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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하얼빈 일본총영사관(현, 하얼빈화원소학교)
 옛 하얼빈 일본총영사관(현, 하얼빈화원소학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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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일본총영사관

이날(2009. 10. 31.) 하얼빈은 영하 10도 내려가는 첫 추위라고 했다. 바람까지 불어 체감온도는 더 내려간 듯했다. 이틀 동안 제대로 먹지도 닦지도 못해, 우선 숙소가 급하다고 김우종 선생에게 말씀 드렸다.

김 선생은 흑룡강성 인민대회 간부들이 자주 묵는다는 한 빈관(侊惠卡호텔)으로 안내했다. 숙소에 든 뒤 샤워를 하고는 곧장 밥집으로 갔다. 조선족 '서울밥집'에서 따뜻한 된장국, 그리고 깻잎과 김치를 먹자 추위도 달아났다. 

김우종 선생의 안내로 먼저 밥집에서 가까운 옛 일본총영사관에 걸어서 갔다. 10년 전 답사할 때는 옛 일본총영사관이 도시계획으로 곧 헐린다고 했지만 다행히 옛 골조 그대로인데, 외벽만 벽돌로 새로 말끔히 단장을 했다.

일본총영사관 지하감방, 이후 화원여사로 변했을 때 촬영한 것이다. 지금은 화원소학교가 되었다.
 일본총영사관 지하감방, 이후 화원여사로 변했을 때 촬영한 것이다. 지금은 화원소학교가 되었다.
ⓒ 눈빛<대한국인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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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거사 직후 러시아 군인에게 체포되어 그날 밤 이곳으로 인도되었다. 그런 뒤 10월 30일부터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검찰관에게 이 건물 지하 감방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 뒤로도 이 지하 감방에서 동북일대 항일 독립투사들이 일제에 체포되면 이곳으로 연행당해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은 악명 높던 곳이었다.

1999년 내가 첫 하얼빈을 방문했을 때 지하실은 '화원여사'라는 간판을 단 싸구려 여인숙이었는데 지금은 건물 전체가 '하얼빈시 화원소학교'로 바꿔있었다. 사람팔자도 내일을 알 수 없지만 건물이나 땅 팔자도 마찬가지였다.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부처님 말씀이 떠올랐다.

김성백 집터

거기서부터는 택시를 대절하여 본격 답사에 나섰다. 안내자가 전 헤이룽성위 당사연구소장이며 사학자인 김우종 선생으로, 서명훈 선생과 함께 조선민족 역사에 대가인지라 하얼빈 일대 답사에 더 이상 군말이 필요치 않았다. 

다음 답사지는 조린공원으로 옛 하얼빈 공원이다. 거기로 가는 도중에 김우종 선생은 차를 세웠다. 삼림가 옛 김성백의 집터라고 했다. 1909년 10월 22일 밤 안중근 일행(안중근, 우덕순, 유동하)이 하얼빈 역에 도착한 뒤 곧장 찾아간 집이다.

김우종 선생의 말에 따르면, 당시 김성백씨는 송화강 철교 공사에도 관여한 상당한 재력가로 하얼빈 한인회장을 겸하여 동흥학교(東興學校)에서 우리 동포들에게 러시아어도 가르쳤다고 했다. 김성백씨는 유동하와 사돈 간으로 유동하의 누이동생이 김성백의 제수(넷째 아우 부인)였는데, 유동하의 아버지와는 매우 가까운 사이로 안중근과도 그 인연으로 서로 알게 되었다고 했다.

옛 김성백 집터에서 하얼빈 역사학자 김우종 선생이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
 옛 김성백 집터에서 하얼빈 역사학자 김우종 선생이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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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에서 내려 김성백 집터로 갔다. 곧 김우종 선생은 허름한 한 블록 집 앞에 섰다. 출입문 옆 벽에는 '삼림가 22호 2단원'이라는 지번이 붙어 있었다. 중국 전역이 온통 재개발로 어수선했지만 그 일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우종 선생은 당시 김성백의 집은 단층으로 집터가 상당히 넓어 그 옆 공지까지도 그의 땅이었다고 하면서 나명순의 <대한국인 안중근>에 나오는 '삼림가 28호' 지번도 당신 집터에 포함되었다고 설명을 했다. 옆 건물은 철거 후 새 건물이 치솟고 있었는데, 김성백의 옛 집터의 건물도 곧 헐릴 것 같았다.

