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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경내에 있으며 수령 310년 반송이 있다
▲ 녹지원 청와대 경내에 있으며 수령 310년 반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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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공행상을 갈무리한 인조는 신구(新舊) 공신과 그 자손을 거느리고 백악산 아래 회맹단에 나아갔다. 오늘날의 청와대 경내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 야삼경. 유사가 신령에게 회맹제를 고하고 예조 판서 정태화가 예를 올렸다. 이어 임금이 배위(拜位)에 나아가 네 번 절하고 신위(神位) 앞에 꿇어앉아 세 번 향을 사르고 술잔을 올렸다.

동쪽 계단으로 내려온 인조가 다시 배위에 나아가 꿇어앉아 제단에 올려진 접시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제물로 바친 양의 멱을 따 담아놓은 피가 담긴 그릇이다. 그리고 입술에 댔다. 이른바 삽혈(歃血)이다. 임금이 맹세문을 읽어 내려갔다.

1740년. 겸재 정선이 인왕산에서 바라본 회맹단. 정중앙 악간 위쪽 접혀진 곳에 회맹단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 삼승조망도 1740년. 겸재 정선이 인왕산에서 바라본 회맹단. 정중앙 악간 위쪽 접혀진 곳에 회맹단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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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악을 숙청하여 나라가 안정되었으니 그 공훈을 기리는 뜻에서 맹세 하니 신명(神明)이 보증하는 바이다. 그럴 듯한 명분을 내걸고 무리를 현혹시켜 난역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국세가 불행한 시대를 만났으나 훌륭한 인재들 덕분으로 의(義)의 기치를 내걸고 힘을 합쳐 잡초를 베어버리듯 평정시키니 음산한 구름이 걷히듯 맑게 되었다. 이 모든 충정은 단서(丹書)에 분명히 기록하여 종묘사직의 영화를 같이 할 것을 산하(山河)를 두고 맹세하는 바이며 앞으로 그대들의 자손에게도 두고두고 영화를 누리게 할 것이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길 경우에는 하늘과 땅의 신령들께서 용서치 않을 것이다."

맹세문 낭독을 마친 인조가 뒤돌아섰다.

"알겠는가?"
임금의 입술에 묻은 피가 달빛에 번들거렸다. 섬뜩했다.

"맹세합니다."
"망극하옵니다."
"황공하옵니다."

회맹제에 참석한 신구공신들의 함성이 밤하늘을 진동했다. 그들의 입술에도 하나같이 피가 묻어 있었다. 회맹제를 마치고 궁궐로 돌아온 인조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왜 대답들이 다르지?"

하늘이 무너져도 변치 않겠다고 입술에 피를 묻히며 맹세한 신하들 중에도 반역의 흑심을 품고 있는 자가 있을 것만 같았다.

하얗게 밤을 새운 인조는 정초군으로 하여금 궁궐을 숙위하라 명하고 군사들 가운데 날렵한 자 백 삼십 명을 뽑아 대전(大殿) 차비문을 지키게 했다. 그래도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인조는 호위청의 조직을 개편하여 구인후에게 그 책임을 맡겼다.

궁궐을 숙위하던 군사 조직. 창덕궁에 있다.
▲ 호위청 궁궐을 숙위하던 군사 조직. 창덕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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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에서 압송된 임경업이 도성에 도착했다. 금부에 하옥된 임경업은 담담했으나 떨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정이 술렁거렸다. 임경업의 입에 따라 목이 달아날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다. 김자점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역적 임경업에 대한 추국이 시민당(時敏堂)에서 열렸다. 인조가 직접 참여하여 친히 국문(鞠問)했다.

"네가 역모에 참여하지 않았고 마포에 도착하였을 때 서로 만난 사람이 없었다면 심기원의 무리가 어떻게 너의 승선 날짜를 알았겠느냐?"

2년 전, 반청 혐의로 청나라에 송환되던 임경업은 중로에서 달아났다. 호송하던 군관은 문책당하고 인조는 청나라로부터 '빼돌리지 않았느냐?'는 의심을 받았다. 서해안에서 배를 구한 임경업은 바다를 건너 명나라에 도착했다. 허나, 믿었던 명나라가 패망하고 청나라에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청나라는 임경업을 조선에 송환해주며 임금의 처결을 촉구했다.

