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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를 거쳐 수매를 기다리는 잎담배.
 건조를 거쳐 수매를 기다리는 잎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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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만난 지도 벌써 28년이나 됐구나. 성상이 3번 바뀔 만큼 이렇게 깊고 일편단심의 관계는 부모님 이래 네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1982년 겨울이었을 거야, 친구 소개로 너를 처음 만났지. 학력고사를 마쳤다는 해방감에 나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지. 당시 일어났던 그 많고 많던 사건 중에 유독 너와 한 첫 키스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잊히기는커녕 더 또렷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너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첫 만남은 달콤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괴로웠단다.

첫 키스에 정신 잃은 나

네가 내 입술에 처음 닿았을 때는 아무 감흥도 없었어. 그러나 남자세계의 법칙이랄까,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는 너를 더 깊게 느끼고 싶었어. 나의 혓바닥으로 너를 핥으면서 목젖으로 당기고 가슴 깊숙이 너를 맞이할 준비를 했지.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너를 밀쳐낼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이어서 머리는 몽롱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시야마저 흐릿해졌지. 그래, 한 1분 정도 정신을 잃었어. 분명히 말하지만 그것은 황홀한 게 아니었어. 19세 나의 육체는 너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었던 거야.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는 그렇게 첫인상이 안 좋았는데, 며칠 만에 왜 또 너를 만났냐는 거야. 그때 너를 거부했어야 했어. 그렇지 못하여 지금까지 관계가 계속되었지.

너도 알다시피 내가 너를 가장 사랑한 때는 대학교 때였지. 우리들은 그야말로 여름의 태양보다 뜨겁게 사랑을 태웠지. 잠에서 깨어나 처음 나를 맞아 주었고 잠이 들 때 꿈나라로 마지막 배웅해 준 것도 너였어. 오죽하면 꿈에서조차 너를 만나러 갔겠니. 24시간 내 옆에 있는 너는 나의 자부심이었어. 너를 품으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어. 굶는다 해도 너만은 포기하지 못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당시 세상을 향한 나의 분노를 가장 잘 이해해 주었어.

그러나 그 무엇도 가를 수 없던 우리가 잠깐 헤어진 적이 있었지. 기억하니? 1984년 10월의 마지막 밤을. 다음 날 나는 군대에 입대하고 훈련소에서 한 달 동안이나 너와 헤어졌잖아. 그때 널 너무나 그리워했어. 눈이 부실 정도의 순백 피부와 샤넬5보다 더 매혹적인 너의 향기. 그러나 너를 만나기에는 희생이 너무 컸기에 포기했어. 그래, 그것은 너도 이해할 거야. 잠시의 이별은 더욱 짜릿한 만남을 위한 과정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때 너와 영영 이별을 했어야 하는데….

그 혹독한 시간 뒤에 우리는 더욱 미치도록 사랑했지. 군 복무기간에도, 복학하고도, 졸업 후 사회에 직장을 가져도 한결같은 너의 마음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어. 감동! 말이 나온 김에 이건 짚고 넘어가야겠어.

화려한 너의 변신에 나는 맥을 못 추고

나도 사람인 이상 권태기가 없을 수 없잖아. 나도 알아. 나를 향한 너의 마음이 남산 위의 솔과 밤하늘의 은하수만큼 변하지 않고 빛난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변덕을 부렸지. 그러나 너는 달랐어.

그때마다 너는 변신의 변신을 거듭하면서 나를 유혹했지. 유혹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다가간 것이라고? 물론 그런 점도 없진 않지만 너도 어느 정도 인정해야 돼. 하여튼 그것은 중요한 게 아냐. 그때마다 나는 감동했다는 걸 말하려는 거야. 어쩌면 그렇게 내 맘에 쏙 드는 옷으로 매번 갈아입을 수 있으며, 화수분처럼 갈수록 부드러운 향기를 뿜는 너의 정체는 무엇이니? 그리고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스키니한 몸매로 파격적인 변신. 마치 내 안에 네가 있는 것처럼 나를 이렇게 사로잡을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지난 28년 동안 너는 10여 차례 이상 화려한 변신을 했어. 정말 너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어.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 발전을 위해, 혹은 나를 위해 노력하는 너의 모습은 그 무엇도 따라올 수 없을 거야. 대단해, 넌!