옛 하얼빈 공원

거기서 부르면 대답할 거리에 조린공원이 있었다. 이 조린공원은 1906년에 개원되었다는데 안중근 의거 당시에는 하얼빈에 하나 밖에 없는 공원이라 통칭 '하얼빈공원'으로 불렀다고 한다.

옛 허얼빈공원으로 현재는 조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옛 허얼빈공원으로 현재는 조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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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다른 공원이 생겨나자 그 지역 행정구역 명칭인 도리(道里)를 따서 '도리공원'으로 했다가 동북이 일제에서 해방되자 자기네의 은인인 소련의 스탈린원수 이름을 딴 '스탈린공원'으로, 그 뒤 항일 영웅 이조린(李兆麟) 의사의 이름을 딴 '조린공원'으로 정착되었다고 김우종 선생은 공원 이름에 따른 그동안의 유래를 설명했다. 중국의 근대사만큼이나 공원 이름도 기구하고 복잡했다.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첫날밤을 묵은 이튿날 새벽 이 공원을 산책하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거사 계획을 가다듬었다.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소에서 사형 집행 전 유언에서도 "내가 죽은 뒤 내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우리나라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라고 적시할 만큼, 당신에게는 이 공원이 이토 히로부미 처단 결행 의지를 굳힌 의미 깊은 장소였다.

나는 2000년 8월 17일 이곳을 답사한 뒤 꼭 9년 만에 다시 찾았다. 공원 안에는 그 전에 보지 못한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곳을 따로 마련하여, 의사의 유묵 '靑草塘(청초당)'  '硯池(연지)'라는 글씨가 새겨진 돌비석을 볼 수 있어 그나마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유묵 돌 '청초당'
 유묵 돌 '청초당'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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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묵 돌 '연지'
 유묵 돌 '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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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공원 옆 송화강 강가로 갔다. 멀리 송화강 철교가 보이고 그 아래에는 푸르죽죽한 강물이 그날의 장쾌한 일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쉬엄쉬엄 흐르고 있었다.

점심시간까지 다소 여유가 있어 거기서 택시를 돌려보내고 공원을 벗어나 차라도 한 잔 마시고자 중앙대가로 나오는데, 그 일대는 그새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온통 언저리에는 고층 건물로 휘황찬란한 간판을 단, 세계 어느 도시나 다름이 없는 번화가로, 오늘의 중국 번영을 대변한 듯했다. 한 호텔 찻집에서 김우종 선생과 마주 앉아 차담을 나누었다.

"오늘의 중국은 5천년 역사 이래 최대 번영과 안정을 이루고 있어요. 중국 인민 가운데 굶어죽거나 얼어 죽은 사람이 있으면 현(縣)이나 성(省)의 책임자는 문책을 당합니다."

나는 김 선생의 말을 들으며 오늘의 중국이 이렇게 번영을 누리고 정치적인 안정을 누리는 것은 무엇보다 1949년 중국인민공화국 수립 후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등 정치지도자들이 솔선수범 청렴결백한 생활을 한 결과일 것이라고 말했더니, 김우종 선생이 바로 봤다고 내 말에 호응해 주면서 그밖에도 이붕, 강택민 등 다른 지도자의 청렴결백한 사생활 얘기도 들려주었다.

옛 하얼빈 공원에서 본 송화강
 옛 하얼빈 공원에서 본 송화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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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홍교

다음 답사지는 제홍교(霽虹橋)였다. 1909년 10월 24일 아침 안중근 일행이 사전답사 차 하얼빈 역으로 가는 길에 하얼빈 역사가 한눈 아래 보이는 이 다리에서 안중근은 역 구내 전경을 조망했다. 지금 이곳은 교통량이 매우 많은 곳이라 택시를 세울 수가 없다고 하여 부근에서 내려 걸어갔다.

제홍교 위에서 바라보니 지금도 하얼빈 역 구내가 한 눈 아래 확 들어왔다. 다리 위는 온통 철조망과 선전물로 그 틈 사이로 카메라 앵글을 맞추고는 셔터를 눌렀다. 나는 이럴 때 '기(氣)'를 불어넣는다. 제홍교에서 바라본 하얼빈 역에는 철로가 엿가락처럼 늘어져 있었고, 지금도 열차들이 잇달아 도착하거나 출발하고 있었다. 