허나, 국문의 핵심은 청나라가 임경업을 보내주며 요구했던 반청행위의 진실규명이 아니다. 청나라는 척화를 주장했던 윤집·오달재·홍익한를 심양에서 처형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삼학사의 처형은 반청행위의 보복일 뿐, 조선인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킨 패착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남한산성 수어사를 맡고 있던 심기원은 회은군 이덕인을 추대한 역모를 꾀했다는 고변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 수어장대 남한산성 수어사를 맡고 있던 심기원은 회은군 이덕인을 추대한 역모를 꾀했다는 고변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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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가 임경업을 순순히 돌려준 이면에는 조선이 임경업을 잔혹하게 처형케 함으로써 청나라에 반감을 품은 자는 처절하게 죽을 수밖에 없다는 공포심을 조선 백성들에게 심어주려는 계략이 숨어 있었다. 또한, 산채군들이 우상으로 여겼던 이산 봉기 문제도 아니었다. 흘러간 사건 심기원의 옥사였다.

"신이 배를 타는 날 무금(無金)의 처에게 '사또께 바로 아뢰기는 어려울지라도 선달에게 내가 들어간다는 뜻을 말하면 사또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임경업은 김자점을 추종했던 수하다. 그런 까닭에 김자점을 사또라 칭했고 선달은 바로 김자점의 아들 김식을 이르는 말이다. 이때 임경업의 첩 매환은 바로 김자점의 계집종이었는데 그가 거명한 무금은 매환의 남동생 효원이다. 김자점이 바로 탑전(榻前)에 대죄했다.

"율문(律文)에 본국을 등지고 몰래 타국에 들어간 것은 반역과 같다 하였는데 여러 신료들이 개진한 바도 대체로 이와 같습니다."

"내가 헤아려 보건대 임경업은 보통 무사가 아니다. 심기원이 만일 그와 함께 일을 벌였다면 심복 대장을 어찌 멀리 중국에 보낼 수 있겠는가? 배를 타고 들어간 것은 서로 통지하였을지 몰라도 함께 반역을 꾀한 것에 대해서는 그 자취가 불분명하다."
임금이 역적모의에 의문부호를 찍었다.

"심기원이 임경업을 이용했다 하더라도 역적을 면하기는 어렵습니다."
원두표가 적극적인 처벌을 주장했다.

"역모인줄 모르는 상황에서 역적 심기원 단독으로 구실을 삼은 것이라면 임경업 그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인조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이 때였다. 승지 이시해가 사색이 된 얼굴로 옥좌 가까이 다가왔다.

"임경업이 죽었습니다."

임경업이 형신을 받다 죽은 것이다. 고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것인지 입을 봉하기 위한 타살인지 알 수 없다. 충주에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여 무인의 길로 들어선 임경업은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다. 인조 정권을 안정화시키는데 조력한 무장이 그 정권의 제물이 된 것이다.

임경업이 사망하기 16년 전(1628) 낙안읍에 세워진 비석. 당시 군수 임경업을 기리는 선정비다.
▲ 임경업 비각 임경업이 사망하기 16년 전(1628) 낙안읍에 세워진 비석. 당시 군수 임경업을 기리는 선정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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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나라 명나라에 대한 절의가 조선 신하의 의리라고 생각한 그는 청나라의 용병이 되어 명나라를 공격하라는 명을 어기고 명나라와 내통한 것이 들통나 청나라에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명나라가 쇠하고 청나라가 융기하는 대륙의 지각변동을 감지하지 못한 그는 조국에 돌아와 형틀에서 죽은 것이다.

