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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함이 저술했다는 설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토정비결 이지함이 저술했다는 설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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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를 기다렸을까. 아전을 대동한 현령이 나타났다.

"자네가 은진사람 이지험인가?"
"네 그렇습니다."
"사람 참, 이지함과 이름이 비슷하여 헛갈리게 하는군..."
"감히 토정 선생과 견주다니 송구합니다."

이지험이 머리를 조아렸다.

"난, 죽은 이지함이 살아 돌아온 줄 알고 부리나케 나왔네."

역당이 나라의 근간을 흔들고 도처에 도적이 날뛰는 비상시국. 조정에서 정예군을 급파하는 엄혹한 시기에 현령은 내아(內衙)에서 기생첩을 끼고 노닥거리다 통인의 기별을 받고 나온 것이다.

"민망합니다."

이지험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토정은 어지러운 세상의 온갖 풍파를 온 몸으로 겪으신 훌륭한 분이지."

현령이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거드름을 피웠다.

"훌륭하다 뿐입니까. 선생의 장인 이정랑이 윤원형이 꾸민 양재역 벽서사건에 휘말려 능지처사된 것은 끔찍한 일이고 아들 산겸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되어 국가와 나라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싸웠으나 역모 죄로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요."

"허허, 자네가 춘추를 조금 아는군."

현령이 염소 턱을 치켜 올리고 이지험을 내려다 보았다.

유학 5경중의 하나이며 역사책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춘추. 유학 5경중의 하나이며 역사책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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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지험의 얼굴이 붉어졌다.

"구곡암 스님이 내 금년 관운이 좋다하던데 신수라도 보아주려고 날 찾아 왔나?"
"아, 아닙니다요. 율곡 선생이 토정을 '괴이한 돌'이라고 설파했듯이 토정선생은 세상을 보는 눈이 밝았을 뿐 점쟁이가 아니고 저 역시 신수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지험이 손사레를 쳤다.

"그렇다면 볼 일이라는 게 무엇인가?"
"영감님도 좋고 소인도 좋은 일입니다."
"듣자하니 방자하군, 대인이 좋으면 소인은 안 좋아야지 자네도 좋다면 기분이 거시기한데..."

현령이 헛기침을 했다.

"영감님이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현령이 귀를 세웠다.

"역도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뭣이라고?"

현령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왔다,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주상전하가 노심초사하는 역도들이 내 관내에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공을 세우면 승차하여 한양으로 갈 수 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으니 아니 좋을 수 없다. 하지만 표정 관리를 해야 한다. 짐짓 근엄한 자세를 취했다.

"들이라고 했으렷다."
"네."
"몇 놈이나 되느냐?"

"두령과 100여명의 졸개들입니다."
"참이냐?"

까무러치려는 현령을 아전이 부축했다.

"그들이 만약 관아를 덮치면 내 목숨은 그들 것이고 고을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100여명이라면 작은 숫자가 아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자네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산채에 같이 있었습니다."
"뭐라고?"

현령의 얼굴이 굳어졌다. 순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역도들의 함정일런지 모른다."

투항이 간계라면 관아가 포위됐을 수도 있다.

"이봐라! 저놈을 묶어라."

이지험이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우선 결박해놓고 몸수색을 하자는 것이다. 사령들이 달려들어 이지험을 포박했다.

"저자에게 무기가 있는지 샅샅이 살펴라."

몸수색이 끝났다.

"역당이 숨어 있는 곳이 어디냐?"
"역도를 발고 하면 나라에서도 상을 준다고 했는데 이렇게 묶어놓고 물으시면 곤란하지요."

이지험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내 비록 묶여 있지만 원님의 윗전에 설 것이오

"역적 주제에 말이 많다."
"말씀 삼가시오. 적의 적은 친구이고 적도 투항하면 동지라 했소.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도 투항한 적장을 예우하는 법인데 예의가 아니지 않소?"
"네가 두령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그렇소. 산채에는 4명의 두령이 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나 이지험이오."
"정말이냐?"

현령의 두 눈이 더욱 커졌다.

"괴수의 목을 베어 바치지는 못했지만 두령 급 2명과 100여명의 졸개들을 발고했으니 조정에서 큰 상이 내려 올 것이오."

비록 묶여 있었지만 이지험은 여유가 있었다.

"좋다. 풀어주마."

짧은 생각, 깊은 고민에 잠겨있던 현령을 훔쳐보던 이지험의 입가에 야릇한 웃음이 맴돌았다.

"이봐라, 저자를 풀어 주어라!"

사령들이 달려들어 이지험을 풀어 주었다. 포박에서 풀려난 이지험이 어깨를 흔들며 기지개를 켰다.

"상금은 물론 당상 이상의 실직을 제수 받을 것이오. 그 때는 영감의 윗전이 될 터이니 너무 야박하게 대하지 마시오."

이지험이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그랬다. '괴수의 목을 베어 군전(軍前)에 바칠 경우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은 그 자녀들까지 면천시키고 당상의 실직(實職)을 제수할 것이며 양인(良人)은 2품의 실직이나 쌀 1백 석, 면포 1천 필 중 소원대로 상을 내릴 것이다'라고 임금이 격문으로 약속했다.

"그래, 어디에 숨어 있습니까?"

현령의 말투가 바뀌었다.


태그:#토정비결, #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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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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