제홍교에서 내려다 본 하얼빈 역 구내, 100년 전 안 의사가 이곳에서 거사 계획을 머리속에 그렸다.
 제홍교에서 내려다 본 하얼빈 역 구내, 100년 전 안 의사가 이곳에서 거사 계획을 머리속에 그렸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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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훈 선생

서명훈 선생, 하얼빈조선민족사업촉진회 명예회장
 서명훈 선생, 하얼빈조선민족사업촉진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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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홍군가(紅軍街)의 한 밥집에서 들었는데 김우종 선생은 미리 귀빈을 초대해 두셨다. 내가 매우 보고 싶어 하던 서명훈 선생과 김 선생의 부인이었다.

사실 이번 하얼빈 일대 답사 안내도 애초에는 서명훈 선생에게 전화로 부탁드렸는데, 몸이 불편하다고 하여 차선으로 김우종 선생에게 부탁드렸던 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서명훈 선생을 10년 만에 다시 뵈니 더 없이 반가웠다. 건강이 시원찮지만 그곳까지 찾아온 나를 위해 요대를 차고 나왔다고 했다.

화제는 며칠 전 10·26 의거 기념식을 하얼빈 현지에서는 동포들이 성의껏 치렀는데도 서울의 한 방송국에서 섭섭한 방송을 했다는 불만이었다. 하얼빈은 한국 땅이 아닌 어디까지나 중국 땅이라는 점을 한국 언론은 모른 듯하다고 불편한 심기를 토로했다.

헤어질 때 내가 약값에 보태라고 봉투를 드리자 끝내 받기를 거부했다. 9년 전, 10년 전 길안내 때도 그랬다. 다만 내가 한국에서 준비해 간 홍삼 선물 상자만은 받으셨다.

"먼 길에는 눈썹도 짐인데, 이 귀한 선물을 여기까지 가지고 오다니…."

인파 속으로 사라진 서명훈 선생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 사회주의자의 고결한 삶에 깊은 경의를 드렸다.

동북열사기념관

점심을 든 다음 두 분을 보내고 김우종 선생과 나는 동북열사기념관으로 갔다. 지난날 이곳은 하얼빈경찰서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동북 삼성 일대에서 활약한 열사들의 행적을 추모하는 곳으로 유품들과 모형, 그리고 일제 경찰들의 만행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내가 1999년, 그리고 2000년에 이곳을 들렀을 때는 대대적인 보수로 내부를 살펴볼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두루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김 선생은 당신이 이 기념관 개관에 관여하였다고 하면서 1, 2층은 동북 항일열사의 사진과 모형 유품을 전시했고, 지하는 하얼빈 일본 경찰들의 당시 고문 및 신문장면을 그대로 재현시켜 놓았다고 했다.

나는 그동안 허형식 의사의 사진과 유품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이번 기회에 풀 수 있었지만 실내에서는 사진 촬영금지라 어느 한 장면도 카메라에 담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

동북열사기념관
 동북열사기념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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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일제 폐망 후 전범(戰犯)과 한간(漢奸, 일제 협력자)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재판에 회부하여 처리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고, 그들이 개전의 정으로 참회 눈물을 흘린 자는 모두 감형 등으로 용서하거나 석방했습니다. 가장 오랜 수형자가 25년 감옥에서 징역을 살았습니다."

김우종 선생의 말에 나는 문득 '반민특위'가 떠올랐다. 그때 우리나라도 반민특위를 제대로 운영해서 민족반역 무리를 처벌했다면 오늘까지 친일문제가 우리 사회 갈등요인으로 남아 있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동북 항일열사 가운데는 조선족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두어 시간 김 선생의 설명을 들으며 다시 밖에 나와 건물이나마 사진을 찍으려는데 온통 전깃줄로 뒤엉켜 있어 화면이 좋지 않았다. 다행히 10년 전의 건물 모습과 다름이 없어 그때 찍은 슬라이드 필름이 집에 있기에 큰 아쉬움이 없었다.

하얼빈 소재 조선민족예술관
 하얼빈 소재 조선민족예술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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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안중근 전시실이 있다는 조선민족예술관으로 갔다. 어귀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가장 먼저 맞았다.

관계자로부터 안중근 의사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도 듣고 화보와 시디를 구입한 뒤 숙소로 돌아왔다.

김 선생을 돌려보낸 뒤 그동안 찍은 디지털카메라 칩을 노트북에 저장하면서 살펴보니까 하얼빈에서 찍은 사진들이 아른 아침에 찍은 탓으로 사진마다 깊은 그늘이 져 불만스러웠다.

플래시를 쓰지 않은 잘못이었다. 다음날 김 선생에게 부탁하여 다시 들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태그:#안중근 , #하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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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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