아(Asia)'라는 잡지 5월호에 정한경은 '오늘의 한국'이라는 글을 실리면서 버젓이 '위임통치청원서'를 첨부했다. 만세를 부른다고 독립이 굴러 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이승만이나 정한경의 판단이었던 모양이다.

  

 3.1 독립선언 후 한 달 반인 4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한인자유대회'. 앞줄 왼쪽에서 2번째가 정한경, 4번째가 서재필, 5번째가 이승만.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요 사학자인 신채호는 그 해 8월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

고 성토하면서 회의장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함으로서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고 다음해 1월 18일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평화회의에 이승만 박사, 민찬호 목사, 정한경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여권을 얻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 국민인 까닭에 마땅히 일본대사관에서 여권을 받아야 한다는 게 국무부의 해명이었다. 하는 수 없어 대안으로 청원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 한국의 지지를 끌어내려고 했고 그 속에 '위임통치안'을 끼여 넣은 것이다.

 

정한경이 미국으로 건너온 건 1905년 봄. 그의 나이 15세 때였다. 평안도 선천에서 숙부인 박희병이 세운 사립학교에서 박용만이 국어와 산술 그리고 중국고전을 가르치고 있을 때 정한경은 그의 학생이었다. 그 해 9월 박희병이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한 걸로 봐 정한경은 인도자 없이 태평양을 건넌 용감한 소년이었다.

 

그때 한국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정한경은 회고했다. 또한 외국을 다녀온 사람들은 조선 왕실의 운명이 다 됐다는 것을 알았다. 개화파 인사들은 밑에서부터 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천의 박희병이 지방 유지들과 새 학교를 세우고 신학문을 가르쳤다. 학교생활 수 개월 만에 학생들은 일본 뒤 바다 건너 큰 대륙이 있다는 것을 처음 배웠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정한경은 한국에 나왔던 선교사를 만났다. 당시 일본인에 대한 미국 백인들의 배타심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거리에 나가는 것조차 위험했다. 동양인 아이들은 학교에 오는 것도 막았다. "너희 소년들은 빨리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게 좋겠다. 샌프란시스코는 동양인 배척의 마지막 아성이다"라는 선교사의 말에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나야 했다.

 

로스앤젤레스에는 이층집으로 방이 여럿 있는 한인전도관이 있었다. 셔먼 부인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일자리를 찾아주고 성경과 영어를 가르치며 방세는 얼마 되지 않았다. 고학생들이 손쉽게 시작하는 게 '스쿨보이' 일이었다. 부유한 집에 들어가 잡다한 집안일을 해주고 숙식을 해결하는 일자리였다. 그것도 만만한 게 아니었다. 정한경은 한 달 만에 쫓겨났다. 네브래스카 주 커니 시에 가 있는 박희병에게 편지를 했더니 '스쿨보이' 자리를 구했다면서 기차표를 보내줬다.

 

네브래스카 주는 캘리포니아와는 딴판이었다. 동양 사람이 극히 적었고 주민들의 신앙심이 깊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알고 있었고 동양 여러 나라에 이미 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했다. 제 발로 찾아와 미국의 교육을 받는 한인들은 그들에게 좋은 전도대상이었다. 그들을 전도해서 본국으로 내보내면 더 쓸모 있는 선교사가 될 것 아닌가. 그래서 친절과 호의를 아끼지 않았다. 다른 곳의 한인 유학생들이 너나없이 네브래스카로 몰려들었다.

 

정한경은 지도를 들고 밤새도록 기차를 탔다. 솔트레이크 시에서 바꿔 탄 다음 커니 시 역에 도착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 우체국을 찾아 갔는데 도시가 작아 누가 어디 사는지를 다 알고 있었다. 한 중년 남자가 "내가 보기에 당신은 한국인 같은데..."하더니 어디로 찾아가라고 하는 게 아닌가. "한경아, 잘 왔다. 오느라고 고생 많았지?" 1년 반 전쯤 선천에서 헤어진 스승 박용만이 그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박용만은 그 작은 도시를 구경시키고 미국인 가정에 데려갔다. 그때가 1906년 4월. 몇 달 기다렸다가 9월에 초등학교 4학년으로 입학했을 땐 정한경은 그 학년에서 제일 키 큰 학생이었다. 1909년 6월 박용만은 네브래스카 주 커니 시 인근 농장에 '소년병학교'의 기를 내걸었다. 그로부터 세 여름학기를 계속해서 군사훈련을 받은 학생들이 1911년 8월 졸업을 하게 됐는데 정한경은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정한경은 한 집에서 9년 동안이나 스쿨보이 노릇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인내심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는 커니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학생신문 편집위원이었으며 변론반원이기도 했다.

 

1911년 발행된 교지에 그에 관한 인물평이 실렸다.

 

"헨리 정(정한경)에 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단어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고나 할까? 그는 어느 연애소설가가 책 한 권에 넣을 수 있는 꿈을 단 한 문장에 집어넣을 수 있는 재능을 가졌으니, 독자 여러분들은 그의 미덕을 말로 표현하지 못함을 알지어다."

 

정한경은 1910년 3월 버펄로 군내 웅변대회에서 아이티를 프랑스로부터 해방시킨 흑인장군 오버처에 대한 연설로 일등을 차지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학생대표로 선출됐고 1등으로 졸업했다. 졸업식에서 그는 영예의 대표연설을 했다.

 

 한국친우연맹 사무실 앞에서(1920년). 중앙이 정한경. 맨 오른쪽이 이승만.

정한경은 네브래스카 대학에서 정치학 학사와 석사 과정을 끝냈다. 1921년 워싱턴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에서 정치외교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땄다. 그의 학위논문 제목은 '한국 문제(The Case of Korea)'였다. 1919년 8월 워싱턴에 상해임시정부의 외교임무를 맡은 구미위원부가 설치됐다. 정한경은 대학의 직장을 그만 두고 구미위원부에서 4년 동안 봉사했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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