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과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우리 근현대사에 가장 위대한 애국자 안중근 의사의 유적지인 러시아 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포브라니치나야, 중국 쑤이펀허, 하얼빈, 지야이지스고(채가구), 장춘, 다롄, 뤼순 등지를 지난해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아흐레간 답사하였습니다. 귀국한 뒤 안중근 의사 순국날인 2010년 3월 26일에 맞춰 눈빛출판사에서 <영웅 안중근>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2010년 경술국치 100년에 즈음하여 <영웅 안중근>의 생애를 다시 조명하는 게 매우 의미 있는 일로 여겨져, 이미 출판된 원고를 다소 손보아 재편집하고, 한정된 책의 지면 사정상 미처 넣지 못한 숱한 자료사진을 다양하게 넣어 2010년 11월 20일까지 43회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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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르만의 낙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열차에서 바라본 아무르만 철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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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않는 전사'

열차가 소리도 없이 블라디보스토크 역 플랫폼을 벗어났다. 넓은 객차에 혼자 타고 간다는 것이 러시아 철도국에는 좀 미안했지만 나에게 행운이었다. 더욱이 맨 뒤 칸이라 좌우 차창은 물론 열차 뒤 풍경까지 두루 마음대로 살필 수 있기에 더 더욱 좋았다.

열차가 아무르만을 끼고 북으로 달리자 왼쪽 차창으로는 일대장관이 펼쳐졌다. 곧 수평선으로 넘어갈 해가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열차 뒤로는 곧게 뻗은 시베리아 철도가 뒤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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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베리아 철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대륙으로 뻗어가는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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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체첸의 비애가 담긴 '백학'이 들려오는 듯하다.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싸우다 '죽은 전사'를 찬미하는 이 노래는 약소민의 아픔이 물씬 묻은 노래다. 이 가사에는 '돌아오지 않은 병사'라는 노랫말이 있는데, 꼭 일백년 전 열차를 타고 이 길을 달렸던 안중근도 끝내 '돌아오지 않는 전사'가 아닌가.

갑자기 차창에 비가 뿌렸다. 어둠으로 창밖의 풍경이 보이지 않자 차창에는 내 얼굴이 점차 선명해졌다. 사나이로 태어나 할 일도 많지만 이 늘그막에도 잃어버린 나라를 찾겠다고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버린 영웅의 자취를 찾아가는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갑자기 이번 답사 중에 죽어도 조금도 억울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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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 순국직전의 안중근 의사의 담대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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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나는 '죽어도 좋아'라는 말이 퍼뜩 떠올랐다. 이 말은 1960년대 초 미국 영화 <Phaedra>의 우리말 제목으로 주제곡과 함께 널리 알려졌다.

이 영화 주인공들은 사랑을 위해'죽어도 좋아'였다. 하지만 나는 그와 다른 차원에서 '죽어도 좋아'다.

나는 지금 우리 현대사에 가장 위대한 애국자요, 영웅인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 가신 길을 순국 100 주년을 맞아 그대로 뒤쫓고 있다.

그러면서 안 의사 유적을 카메라에 부지런히 담고, 의사의 행장을 무딘 붓을 휘두르고 있으니, 대한의 한 기자로서, 작가로서 더 이상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그야말로 공자가 말한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와 같은 심정이다.

내가 안중근 의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50년대 말로 구미초등학교 시절이었다. 그 무렵 내 고향 구미에는 전용영화관이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영화가 들어오면 구미면사무소 옆 의용소방대 창고에서 상영했다. 영화 한 편을 감상하려면 필름이 최소한 네댓 번은 끊겼고, 화면에서는 줄곧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그때 우리들은 영화감독이나 주인공, 배우의 이름은 잘 몰랐다. 그저 등장인물을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나눠,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의 모함에 누명을 쓰고 곤경에 빠지다가 마침내 진실이 밝혀져 복수를 하면 박수치고, 나쁜 사람이 계속 좋은 사람을 해치면 눈물을 흘리거나 탄식했다. 그러면서 포스터에서 악역을 맡은 배우 얼굴에 흠을 냈던, 픽션과 논픽션도 제대로 구별 못하는 유치한 어린이였다.

