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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가 쓰던 붓과 벼루
▲ 필묵 추사 김정희가 쓰던 붓과 벼루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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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봉을 휘두르며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손오공을 바라보는 삼장법사의 심정으로 현령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이지험이 입을 열었다.

"공을 가로채지 않겠다고 약조 할 수 있습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견물생심이라고 누구나 공 앞에 약해지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특히 국가의 녹을 먹는 공복들이 심합니다. 영감님의 본심은 그렇지 않지만 욕심이 현령님을 유혹할런지 모르니 약조해 주시오."
"네, 약속합지요."

현령이 머리를 숙였다.

"이봐라. 이방! 영감의 말을 들었느냐?"
"네"

이방이 머리를 조아리며 깍듯이 공대했다.

뒤바뀐 갑과 을, 누가 객이고 원인지 모르겠다

"냉큼 지필묵을 가져오너라."

갑과 을이 뒤바뀌었다. 누가 고을 원이고 객인지 알 수 없다.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방의 지시를 받은 통인 아이가 붓과 종이를 대령했다.

"어서 쓰시오."
"네에?"
어리둥절해진 현령이 되물었다. 하지만 이지험은 말없이 현령을 쏘아보았다. 머뭇거리던 현령이 붓을 잡았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몇 자 적어 내려가던 현령의 손이 멈추었다.

"꼭 이걸 써야 합니까?"
벌레 씹은 표정이다.

"세 치 혀는 꼬부라질 수 있지만 한 번 지나간 붓은 휘지 않습니다. 아무소리 말고 어서 쓰시오."

사뭇 명령조다. 현령의 붓이 가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글쓰기를 마쳤다.

사진은 특정사실과 관계없는 자료이미지로서 김수항의 수결입니다
▲ 수결 사진은 특정사실과 관계없는 자료이미지로서 김수항의 수결입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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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결하시오."

명령이다. 국가의 명운을 걸고 일전을 벌여 패한 군주의 항복식도 이보다 부드러웠다. 수압(手押)을 마친 현령의 손이 떨렸다.

"이봐라. 형방! 네가 읽어 보아라."

이지험이 형방을 응시했다. 날카로운 눈빛이다. 주저하던 형방이 읽어 내려갔다.

"용담 현령 이세필은 역당 두령 이지험의 발고를 감영과 조정에 그대로 계할 것이며 절대로 그 공을 가로채지 않을 것임을 약속합니다."

형방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이방! 잘 들었는가?"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귀에 걸쳤으면 서압하라."

이방이 붓을 잡아 현령 수결 아래 서압(署押)했다.

"자네는 뭐하고 있는가?"

이지험이 예방을 노려보았다. 이지험의 눈총을 맞은 예방이 수례(手例)했다.

"형방 자네는 내가 꼭 얘기를 해야 알겠는가?"
형방이 붓을 잡고 화서(花書)를 마쳤다.

사진은 특정사실과 관계없는 자료 이미지로서 충무공 이순신의 수결입니다
▲ 수결 사진은 특정사실과 관계없는 자료 이미지로서 충무공 이순신의 수결입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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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핫 핫!"
화자(花字)가 끝난 지편을 손에 쥔 이지험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왼손 바닥과 오른손 바닥이 마주쳤다. 박장대소다.

"여러분들이 수결한 이 증험을 내 몸에 지녀도 괜찮겠지요?"
"네."
현령이 먼저 답했다.

"넵"
지켜보던 아전들이 합창했다. 이지험이 현령과 아전들이 수결한 지편을 품속에 넣었다.

"이방!"
이지험이 이방을 불렀다.

"통인 아이를 불러라."
이방의 손짓에 따라 통인 아이가 불려왔다.

"영감님이 수결한 것을 보았느냐?"
"네."
"무엇을 약속하더냐?"
"역적이 발고한 공을 빼앗아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이지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놈이 아니고 님이라 했느냐?

"내가 누구냐?"
"역적님이십니다."
"놈이 아니고?"

이지험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네, 역적님이십니다."
"왜? 놈이 아니고 님이냐?"
"영감님에게 호통을 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푸 하하하!"

이지험이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영감님! 아이들 앞에서 약조를 했으니 깨면 안 되겠지요?"

이지험이 현령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어기면 지가 성을 갈겠습니다."

현령이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렸다.

"좋소. 말하리다. 역당이 용연 새달 골짜기에 있습니다."
"몇 명이라고 했습니까?"
"100여명 됩니다."
"으음."

현령이 신음을 토해냈다. 한 두 명의 역적도 아니고 100여명이라면 읍성 군졸 가지고는 어림없다. 감영에 직보를 해야 한다. 전주로 급주마를 띄웠다.


태그:#수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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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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