왕실과의 혼인, '꿈은 이루어졌다' 그 끝은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소의 조씨가 낳은 이징을 숭선군으로 봉한 인조는 효명 옹주를 낙성위 김세룡에게 시집보냈다. 김자점과 사돈관계를 맺은 것이다. 김세룡은 김식의 아들이고 김식은 김자점의 아들이다. 김자점이 고대하던 왕실과의 혼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인조는 민회빈 강씨의 사사를 반대했던 이경여와 홍무적을 북쪽 변방 삼수와 갑산에 이배하라 명했다. 삼수갑산(三水甲山)은 물 좋고 산 좋은 산수갑산(山水甲山)으로 오해되고 있지만 함경도 변방의 오지중의 오지다. 이경여와 홍무적을 한 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다는 귀양지로 내친 인조는 원칙을 강조하는 심로를 부령으로 이배시켰다. 부령 역시 회령과 함께 삼수갑산 못지않은 악명 높은 유배지다.

이경여는 세종대왕 5남 밀성군 이침의 6대손이다. 사간원 헌납과 정언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와 대사성을 역임하며 강직하기로 소문난 이경여는 우의정에 올랐으나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는 이계의 밀고로 청나라에 잡혀갔다 소현세자 귀국과 함께 고국에 돌아온 강골이다. 그는 이배지로 떠나면서 하늘을 우러러 스스로 다짐했다.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축생과 같다.'

돛을 내린 황포돛배
▲ 황포돛배 돛을 내린 황포돛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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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회빈 강씨의 지지 세력을 변방으로 격리시킨 인조는 소현세자의 세 아들 석철·석린·석견을 제주에 유배하라 명했다.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후계구도의 마지막 수순이다. 당시 석철은 11세, 석린은 7세, 석견은 3세였다. 석철 삼형제가 탄 배가 강진 마량포구를 출발했다. 키를 잡은 사공의 뱃노래가 구슬프다.

님아 님아 우리 님아 가지를 말어라
한 번 가면 다시 못 올 길을 왜 가느냐?

님아 님아 우리 님아 오지를 말어라
정 주고 떠날 길을 왜 찾아 왔더냐?

님아 님아 우리 님아 울지를 말어라
한번 가면 다시 못 올 길을 왜 몰랐더냐?

얼마가지 않아 폭풍우가 몰려왔다. 하늘도 그들을 보내주지 않았던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유배선이 이슬도(二瑟島)에 피항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영암 군수 윤기망과 강진 현감 장문석이 쾌속선으로 달려가 음식물을 전해 주었다. 이 모습을 봉황산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사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仁祖 48卷, 25年(丁亥 順治 4年) 8月 1日(己巳)
○朔己巳/七月石鐵等到濟州。史臣曰:昔漢淮南王長謀叛廢, 徙蜀道死, 文帝猶且終身悔之。 今石鐵等雖於國法當坐, 而藐爾幼穉, 有何所知, 投之大海孤島之中毒霧炎瘴之地, 若一朝遘疾, 不保其生, 則其不有累於聖人止慈之德乎 且使死者有知, 則昭顯之靈, 亦豈不抱痛於冥冥之中哉

인조25년(1647)8월1일
7월말 이석철 등이 제주에 도착했다. 사관은 논한다. 옛날 회남왕(淮南王) 장(長)이 모반하다가 폐위되어 촉(蜀) 땅으로 귀양 가는 도중에 죽자 문제(文帝)는 종신토록 후회하였다. 지금 석철 등이 국법에 따라 마땅히 연좌되어야 하나 조그마한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를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두었다가 만약 하루 아침에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한다면 성인의 자애로운 덕에 누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소현 세자의 영혼이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지 않겠는가?


석철과 석린은 이듬해(1648년)제주도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소현세자 국상에 조문단을 이끌고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의 실력자 용골대가 석철을 청국으로 데려다 기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들 그가 반드시 보전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것이다. 한양으로 운구 된 석철은 아버지 소현세자를 마주보는 언덕에 잠들어 있다.
▲ 경선군 묘. 석철과 석린은 이듬해(1648년)제주도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소현세자 국상에 조문단을 이끌고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의 실력자 용골대가 석철을 청국으로 데려다 기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들 그가 반드시 보전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것이다. 한양으로 운구 된 석철은 아버지 소현세자를 마주보는 언덕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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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여러분 고맙습니다. 다음에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나 뵙기를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태그:#소현세자, #민회빈, #석철, #인조, #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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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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