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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 '어은정'에서 이틀째(15일) 밤에 씁니다. 어은정은 경북 유형문화제 42호로, 퇴계 이황 선생의 문하였던 어은 이용이 지은 집입니다. 그 건립 연도가 1570년이라 하니 400살도 훌쩍 넘은 고택이지요. 집은 원래 와룡면 도곡리에 있었는데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지금 여기 정상동으로 옮겨 왔습니다.  

어머니 오랜 지인의 인연을 빌어 어은정을 관리하는 도 할아버지(78) 부부를 만났습니다. 어제 저녁, 만나기로 한 시각보다 한 시간쯤 늦게 귀가한 부부는 선산에서 밤을 따오는 길이었습니다. 어둠 속에 사람을 세워뒀다며 미안함을 토로하던 두 노인은 마치 친손녀를 대하듯 살가웠습니다. 저 역시 십수 년 전 갈 일이 없게 된 외갓댁에 다시 온 듯합니다.

경북 유형문화재 42호 '어은정'
 경북 유형문화재 42호 '어은정'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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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반주를 곁들여 저녁식사를 마치고 할머니와 한 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눈을 뜨는데 발끝 한지창 가득 햇살이 눈부셨습니다. 심신이 가뿐해서 어은정 툇마루에 나와 서니 새벽 기운이 번진 고택의 풍경이 아름다웠습니다. 여기에 달고도 차가운 시골 공기가 가슴을 시원스레 틔워줬습니다. 

노부부의 아침은 여유로우면서 바지런했습니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할아버지는 어은정 앞 자갈마당에 고추를 꺼내 말리고 할머니는 도시에 사는 손자가 맡겼다는 골든 리트리버의 안부를 확인한 뒤 부엌으로 향했습니다. 수만 번 반복했을 부부의 아침은 손발이 척척 맞는 장인의 작업을 연상케 했습니다.

짧지 않은 여정에 휴식이 절실했던 저는 온종일 집 안에 머물렀습니다. 늦은 오후 딱 한번 외출을 했는데, 밤 팔러나간 할머니를 마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사이 노부부의 일상을 고스란히 지켜봤는데, 평범한 일상 속에 오랜 습관처럼 묻어나는 두 어른의 정이 무척이나 각별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은정 관리인인 도씨 할아버지의 아침
 어은정 관리인인 도씨 할아버지의 아침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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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쌀쌀한 아침, 할머니가 도시에 사는 손자가 내려보낸 골든 리트리버 '리치'를 돌보고 있다.
 제법 쌀쌀한 아침, 할머니가 도시에 사는 손자가 내려보낸 골든 리트리버 '리치'를 돌보고 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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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할아버지 내외는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많이 했습니다. 각기 담당할 농사나 집안일을 확인하고 이웃이나 자식들 대소사와 관련해 의견도 나눴습니다. 조용조용 말을 주고받으며 간간이 허허 웃기도 하고, 남편보다 상대적으로 말수가 많은 할머니가 조언을 구하면 할아버지가 명쾌하게 결론을 내주기도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면 티(tea) 타임이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밥 먹고 이거(커피) 안 마시면 안 돼" 하며 부부는 흡족한 표정으로 인스턴트 커피를 홀짝였습니다. 그 사이에도 대화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젋은 연인이나 부부도 대화가 단절되기 일쑤고, 그것이 다름 아닌 불화의 원인이 되는데 이 부부에게선 그런 낌새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며 알콩달콩 대화를 나누는 도 할아버지 내외.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며 알콩달콩 대화를 나누는 도 할아버지 내외.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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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무렵 할머니가 어제 모아온 밤을 팔러 나갔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밤을 넣은 포대를 자전거에 싣고 앞장을 섰습니다. 청하지 않았지만 부인을 위한 살뜰한 배려였습니다. 자그마한 체구로 저만치 달려가는 할아버지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제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잠시 후 집에 돌아온 할아버지께 슬쩍 여쭸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디가 제일 좋으세요?"

"(한동안 침묵) 가족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보통 엄마들 같지 않다고. 우리도 사람이기 때문에 말 주고받다 보면 화도 나고 하는데 그것도 잘 참아주고."

"결혼할 때 할머니 예쁘셨어요?"

"그때야 그런 게 있나, 선도 안 보고 부모님 받아준 날 식 올렸는데. 고생을 참 많이 했어. 애 둘도 놓치고… 노후가 젤로 중요해. 죽을 때 같이 죽는 게 소원이야."

