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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스캔들>의 두 주인공인 이선준(믹키유천 분)과 김윤희(박민영 분).
 <성균관 스캔들>의 두 주인공인 이선준(믹키유천 분)과 김윤희(박민영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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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립대학인 성균관을 무대로 한 KBS-2TV <성균관 스캔들>. 이 드라마의 제2부와 제3부에서는 성균관의 전통 신고식인 신방례(新榜禮)가 소개됐다. 정조의 특명으로 성균관에 입학한 명문가 자제 이선준(믹키유천 분)과 남장여인 김윤희(박민영 분)가 신래(新來) 즉 신입생으로서 혹독한 신방례를 치르는 장면이 방영됐다.

선배들은 두 신입생에게 곤란한 과제를 부여했다. 선준에게는 병조판서의 딸인 하효은(서효림 분)과 하룻밤을 자고 오라 명하고, 윤희에게는 서울 최고의 기생인 초선(김민서 분)의 속곳을 얻어오라 명한 것이다. 두 신입생이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미리 조치를 취해놓은 선배들은 "과제를 완수하지 못할 경우, 웃통을 벗겨 개천에 빠뜨리겠다"고 벌칙을 예고했다.

웃통을 벗고 개천에 뛰어들 처지가 아닌 남장여인 윤희는 우여곡절 끝에 초선의 속곳을 얻어 와서 선배들을 놀라게 한다. 반면 선준은 효은의 방까지는 들어가 놓고도 그 집 근처에도 못 갔다고 허위보고를 해 결국 웃통을 벗고 개천에 뛰어들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됐다. 그런데 그 개천은 그냥 개천이 아니다. 동네 아이들이 단체로 오줌을 싼 직후의, 아주 더러운 개천이었다. 물론 윤희의 도움으로 선준은 극적으로 벌칙을 면했다.

조선시대의 신고식, 신입생에 술값내라 하고 매달아 때리기까지

신방례를 주관하는 성균관 유생들.
 신방례를 주관하는 성균관 유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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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1일과 9월 6일의 방영분에 나온 성균관 신방례를 보면서, 예전의 대학 신고식에서 생긴 추억을 떠올렸을 시청자들도 있을 것이다. 우동 그릇에 소주를 가득 채워 준다든가 운동화에 술을 따라준다든가 하는, 아찔한 신고식의 추억말이다.

내가 안 당하고 옆의 친구가 당해도 속에서 "욱!"하고 구역질이 나던 예전의 신고식 문화. '도대체 누가 이런 문화들을 만든 거야? 일제 때에 나쁜 문화가 많이 들어왔다더니, 혹시 일본 군대에서 이런 문화가 들어온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 사람들은 없을까? 그런 대학문화를 경험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성균관 스캔들>을 보면서 '옛날 선비들은 저런 식으로 신입생들을 괴롭혔나?'라는 생각이 들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성균관 스캔들>에 묘사된 신방례는 조선시대의 실제 신고식과 비교하면 상당히 신사적인 편이다. 조선시대의 신고식 문화가 얼마나 혹독했는지는 이 문제에 관한 왕명이 끊임없이 발포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요즘에는 학기 초의 대학 신입생 신고식에서 설령 사람이 죽는다 해도 그에 관한 대통령령이 발포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혹독한 신고식을 금하는 왕명 즉 '대통령령'을 자주 발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이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놀라운 것은, 그 같은 신고식 문화를 주도한 게 바로 선비들이었다는 점이다. 사회의 동량인 젊은 선비들 사이에서 이런 '저질 문화'가 퍼졌으니, 국가적으로 큰 문제가 되는 것도 당연했다. 실록에 나타난 신고식 풍경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술자리 비용 요구 : 명종 8년(1553) 윤3월 11일자 <명종실록>에 의하면, 선비들이 포진한 성균관·승문원·교서관에서 신입생에게 술자리 비용을 대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승문원은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한 기관이고, 교서관은 경서를 인쇄·교정하는 등의 업무를 담당한 기관이었다.

중종 36년(1541) 12월 10일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이러한 풍조가 사회 각계로 확산되어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논밭과 집은 물론이요 노비까지 팔아서 신고식 비용을 대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어떤 신입생은 수만 량의 거금을 탕진했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성종 24년(1493) 5월 26일자 <성종실록>에 언급된 것처럼, 가난한 과거합격자들 중에는 아예 출사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역겹고 더러운' 가혹행위 : 위의 <중종실록>에 따르면, 신입생의 온몸에 진흙을 바르거나 매질을 가했음은 물론이고, 한겨울에 물에 처넣고 한여름에 뙤약볕을 쏘이도록 하는 일도 있었다. 이로 인해 불구가 된 사람도 있고 죽는 사람도 있었다. 선조 2년(1569) 9월 13일자 <선조실록>에 따르면, 시궁창의 오물을 떠서 신입생의 얼굴에 칠하거나, 갓과 의복을 벗긴 뒤에 더러운 물속에 밀어 넣고는 거기서 뒹굴도록 하는 일도 있었다.

