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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동이>에 새롭게 등장한 장 희빈의 아들 이윤(오른쪽)과 최 숙빈의 아들 이금(왼쪽).
 드라마 <동이>에 새롭게 등장한 장 희빈의 아들 이윤(오른쪽)과 최 숙빈의 아들 이금(왼쪽).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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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정체된 듯한 인상을 주던 MBC 드라마 <동이>에 새로운 활력소가 등장했다. 장 희빈(이소연 분)과 동이 최 숙빈(한효주 분)의 2세들이 브라운관에 나타난 것이다. 처절한 대결을 펼친 어머니들의 운명을 물려받게 될 이윤과 이금이 그 주인공들이다.

'장 희빈 II'인 이윤은 제19대 숙종 임금의 첫째아들로서 훗날 제20대 경종이 될 인물이다. '최 숙빈 II'인 이금은 숙종의 넷째아들이자 최 숙빈의 둘째아들로서 훗날 경종에 이어 제21대 영조가 될 인물이다. 이금의 경우, 최 숙빈의 첫째아들이 생후 2개월 만에 사망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최 숙빈의 장남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난 23일과 24일의 제45부·제46부에서 함께 등장한 두 이복형제의 이미지는 이들의 장래 운명을 어느 정도 예고할 만했다. 착하지만 병약한 선발주자인 왕세자 이윤, 똑똑하고 씩씩한 후발주자 이금.

TV 드라마나 문학작품에서 이런 유형의 인물들이 대립할 경우, 우리는 둘 중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인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지금 당장에는 이윤이 앞서 있지만 이 관계가 나중에 역전되리라는 예감을 갖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훗날 이윤을 지지할 소론당보다는 이금을 지지할 노론당이 더 강력했으므로, 시청자들로서는 처음부터 이금 쪽에 무게를 두고 이들의 운명을 지켜보기 마련이다. 참고로, 이황을 지지하는 동인당에 맞서 이이·성혼의 추종자들로 구성된 서인당은 숙종 집권기에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당과 윤증을 지지하는 소론당으로 분열되었다.  

이금보다 이윤의 정치적 입지가 더 튼튼했다

 장 희빈의 아들인 이윤.
 장 희빈의 아들인 이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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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금 쪽에 무게를 두고 둘의 관계를 지켜보게 되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 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은 지 19년이 지난 1720년에 숙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경종 이윤이 즉위 4년 만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1724년에 영조 이금이 왕좌를 차지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1724년 이전의 조선에 가보면, 이런 선입견이 순식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 TV 사극 등에서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의 역사 현장에서는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이금보다는 이윤의 정치적 입지가 훨씬 더 튼튼했다는 느낌을 갖게 될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다수당이 이금을 지지하는데도 불구하고 숙종과 청나라가 이윤에 대해 강력한 지지를 보낼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먼저, 숙종의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남인 세자 이윤이 죽은 장 희빈의 아들인데다가 소수당의 지지밖에 받지 못하는데도 이윤이 대리청정(왕위계승권자가 국정수행을 대리하는 것)에 이어 등극에까지 이르도록 지켜본 것은, 이윤이 별 탈 없이 왕위를 계승하고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숙종의 심경을 지배했기 때문일 것이다.

숙종에게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이윤을 세자 자리에 앉힌 상태에서 편안히 눈을 감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선왕이 죽기 전에 사관(史官)이 없는 상태에서 노론 대신 이이명과의 독대에서 연잉군 이금이 훗날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는 말이 숙종 사후에 나오기는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이금을 지지하는 노론당 쪽에서 나왔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믿기가 힘들다.

국제적 지위도 꽤 공고했던 장희빈의 아들

 최 숙빈의 둘째아들인 이금.
 최 숙빈의 둘째아들인 이금.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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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제3자인 청나라가 취한 태도를 보면, 이윤의 지위가 국제적으로도 꽤 공고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같은 청나라의 태도는, 경종 2년(1722)에 조선에 전달된 청나라 강희제의 칙서에서 잘 나타난다.

강희제의 칙서가 오기 이전에 조선에서는 사실상의 쿠데타가 2차례나 연이어 발생했다. 경종 1년(1721) 8월에 노론당이 34세의 경종 이윤에게 아들이 없다는 명분을 들며 한밤중에 경종을 압박해서 연잉군 이금을 왕세제(왕의 동생으로서 왕위계승권을 보유한 자)로 인정하는 재가를 받아낸 데 이어(제1차 정변), 불과 2개월 뒤에 경종을 한 차례 더 압박해서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하고 정치일선에서 물러나도록 했던 것이다(제2차 정변).