아! 그러나 세상은 이랬던 너를 멀리하라고, 헤어지라고 강요하고 있단다. 너도 요즘 피부로 느낄 거야.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겠지. 그래서인지 너답지 않게 요즘 발버둥치는 모습이 안타까워. 그리고 그런 너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아픈 말이 되겠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도 나이를 먹음에 따라 너를 향한 마음도 시들어 가는구나. 당신마저 그럴 수 없다고 욕해도 그건 어쩔 수 없어. 왜 그런지 말해줄게.

미안해! 너에겐 책임이 없어

너를 가까이 하면 할수록 나의 폐에는 검은 장막이 드리우고 심장은 굳어지고 혈관은 좁아지고 이빨은 약해지고 머리카락은 더 빠지고 주름은 더 깊어지고 또…. 늘어놓자면 이 지면이 모자랄 정도일 거야. 그런데 사실 이런 육체적 시련은 스스로 감당하면 되기에 지난 28년 동안 내 옆에 있었던 정을 생각하면 그 이유로 부족하겠지. 문제는 그로 인해 남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이야. 개인주의에 물든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어.

그래서 너와 떳떳하게 만날 공간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어. 집에서, 아파트 단지 내에서, 직장에서, 식당에서 심지어 거리에서조차 너를 멀리하게 되는구나. 간혹 사회적 합의를 깨고 너와 은밀하게 만난 적도 있지만 그럴수록 자존심 상하고 나잇살 먹은 내가 스스로 창피해지는 거 있지. 매년 새해가 되면 너와 연을 끊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을 비웃은 나였는데 말이야. 나도 나이는 어쩔 수 없나봐.

이런 거 다 알면서 나를 만나지 않았느냐고 말하면, 난 할 말이 없어. 좋아, 이 마당에 못할 말이 뭐가 있겠니. 애초에 너와는 잘못된 만남이었어. 다시 말해줄게, '잘못된 만남.'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무엇에 홀렸는지, 내 의지가 박약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걸 인정해야 해. 그러나 사실 너는 태어날 때부터 속성이 그렇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계속 관계를 유지하였으므로 잘못된 만남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어폐가 있지. 그래,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야. 너는 아무런 책임이 없어.

너에게 비수를 꽂는 말이 되겠지만 지금 나는 이별을 준비하고 있어. 너를 소개시켜 주었던 친구들도 이제는 헤어지라고 말하네. 그들은 이왕 끊을 것, 무 자르듯 단번에 해치워야 한데. 그러나 약한 내 성격에 차마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그러다가 어느 날 불현듯 너를 다시 만나게 될까 두려운 거야. 그래서 헤어져야 만하는 사람들이 정을 떼듯이 하나하나 떼려고 해. 그래도 안 되면 나도 할 수 없어. 잔인하게 나가야지.

담배야, 미안해!

내가 원해서 너를 만난 것이고, 지금에 와서 일방적으로 너와 이별을 선언하는 나를 미워해도 할 수 없어. 나, 미련을 남기지 않을 거야. 지난해인가. 비슷한 이유로 15일 동안 너와 헤어졌을 때보다 결심이 더 단단해. 지난 28년 동안 절친이었으니 네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은 나를 멀리하는 것임을 잘 알 거야. 잘 가. 다시는 만나지 말자!

금연 홍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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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보건사회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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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잘못된 만남 응모글



태그:#담배, #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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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의는 질서보다 우선한다"는 홍세화님의 글을 좋아하는 회사원입니다. "모근 국민이 기자"라는 오마이뉴스의 모토에 공감하면서도 글을 쓴다는 것, 더구나 남에게 읽히는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음을 알기에 기자로 등록하기가 망설여집니다. 되도록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신변잡기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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