영화 상영 중, 필름이 끊어지면 휘파람을 불거나, "내 돈 물리 도!"하고 아우성쳤던 기억이 여태 뚜렷하다. 그런데 그때 단체로 본 영화 가운데 전창근 감독 주연의 <고종황제와 안중근>만은 주인공 안중근 역의 전창근은 물론, 이토 히로부미 역을 맡은 배우 최남현도 여태 기억이 난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권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릴 때 가마니를 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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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보스토크 역 시베리아철도의 시발역인 오늘의 블라디보스토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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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역 의거 현장

그 뒤 역사와 지리를 배우면서 중국 하얼빈은 까마득히 먼 북국의 나라로 새겨졌다. 그 먼 나라를 1999년 항일유적답사 길에 들르게 되었다. 그때 하얼빈 거주 동포 사학자 서명훈 선생으로부터 하얼빈 역 의거 현장과 그날의 상황을 자세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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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 의거 현장 하얼빈 동포 역사학자 김우종 선생(당사연구실장)이 하얼빈 역 플랫폼 의거 현장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장소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자세를 연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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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후 하얼빈 역 의거를 쓸 때는 많은 참고도서도 보고 연구한 뒤 마치 내가 안중근 의사가 되어 이토 히로부미에게 권총 방아쇠를 당기는 마음으로 <항일유적답사기>를 썼다.

아울러 안중근 의사 의거지 하얼빈 역 플랫폼에는 아무런 표지도 없다고 보훈처와 광복회에 쓴 소리도 했다. 출간 후 꽤 여러 독자가 특히 그 부분이 매우 좋았다고 격려했다.

그 뒤 보훈처와 광복회의 노력으로 하얼빈 역 플랫폼 의거 터에 총을 쏜 자리와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자리에도 표지를 했다는 보도를 보고, 또 나의 <항일유적답사기>가 2007년도 제1분기'문화예술위원회 선정 우수문학도서'로 뽑히게 되어 이중의 기쁨을 누렸다.    

이번 답사에 앞서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추밀원장의 인물을 공부해 보니까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하얼빈 행이 '마지막 여행'이었다. 이미 한일 양국의 학자 및 작가들이 두 인물에 대해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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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러 국경지대인 러시아 크라스키노 안중근 의사가 의병활동을 하던 연해주 연추마을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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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자세로 쓰다

그래서 나는 가장 낮은 자세로, 최대한 안중근 의사가 갔던 길을 그대로 뒤따르며, 조선왕조가 왜 망했으며, 100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처지와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을 내 나름대로 가다듬어 독자에게 전해야겠다고 집필 방향을 세웠다. 그리고는 미련스럽게 답사 길에 보고자 많은 참고도서를 가방에 잔뜩 담았다.

이 글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눠 쓸 예정이다. 앞부분은 나의 답사 여정과 견문을 쓰고, 다음부분에는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행장을 쓰려고 한다. 이 부분은 많은 도서와 자료를 종합해서 젊은 독자들이 이해하기 좋도록 가능한 쉬운 말로 가다듬어 쓸 것이다. 일부는 주석을 달겠으나 전부 다 달지 못하는 것은 서로 중복되거나 문장을 다소 윤색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안중근 의사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인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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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야이지스고(채가구) 역 안중근 의사가 제2 의거장소로 점지한 지야이지스고(채가구)역, 그날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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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에 대해 글을 남긴 선후배 학자와 작가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가장 많이 참고할 <대한국인 안중근>의 저자 나명순 기자(세계일보사)는 대학 선배로 무척 따랐던 형이었다. 이 책은 형의 열정과 땀이 물씬한 책으로 아까운 나이에 고인이 된 것이 무척 가슴 아프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형이 자꾸만 "야, 박도!"하고 부르는 것만 같았다. 다음으로 많이 참고할 책이 일본인 작가 사키류조(佐木隆三)의 <광야의 열사 안중근>이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여정을 입체로 추적하여 그린 점이 매우 돋보였다. 나도 일부는 그렇게 해 보겠다.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일본인이고,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다. 피차 그 부분은 서로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기사에 실은 현재의 유적지 사진은 서툰 내 솜씨로 찍었다. 지난날 자료 사진은 눈빛출판사가 펴내고, 김호일 안중근의사기념관장이 엮은 '사진과 유묵으로 본 안중근 의사의 삶과 꿈 <대한국인 안중근>'에서 뽑았다.

<영웅 안중근> 연재로 독자들이 안중근 의사의 참 모습을 알고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좀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면 나로서 분외의 기쁨이겠다. 독자들의 성원과 사랑이 있는 한, 나는 신명이 나서 밤잠을 자지 않고 이 연재를 이어갈 것이다.

자, 그럼 다음 회부터 안중근 의사의 유적지로 떠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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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해주 벌판 달리는 시베리아 철도 열차 안에서 바라본 연해주의 황량한 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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