임금이 계신 곳에서까지 군기 잡기 : 가혹한 신고식이 어디서든지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었다는 점은, 중종 15년(1520) 7월 20일자 <중종실록>에 기록된 사례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이에 따르면, 대궐 안에서 신입생에게 술을 얻어먹은 예문관(왕명 작성기관) 고참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신입생을 거꾸로 매달고 발바닥을 때렸다. 신입생의 고통스런 고함소리가 대전에까지 들려, 임금이 그 연유를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

저질문화 신고식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럼, 조선시대에 위와 같은 신고식 문화가 생긴 이유는 무엇일까? 하필이면 선비들 사이에서 이런 저질 문화가 생긴 이유는 무엇일까?

상급자가 하급자를 괴롭히는 저질 문화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일부 사람들은 "그건 일제침략의 잔재야!"라고 힘주어 말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일제 잔재를 운운할 여지도 없다. 조선 전기에도 이런 문화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국이나 몽골 같은 주변 국가들로부터 이런 문화가 들어온 것은 아닐까? 몽골 침략기에 이러저러한 문화가 많이 들어왔다는데, 혹시 몽골인들에게서 그런 신고식 문화가 들어온 건 아닐까?

조선시대 사람들도 그런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선비들 사이에서 저질 문화가 퍼진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이런 문화가 외국에서 들어왔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헌부 즉 검찰청 관리들이 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 조사 결과가 중종 36년(1541) 12월 10일자 <중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송나라 시대를 살펴보건대, …… 신진 선비들을 지극한 은혜로써 사랑했을 뿐 조금도 좌절시키거나 모욕을 주지 없었습니다. …… 또 야만족인 원나라의 비루한 풍속에도 일찍이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사헌부의 조사에 따르면, 저질 신고식 문화의 기원은 결코 중국이나 몽골 같은 외국이 아니었다. 흥미롭게도, 이런 문화의 시작은 고려 말엽이었다. 사헌부의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전조(前朝, 고려) 말엽에 조정이 어지러워 권력자의 자제들이 제 뜻을 이루어 교만하고 횡포하게구니, 고참들이 이를 근심하여 전례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고려 말엽에 고위층 자제들이 과거에 합격한 뒤에 아버지의 권세만 믿고 함부로 행동하자, 이런 신입생들을 바로잡고자 선배들이 혹독한 신고식을 고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입생들이 교만하고 횡포했다'는 것은 다소 주관적인 판단일 수 있다. 교만과 횡포의 객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고위층 자제이기로소니 갓 들어온 신입생들이 아무 생각도 없이 교만하고 횡포하게 굴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문제의 본질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선가 타인이 미워지면, 그가 조금만 모나게 굴어도 그의 행동이 온통 교만하고 횡포하게 보이는 법이다. 고위층 자제들이 미움을 살 만한 '진짜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이 교만하고 횡포하게 보여서 선배들이 그들을 괴롭힐 목적으로 가혹한 신고식을 창안했던 것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과거시험 합격한 자 혼내주려던 게 시초

혹독한 신고식의 기원이 고려말의 부정합격에 있다고 지적한 율곡 이이의 무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번지에 있다.
 혹독한 신고식의 기원이 고려말의 부정합격에 있다고 지적한 율곡 이이의 무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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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 진짜 이유란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선조 임금과 율곡 이이의 대화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정조시대의 실학자인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에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성균관처럼 선비들이 포진한 기관에서 혹독한 신고식이 벌이지게 된 기원이 무엇이냐고 묻는 선조 임금의 질문에 대해, 이이는 고위층 자제들이 불공정한 과거시험을 통해 이런 곳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로 인한 사회적 분노가 누적되어 혹독한 신고식이 생겨났다고 답변했다.

"고려 말에 과거시험이 공정하지 못하여 급제자들 중에 귀한 집 자제들로서 입에서 아직 젖내 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 가혹행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부모 덕분에 부정한 방법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 같은 곳에 들어간 선비들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이들에 대한 가혹한 신고식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처음에는 '아버지의 힘으로 부정합격한 신입생들의 기를 죽여 놓자'는 취지로 시작된 신고식 관행이 나중에는 '모든 신입생의 기를 일단 죽여 놓자'는 쪽으로 변형되고 만 것이다. 

어떤 연유로 시작되었든지 간에, 조선시대 선비들 사이에서 만연한 저질 신고식 문화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저질 문화의 출발점이 유명한 사회지도층들의 도덕 불감증에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각종 사료를 통해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식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불법·탈법도 마다하지 않은 사회지도층들의 빗나간 자식사랑이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왜곡시키고 만 것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아무 죄도 없이 과도한 술값을 치르고 오물을 뒤집어쓰고 매를 맞고 똥물에 뒹굴어야 하지 않았는가! 또 그로 인해 현대 한국의 죄 없는 대학 신입생들이 우동 그릇이나 선배 운동화에 담긴 소주를 마셔야 하지 않았는가!

혹독한 신고식 문화가 21세기에 이르도록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개념 없는 사회지도층들이 벌이는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자식만 생각하는 순간의 욕심이 국가의 천년대계를 그르칠 수 있는 것이다. 지위가 높고 유명한 사람들일수록 더욱 더 욕심을 자제해야 한다.


태그:#성균관 스캔들, #신방례, #신고식, #성균관, #유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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