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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이 가을, 굳게 닫힌 일상의 창을 열어젖히고 모처럼 자연의 풍경을 찾아 나섰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내장산과 같이 큰 산이 아니어도 도심 인근 야산에도 정수리부터 붉은 잉크, 노란 잉크를 쏟아 붓듯이 형형색색 가을옷으로 갈아입느라 한창이었다.

 

식물학자들은 잎이 떨어지기 전에 초록색 엽록소가 파괴되어 엽록소에 의해 가려져 있던 색소들이 나타나거나, 잎이 시들면서 잎 속에 있던 물질들이 그때까지 잎 속에 없던 색소로 바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붉은색 단풍은 잎 속에 안토시아닌이라는 색소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나타나며, 은행나무 잎처럼 노랗게 물드는 것은 잎 속에 카로티노이드는 색소가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런 딱딱한 표현보다는 도종환 시인의 이런 표현이 오히려 어떨까? 깊은 가을엔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버려야 할 것이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 도종환 시인의 '단풍 드는 날' 중에서

 

참으로 올여름은 무난히도 더웠다. 그래서 그런지 깊어가는 이 가을에 꼭 어울리는 시가 또 있다. 이 시를 되뇌노라면 삶의 무게가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 릴케의 '가을날' 중에서

 

우리 사회에 여전히 어둡고 무겁게 짓눌린 빛바랜 정의와 진실의 침잠된 회색을 나무라는 듯한 시다. 기세등등하던 고개를 떨구며 끝내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낙엽을 바라보면 천안함 침몰 원인의 가려진 진실과 대포폰을 앞세운 민간인 사찰 주범의 실체, 뜨거운 여름 거리로 내몰린 수많은 비정규직 삶의 힘든 여정을 한없이 초라하고 슬프게 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낙엽 길을 걷다 발길이 머문 곳은 전주시 덕진구 건지산 자락에 있는 조경단. 넓은 언덕에 잔디가 잘 가꾸어진 곳에 묘와 비각이 오랫동안 잘 보전돼 온 이곳은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의 묘소이다. 1만여 평의 경내 주변은 돌담으로 쌓여 주변의 울창한 숲과 어울려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조경단 입구에 들어서자 하마비(下馬碑)가 눈에 띈다.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가 적혀 있었다.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라는 뜻이 담겨 있다. 가마나 말에서 내리는 행위에는 말도 조심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하마비 앞에선 몸과 마음 모두 단정하게 가다듬고 엄숙한 마음으로 언행을 삼했다는 것을 보면 권세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낭만·여유 넘쳐나는 듯하지만, 정규직·비정규직, 경쟁·갈등 상존

 

굳게 잠긴 조경단 정문 갈라진 문틈사이로 잔디가 노랗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내부를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는 붉은 단풍나무들이 마치 호위병들처럼 담을 에워싸고 있었다.

 

조경단 왕실의 땅과 인접해 있는 전북대학교의 노란 단풍은 절묘하다.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캠퍼스에는 붉게 물든 단풍잎과 노란 은행잎으로 가득하다. 낭만과 여유가 넘쳐나는 듯하지만, 여전히 정규직과 비정규직, 경쟁과 갈등이 상존하는 사회다.

 

"가을에는 겸허하게 기도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 중에서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가을만 되면 언제나 변함없이 젊디젊게 가슴에 와 닿는 시다. '절대고독'과 '가을의 기도'의 다형 김현승 시인(1913∼1975)에 대한 조명작업이 탄생 100주년(2013년)을 앞두고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어서 그런지 올가을은 유난히 붉게 빛나는 것 같다. 마주하는 산책길이 온통 붉은색, 노란색 물감을 뒤집어 쓴 것 같다.  

 

가뜩이나 위축된 정의․진실, 더욱 오그라들지 않았으면...

 

건지산 조경단 맞은편,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던 <혼불>의 저자 고 최명희 선생의 묘역 입구에 놓인 '최명희 혼불문학관' 비 주변도 울긋불긋 온통 가을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올겨울 한반도에 혹한을 동반한 초강력 '라니냐 한파'가 몰아칠 것이란 기상청의 전망이다. 지난여름 지독한 더위를 몰고 왔던 이유도 다름 아닌 라니냐에 의한 것으로 태평양 해수면의 온도 변화가 1988년 이후 22년 만에 최저 수준이라고 분석 결과들을 내놓고 있다.

 

엘니뇨와 반대되는 라니냐는 에스파냐어로 '여자아이'라는 뜻으로, 동태평양의 해수면 온도가 5개월 이상 평년보다 섭씨 0.5도 이상 떨어지는 기온변화 현상이라고 한다. 단풍이 지면 곧 눈이 내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단풍 볼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음을 암시해 준다. 가뜩이나 위축된 정의와 진실이 라니냐로 인해 더욱 오그라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태그:#가을 단풍, #조경단, #은행, #하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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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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