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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수)

첫날, 출발이 순조롭다. 생각했던 것보다 몸이 가볍다. 몸 상태 최상이다. 이런 상태라면, 몸이 좋지 않아 중간에 여행을 그만두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자전거 역시 무엇 하나 크게 나무랄 것 없이 잘 굴러가고 있다. 15kg이 넘는 짐을 싣고 달리는데도, 그 무게를 느끼기 힘들 만큼 부드럽게 앞으로 나가고 있다. 자전거와 몸과 짐이 거의 하나가 된 느낌이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이렇게 순조로운 출발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무언가 전에 없던 기운이 샘솟는 기분이다.

한 가지, 짐을 싣고 난 뒤 자전거 무게 중심이 훨씬 뒤로 밀려난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무게 중심이 안장 받침대 부위에 가 있다. 그 바람에 자전거를 들어 올리는 일이 수월치 않다. 게다가 앞바퀴를 살짝만 들어 올려도 자전거가 뒤로 넘어갈 것처럼 위태롭다. 경사가 가파른 언덕을 넘어갈 때는 주의를 하는 게 좋겠다.

김포평야 누런 황금 벌판. 어느새 가을이 바짝 다가와 있다.
 김포평야 누런 황금 벌판. 어느새 가을이 바짝 다가와 있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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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행용으로 준비한 자전거는 산악자전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산악자전거는 애초 짐을 싣는 용도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산악자전거 중에는 아예 짐받이를 장착할 수 있는 장치를 생략한 것도 있다. 이 산악자전거 역시 누군가 짐을 실을 수도 있다는 점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자전거든 다 일장일단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거 저런 거 다 피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내가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진 여행용 전문 자전거를 구입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가격이 만만치 않다. 그런 자전거들은 또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그러니 저러니, 그게 어떤 자전거든 항상 사용할 수 있는 자전거를 여행용으로 임시변통하는 수밖에 없다.

짐을 하나하나 나누어 쌀 때는 몰랐는데 그 짐들을 모두 자전거에 올려 싣고 나자 한 손으로 들어올리기 힘들 정도로 무겁다. 마지막에 텐트를 추가한 게 한계를 넘어선 게 아닌가 싶다. 자전거 무게까지 포함하면 아마도 30kg이 넘을 듯싶다. 이대로 갑자기 자전거를 들고 뛰어야 하는 일만 없기를 바랄 뿐이다.

자동차들을 점잖아졌지만, 위험요소는 남아있다

북악터널 입구. 자전거로 여기까지 올라올 정도면 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다. 힘을 내자.
 북악터널 입구. 자전거로 여기까지 올라올 정도면 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다. 힘을 내자.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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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관문인 북악터널을 넘는다. 도시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수백 미터 고갯길이다. 평소보다 한 단계 낮은 기어로 천천히 그러면서도 꾸준히 페달을 밟는다. 처음부터 무리를 해서는 안 된다. 마라톤을 뛰는 기분으로 끝까지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터널을 빠져나가는 사이, 이마 위로 땀이 주르륵 흐른다. 날이 꽤 선선해졌는데도, 여름 한 낮에 자전거를 탈 때만큼이나 주체하기 힘든 땀이다. 북악터널 끝까지 큰 힘 들이지 않고 올라간다.

어떻게 보면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순조로운 여행이다. 나와 함께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조차 오늘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점잖다. 그새 자전거를 대하는 자동차 운전자들의 의식에도 상당히 큰 변화가 일어난 게 틀림없다. 경적을 울리는 차를 찾아보기 힘들다. 좋은 현상이다.

자전거와 자동차가 서로 통행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기만 해도, 도로 위에서 자동차와 자전거가 공존하는 세상을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자전거를 위한답시고 자꾸 새로운 자전거도로를 놓으려고 하는 것보다 기존에 만들어진 도로를 가능한 대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동차들이 점잖아졌다고 해서 위험한 요소들이 말끔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도로 위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김포는 경인아라뱃길, 김포한강신도시 건설 등으로 상당 구간 도로 공사가 진행중이다. 이런 길은 갓길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조심을 한다고 해도 위험한 상황과 수시로 맞닥뜨릴 수 있다. 주의를 기울여 극히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아야 한다.

해병대의 허가를 '득'하지 않으면 출입이 불가한 그곳

강화대교. 다리를 넘기 전에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문수산성, 산성마을, 동막마을 등에 닿는다.
 강화대교. 다리를 넘기 전에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문수산성, 산성마을, 동막마을 등에 닿는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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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바인으로 벼를 베고 있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있는 농민들.
 콤바인으로 벼를 베고 있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있는 농민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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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평야 너른 들판이 황금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추수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 강화해협 너머로 강화도 북단을 바라다보고 있는 동막마을(김포시)에서는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태풍에 쓰러진 벼를 서둘러 추수를 해야 하는 농부의 표정이 그렇게 밝지만은 않다.