그런데 노론당은 제1차 정변에서는 승리했지만, 제2차 정변에서 도리어 역공을 당해 소론당에게 주도권을 내주고 말았다. 제2차 정변의 실패로 이금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지만, 반대파인 소론당 내부의 온건세력과 남인당(동인당의 분파)의 도움으로 무사히 왕세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제2차 정변 후에도 이금을 함부로 다룰 수 없었던 것은, 숙종의 아들이라고는 이윤과 이금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금 외에는 마땅히 왕위를 계승할 만한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조선 정세가 수습되어 가던 시점에서 왕세제 이금에 대한 강희제의 책봉 칙서가 도착한 것이다.

조선이 국왕이나 왕위계승권자에 대한 책봉을 요청하면 청나라는 이를 그대로 승인해주는 것이 오랜 관행이었다. 이 점은 1876년에 심계분(沈桂芬) 청나라 총리각국사무아문(외교통상부) 수석대신이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중국주재 일본공사와의 회담에서 한·중 간의 책봉문제를 언급하면서 "우리가 (조선 국왕을) 선정하여 옹립하는 게 아니라 그 나라의 요청에 따라 책봉할 뿐"이라고 공식적으로 발언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같은 관행이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조선에서 요청한 대로 왕세제를 승인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청나라 강희제는 왜 이금을 불안해 했을까

 중국 북경의 자금성에 있는 강희제의 초상화
 중국 북경의 자금성에 있는 강희제의 초상화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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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강희제가 보낸 칙서에는 미묘한 문구가 담겨 있었다. 경종 2년(1722) 5월 27일자 <경종실록>에 소개된 이 칙서에서 강희제는 "짐이 생각하건대, 부자간에 (왕위를) 전하는 것이 정상적인 법도이고 형제가 계승하는 것은 임시방책"이라고 전제하고, 왕이 중병을 앓고 있고 자식도 없으므로 부득이하게 동생을 왕세제로 책봉한다고 한 뒤에 묘한 여운을 풍기는 코멘트를 덧붙였다. "만약 …… 웅몽(熊夢)의 길한 점을 얻게 되면 왕은 다시 주청하라."

'웅몽의 길한 점을 얻는다'란 훌륭한 인재를 얻는다는 뜻이다. 연잉군 이금을 후계자로 승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되면 왕은 다시 주청하라"고 말한 것은, 왕이 새로운 후계자를 내세우면 청나라는 얼마든지 승인해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는 건강을 회복해서 아들을 낳든지 아니면 종친 중에서 양자를 들이든지 해서 후계자를 새로 세울 경우에도 청나라는 변함없이 경종 이윤의 입장을 지지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금을 왕세제로 승인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금에 대한 승인을 철회할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종래의 책봉이 대부분 요식행위에 그친 사실을 고려할 때, 강희제의 메시지는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연잉군 이금이 훗날 왕위에 오를 경우에 조선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위험성에도 청나라가 그 같은 칙서를 보낸 것은 이금의 입지가 상당히 불안하게 보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금 외에는 마땅한 후계자가 없고 또 그가 다수파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청나라가 보기에는 그의 정치적 앞날이 아무래도 불안했던 것이다. 

'왕은 다시 주청하라'는 여운을 남긴 것은, 이금을 대신할 새로운 후계자가 나타날 경우에 그 새로운 인물과의 관계를 원만히 풀기 위해 청나라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해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청나라가 '이금이 왕세제에 이어 왕이 될 가능성'과 '이금이 왕세제에서 끝날 가능성' 중에서 후자에 배팅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청나라가 이윤과 이금 중에서 전자에 배팅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숙빈 혈통라인을 살린 경종 이윤의 급사

 숙종의 무덤인 명릉.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 안에 있다.
 숙종의 무덤인 명릉.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 안에 있다.
ⓒ 서오릉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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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의 지위가 불확실해서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정치적 앞날을 장담하기 힘들었다는 점은, 경종의 급사라는 돌발 변수의 발생을 계기로 이금의 입지가 갑작스레 개선된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1724년에 연잉군 쪽에서 보내준 게장을 먹은 뒤에 디저트로 생감을 먹은 경종이 갑작스레 드러누워 5일 만에 사망하는 비상사태가 돌출한 덕분에, 이금이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게장과 생감을 먹은 경종의 급사'라는 기적의 발생에 힘입어 이금이 극적으로 왕위에 오른 사실은, 등극 이전의 이금의 지위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견고하지 않았음을 반영한다. 이윤 쪽에 희망을 건 청나라의 배팅을 무색케 하는 그런 기적이 돌발하지 않았다면, 최 숙빈의 혈통인 영조-정조-순조-헌종-철종-고종-순종 라인이 어떻게 되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의 시청자들은 '착하지만 병약한 이윤'과 '똑똑하고 씩씩한 이금' 중에서 후자 쪽에 무게를 두고 이들의 대결을 지켜보지만, 숙종과 청나라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경종 이윤이 급사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착하지만 병약한 사람'인 이윤의 정치적 앞날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밝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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