밤 팔러 가는 할머니를 위해 손수 짐을 실어다 주시는 할아버지.
 밤 팔러 가는 할머니를 위해 손수 짐을 실어다 주시는 할아버지.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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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이야기할 때도 주로 들어주는 쪽이지, 언뜻 무뚝뚝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의외로 깊은 속내를 전했습니다. 이윽고 다른 볼일을 보러 할아버지가 외출을 하자 넓은 고택에 홀로 남았습니다. 아니 마당의 골든 리트리버와 단둘이. 고요한 집안 가득 두 노인의 생활 흔적들을 보는데 뭔지 모를 감정들이 스멀스멀했습니다. 

오후 6시가 넘어 저도 집을 나섰습니다. 앞서 말했듯 할머니를 마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할머니는 농협 앞 인도에 포대를 깔고 앉아 있었습니다. 자식들의 돌봄이 소홀한 것도 아닌데 이 또한 노부부의 삶에서 습관이 된 근면함입니다. 반쯤 줄어든 밤들을 보며 할머니와 담소를 나누고 있으니, 잠시 후 할아버지가 와선 아침과 마찬가지로 짐을 싣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밤 팔러 간 할머니를 마중나온 할아버지, 집에 오자마자 전기선을 고치는 할아버지, 식사 중에 벽에 붙은 벌레를 잡는 할아버지.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밤 팔러 간 할머니를 마중나온 할아버지, 집에 오자마자 전기선을 고치는 할아버지, 식사 중에 벽에 붙은 벌레를 잡는 할아버지.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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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밭 사이로 난 지름길로 걸어 오는 길, 이번엔 할머니께 여쭸습니다.

"할머닌 할아버지 어디가 좋으세요?"

"(웃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할아버지가 이해심이 차암 깊어."

"할아버지 장가올 때 할머니 맘에 드셨어요?"

"그런 게 어딨어, 얼굴도 못 봤는데. 그래도 이웃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했어. 신랑될 사람이 오볼통 하니 예쁘다고.(또 웃음) 얼마나 예쁜가 하고 궁금하긴 했지. 그런데 첫날밤에 어찌나 무섭고 가슴이 뛰는지…. 할아버지 얼굴은 그 다음날에 봤어. (잠시 회상에 잠긴 듯) 예쁘대…."

"할아버지 언제가 제일 고마우세요?"

"아플 때 항상 약 사다줄 때. 병원 가자고 할 때."

사이좋은 도 할아버지 내외.
 사이좋은 도 할아버지 내외.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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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기 전, 할머니 할아버지께 사진 촬영을 요청했습니다. 식사를 준비하던 할머니는 수줍게 웃으면서도 할아버지께 얼른 가서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오라 했습니다. 남편은 부인의 말에 순순히 응하더니 새옷처럼 보이는 화사한 줄무늬 남장을 입고 돌아왔습니다.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어깨를 슬그머니 감쌌습니다. 그리곤 장난스레 두 손가락으로 브이 자까지 그렸습니다. 예상치 못한 할아버지의 '센스'에 제 입이 벌어졌습니다. 덧없는 세월에 산 날 만큼 주름은 늘었으나, 58년 전 서로 얼굴도 못 보고 첫날밤을 지샜던 그날로부터 키워온 사랑은 여느 젊음이 근접할 수 없이 굳건해 보였습니다.

살이 통통히 오른 반달을 보며 할아버지께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좋은 신랑감은 어떤 사람이에요?"

"(예의 침묵) 남자는 자고로 태평양 같이 마음이 넓어야 해. 이해심이 많고 거기에 성실하고 진실성이 있어야지. 물론 건강은 기본이고."

우리세대 말로 '시크한 매력'을 지닌 할아버지의 신뢰가는 답변이었습니다. 아, 저는 언제쯤 태평양 같이 넓은 마음을 지닌 예쁜 남자를 만나게 될는지요…!

어은정 옆 호박밭
 어은정 옆 호박밭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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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내일 정말 집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추석도 다가왔고 나올 때 가져온 여름옷들로는 이젠 아침저녁으로 추위를 견디질 못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여정을 앞으로 어떤 의미로 이어갈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심사숙고해서 다시 글 전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네이버와 다음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합니다.



태그:#가을여행, #안동하회마을, #어은정, #세계문화유산, #좋은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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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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