그저 논바닥에 가로누운 벼까지 제 스스로 알아서 베어주고 낟알까지 다 알아서 거두어주는 콤바인이 고마울 뿐이라는 말이 왠지 씁쓸해 보인다. 농사를 짓는 게 오히려 더 손해라는 걸 알면서도 농사짓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농부들이 있다. 농사를 그만두기를 권하는 정부가 있고, 수확의 기쁨을 맘껏 누리지 못하는 농부가 있는 나라,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강화도 해안북로 곁의 자전거도로. 철채선과 함께 나란히 달린다.
 강화도 해안북로 곁의 자전거도로. 철채선과 함께 나란히 달린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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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대교를 건너서는 바로 오른쪽으로 360도 방향을 꺾는다. 해안선 쪽으로 다가가면 바다 너머 문수산이 바라다 보이는 자전거도로가 놓여 있다. 철책을 따라가는 자전거도로가 조금은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언제 또 다시 이렇게 한가한 길을 달려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부지런히 페달을 밟는다. 철책에 붉은 패널이 여러 개 붙어 있다. 야간 주정차 금지, 사진 촬영 금지, 간첩 침투 사례가 있었던 곳임을 알리는 주의 내지는 경고용 패널들이다. 굳이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무언가 가슴을 옥죄는 듯한 느낌을 떨쳐 버리기 힘들다.

철책선을 따라간 자전거는 검문소 앞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멈춰 선다. 연미정에서 내려다봤을 때, 자전거도로가 검문소 너머로 이어지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혹시나 해서 접근했는데, 역시나 경비병이 앞을 막아선다. 민간인 통제구역이어서 통과가 불가능하단다. 앞서 동막마을에서도 더 이상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되돌아 나왔고, 역시 이곳에서도 발길을 돌려 세워야 할 판이다. 사전에 해병대의 허가를 '득'하지 않는 한 출입 '불가'다.

수많은 유적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강화읍

강화외성. 몽골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성. 지금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성 안에 500년 수령의 느티나무 2그루와 연미정이 있다.
 강화외성. 몽골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성. 지금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성 안에 500년 수령의 느티나무 2그루와 연미정이 있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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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이 강화읍으로 방향을 바꾼다. 검문소에서 강화읍까지는 지척이다. 가는 길에 마치 어느 민속마을에라도 온 것처럼 오래된 성문 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강화산성의 동문인 망한루다. 그 문을 통과하면서부터 강화도가 역사적으로 꽤 많은 유적지를 간직하고 있는 고장이라는 걸 알게 된다. 강화군청 뒤로 용흥궁, 성공회 강화성당, 고려 궁지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용흥궁은 조선 철종이 왕이 되기 전에 잠시 머물렀던 거처를 보존한 곳으로, 마을 안쪽에 일반인들이 사는 건물과 함께 마주보고 서 있는 게 독특하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고요한 초대 주교가 1900년에 축조한 건물로 외양은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을 따랐고 내부는 서양의 바실리카 양식을 차용한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고려궁지는 고려 왕조가 몽골 침략에 대항해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긴 후 39년 동안 사용한 궁궐이다. 조선시대에는 동헌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내부에 외규장각 건물이 들어서 있다. 고려궁'지'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금은 궁궐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몽골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을 모두 파괴했다.

용흥궁. 임금이 되기 전 철종이 잠시 거처했던 곳. 일반 주택가 골목길 안에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용흥궁. 임금이 되기 전 철종이 잠시 거처했던 곳. 일반 주택가 골목길 안에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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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궁지는 정비 공사중이고, 성공회 강화성당은 예배당 문이 잠겨 있다. 용흥궁은 규모가 작은 데다 다른 시설이 너무 많이 들어차 있다는 느낌이다. 이들 유적은 솔직히 종교나 사적에 별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이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가기에는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몇 세기씩 격차를 둔 유적지들이 같은 구역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꽤 인상적이다. 시간이 있을 때 산책 삼아 천천히 걸으며 돌아볼 만하다.

강화읍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5시 무렵, 몇 군데 유적지를 돌아보고 나자 어느새 해가 지려고 한다. 하루 해가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 강화읍에 숙소를 정하고 서둘러 땀에 전 옷가지들을 빨아 넌다. 오늘 하루 자전거로 달린 거리는 80.75km. 내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적당한 거리다. 내일은 강화도 해안선을 일주한 다음, 다시 강화대교를 넘어 본격적으로 서해안을 따라 내려갈 예정이다.

강화 성공회 성당. 독특한 외양을 갖춘 근대 건축물이다.
 강화 성공회 성당. 독특한 외양을 갖춘 근대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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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장'

여행 첫날이 상당히 많은 걸 좌우한다. 첫날 느끼기 시작하는 고통이 여행 끝까지 가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여행을 그만두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한다. 자전거 역시 마찬가지다.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면 대부분 그 부분에서 고장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전에 철저한 준비와 점검이 필요하다. 틈틈이 주행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연습 주행 과정에서 내 몸의 어디가 불편한지를 파악하고, 자전거 위에서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내 경험에 장거리 여행에는 무엇보다 안장이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안장의 높이와 위치가 내 몸에 맞지 않으면, 장거리 여행 중에 반드시 고통이 따라온다. 자전거 전체 크기를 조정할 수 없다면 안장만이라도 내 몸에 맞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구입한 지 얼마 안 되는 자전거라면 최소한 한 달 이상 꾸준히 페달을 밟아줄 필요가 있다. 공장에서 갓 나온 자전거는 제품 출고 당시엔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하더라도, 실제 사용하는 과정에서 뒤늦게 결함이 나타나기도 한다. 브레이크가 제자리를 잡아가면서 생기는 소음이라든가, 갑자기 하중을 받기 시작한 기어 변속 케이블이 장력을 잃으면서 변속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충분히 사용해보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런 부분들을 세세하게 바로잡아 놓는 게 좋다.


태그:#김포평야, #동막마을, #강화도, #연미정, #용흥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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