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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위가 약한 데 연상력이 좋은 사람들이 불리할 때가 있습니다. 지저분한 이야기를 들으면 바로 그 장면이 떠올라버리기 때문에 남들은 실컷 웃는데 홀로 웃지 못해 종종 괴롭습니다. 고등학교 때, 4교시가 끝나기 무섭게 설사나 구토 이야기를 꺼내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더러운 상황을 실감 나게 묘사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던 그 친구는 인기가 많았습니다. 점심시간마다 답답한 교실을 웃음바다로 만들었지만, 비위는 약하고 연상력만 좋은 저는 구역질을 참으며 다른 반 교실에 가서 점심을 먹곤 했습니다.

 

반면, 과묵한 남편은 똥을 소재로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만화를 좋아하는 그는 보는 것 만큼이나 그리는 것도 좋아하는데, 대학 시절 동아리 회지에 몇 년 간 꾸준히 똥을 소재로 한 만화를 연재했습니다. 
 

서양화 동아리 회지에 어울리는 수필이나 음악 이야기를 쓰는 선후배들과 달리 똥에 관한 에피소드를 그리는 남편을 그 때 의심했어야 하는데, 눈에 뭐가 씌였는지, 그때는 똥 만화들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결혼 후. 식탁이든 식당이든 때와 장소에 상관 없이 그의 농담에는 제가 연상하기 싫은 소재들이 주로 간택되곤 했습니다.

 

언젠가 의대에 다니는 시누이와 호흡을 맞춰 오누이가 다정하게 괄약근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에 대해 한담을 나누며 깔깔대는데, 그들이 설명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라 도저히 밥이 넘어가질 않았습니다.

 

하여, 눈에 힘을 주고 얼굴에 웃음기를 거두고 "제발 식탁 위에서만이라도 그런 얘기 좀 하지 말아달라!"고 화에 가까운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비위가 약한지 모르는 아가씨는 새언니의 까칠함에 놀랐겠지만, 그렇게 강하게 항의하지 않으면 오랜만에 만난 오빠와 여동생은 똥 이야기를 멈출 것 같지 않았습니다.

 

부전여전, 다섯 살 딸의 독특한 그림책 취향

 

피는 물보다 진한 게 맞더군요. 다섯 살 딸 아이가 우리 말에 재미를 붙이면서 창작 그림책에도 재미를 붙였는데, 그림책 읽어줄 테니 가져오라고 하면 주저 없이 똥을 소재로 한 그림책들을 가져왔습니다. 한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아이가 어쩌면 그렇게 똥 그림책 일색으로 모아오는지…. 

 

아이가 신나게 들고 온 그림책들을 앞에 두고 도서관에서 길게 한숨을 내쉬는 이유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상상도 못했겠지요.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부터 <똥 마려 똥>, <엄마, 나 똥 마려워>, <똥은 참 대단해>, <뿌지직 똥>, <똥떡>, <밤똥 참기>, <똥 밟을 확률>, <똥똥 귀한 똥>, <응가하자 끙끙> 등등. 정말 다양한 똥 그림책이 아이를 신나게 해 줍니다. 똥 그림책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책은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똥>입니다.

 

돌담 아래 흰둥이가 싼 똥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습니다. 참새들도 더럽다고 하고, 어미닭과 병아리들도 먹을 것이 없다며 그냥 갑니다. 달구지에 실려가다 떨어진 흙덩이도 아저씨가 다시 와서 자기 밭의 흙인지 알아보고 가져가는데 강아지똥은 아무도 찾지 않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버려진 존재입니다.

 

그러다 겨울이 가고 봄비가 내리던 날. 강아지똥은 민들레를 껴안고 거름이 됩니다. 환한 민들레꽃으로 피어나는 장면을 읽어주는 엄마가 먼저 감동을 받곤 합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길가의 민들레가 피는 데 강아지똥과 흙과 바람과 비와 햇살이 함께 모여 꽃을 피운다는 걸 아이에게 이야기해 줍니다. 워낙 비위가 약해서 똥의 'ㄸ'만 봐도 숟가락을 내려놓던 사람이 강아지똥을 읽으며 정신력도 단련하고 있습니다. 

 

조상님께 올리기 민망한 송편들

 

명절을 맞아 온 가족이 고향 집에 모인 날. 시장에서 몇천 원어치만 사면 차례상에 올릴 한 접시는 될 테지만, 할머니는 아이들과 함께 송편을 만듭니다. 조물조물 아이들 손으로 만든 송편을 차례상에 올리는데, 딸 아이는 똥 모양 송편을 만들었습니다.

 

 

아이들 손으로 빚은 똥 모양 송편 가운데 가장 압권은 속에 아무것도 넣지 않은 것입니다. 쪄낸 똥 모양 떡에 할머니는 흑설탕과 깨를 섞은 소를 겉에다 묻혀 줍니다. 그야말로 똥 같은 송편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이맛살을 찌푸렸을 테지만 내 아이가 한 것은 똥 만들기도 예뻐 보입니다. 이모 할머님이 직접 그려 주신 매화무늬 접시에 똥 모양 송편을 올렸습니다. 봄을 알리는 꽃에 가을을 알리는 떡이 담겨있는데, 조상님들도 좋아하실까요?

 

아이가 태어나서 며칠 간 태변을 쌀 때, 작은 새가 새똥을 싸둔 것 같았습니다. 3kg짜리 작은 새가 싼 똥은 엄마가 먹은 음식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기도 했습니다. 똥 색깔이 심상치 않으면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소아과 의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좀 엽기적인 엄마로 보이겠지만, 아기 뱃속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확인받는 길은 그 방법이 제일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막된장에 풋고추를 먹은 날, 아기는 연두색에 가까운 똥을 싸고, 무교동 낙지볶음을 먹은 날은 아예 물똥을 지리곤 했습니다. 아기 똥이 건강하지 않은 날은 미안한 마음에 식단을 돌아보았습니다. 노란색과 연두색 수채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아기 똥이 예뻐서 사진을 찍어두기도 하고, 이유식을 떼고 어른과 똑같이 밥을 먹기 시작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굵은 똥을 두 덩어리나 쌌을 때 아기 변기를 찍어두기도 했습니다.

 

다섯 해 동안 두 아이의 똥을 치우면서, 내 똥을 치우며 밤잠을 설쳤을 어머니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비위 약한 저에게 남편, 아이들, 권정생 선생님은 만화로, 건강한 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로 진정한 똥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말 속담 중에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똥이 더이상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요즘, 똥을 소재로 한 속담에 한 줄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똥이 더럽다고 피할 수 있냐, 내 몸에서 만들고 내 몸에 담겨 있는 것인데.'


태그:#똥, #강아지똥, #한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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