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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11월 파리유네스코본부에서 '귀도 가두치' 문화재관련 국제법담당자와 면담하는 환수위원들
▲ 유네스코 면담 2006년11월 파리유네스코본부에서 '귀도 가두치' 문화재관련 국제법담당자와 면담하는 환수위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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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민간단체가 환수운동을 주도합니까? 이런 일은 정부가 직접 나서야 합니다."

2006년 11월 7일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있었던 간담회에서 유네스코 문화재 관련 국제법 담당자 귀도 가두치(Guido Caducci)는 조선왕실의궤환수위(아래 의궤환수위)에 이렇게 말했다.

그는 "원산국의 기원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문화재를 원산국에 반환하도록 촉구한 국제박물관협회(ICOM) 전문가회의(1978년 세네갈)와 전통적으로 의례에 사용하는 문화재는 반환을 명령해야 한다는 '도난 또는 불법 반출된 문화재의 국제적 반환에 관한 유니드로(UNIDROIT:사법통일을 위한 국제회의) 협약(1995년 로마)'들을 유네스코 회원국들에게 준수토록 촉구한 '문화재반환 촉진 및 불법거래방지 국제전문가 회의'(2002년 서울)에서 외규장각 문서를 논의한 것처럼 조선왕실의궤도 일단 의제에 포함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런 일들은 정부기관이 나서야 한다"고 환수위에 충고했다.

바로 그 다음날, 우리를 면담한 유네스코 파견 대한민국 공무원은 "정말 이 일(의궤환수) 때문에 파리에 오신 것이 맞나요?"하고 우리에게 빈정대듯 물었다. 순간 '동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일을 왜 하는가?'라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환수위 결성에서 일본이 반환을 결정할 때까지 1400여일 동안 우리는 계속 희망과 절망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희망과 절망의 롤러코스터 탄 1400일

지난 7월23일 일본 진보시민단체인 일조협회 와타나베 회장과 함께 일본 내각부에 의궤반환 진정서를 접수하는 혜문스님
▲ 진정서 접수 지난 7월23일 일본 진보시민단체인 일조협회 와타나베 회장과 함께 일본 내각부에 의궤반환 진정서를 접수하는 혜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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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환수위는 전신인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아래 실록환수위)를 발전적으로 해체해서 만든 민간단체다. 실록환수위는 2006년 3월 출범해 100일만에 3차례의 회담을 통해 실록을 소장하고 있던 도쿄대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비록 정식으로 반환 받지 못하고 도쿄대가 서울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돌아와 "실록을 기록한 사관의 정신은 돌아오지 못하고 종이와 먹물만 돌아왔다"는 야박한 평가를 받았지만, 문화재청 담당공무원조차 "불가능 할 것"이라는 전망한 것을 뒤집고 쾌거를 이뤄낸 것이다.

의궤환수위는 출범 때부터 내부적으로 "의궤환수가 실록환수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을 하고 있었음에도 "실록도 100일만에 돌아왔는데 한 급 아래인 의궤는 쉽게 돌아오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이야기가 있었기에 4년 내내 강박감 속에서 살아야 했다.

비록 실록에 비해 의궤가 급수 낮은 문화재라 할지라도 의궤는 천황궁의 에도성 서고 안에 있는 일본의 국유재산이었기 때문이다. 실록의 경우 천우신조로 그해 1월1일 도쿄대가 법인화 되면서 법인재산으로 분류돼 도쿄대의 의지로 기증할 수 있었지만 의궤는 달랐다. 일본인에게 현인신으로 신앙의 대상인 천황의 직접 소유물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접근도 어렵고, 협상도 어렵고, 외교적인 절차는 복잡하기만 했다. 실록 환수 때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던 환수위원들은 의궤환수 운동기간 내내 담쟁이가 벽을 넘듯 이런 절망의 벽을 넘어야 했다.

그렇다고 주저 않을 수는 없었다. 의궤환수위 사무처장인 혜문 스님의 노력으로 비가 몹시 내리던 2006년 추석날(10월6일) 일본 궁내청 서능부에서 꽃자주색 책갈피의 명성황후국장도감은 84년만에 우리에게 처연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자리에서 환수위원들은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은 침략국의 심장 속에 84년 동안 유리안치 된 세상에서 제일 슬픈 장례기록인 '명성황후국장도감'을 반드시 되찾아 후손의 도리를 다 하겠다고 맹세했다.

외교적 노력과 민족공동의 노력, 그리고 양심적인 일본인들

그해 11월 의궤환수위는 파리 유네스코 본부를 방문해 '외국 군대에 의한 일국의 점령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발생하는 강제적인 문화재의 반출과 소유권의 양도는 불법으로 간주된다'는 1970년 '문화재의 불법 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의 금지와 예방수단에 관한 유네스코의 협약'으로 의궤반환의 길을 모색했다.

또 2007년 2월과 3월에는 3차례에 걸쳐 금강산에서 북한 조불련과 의궤환수를 위한 공동 대처방안을 협의한 데 이어 2008년에 평양방문에서 합의서에 서명하고 남과 북이 의궤환수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할 것을 천명했다. 의궤환수위가 북한과 협력을 모색한 것은 약탈문화재환수가 민족 공동의 과제라는 점과 일본과 미수교국인 북한과 연대함으로서 일본에 압박을 가하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기도 했다.

한편 의궤환수위는 2007년 5월 서울중앙지법에 일본 정부·황실을 상대로 일본이 소유하고 있는 '명성황후 국장도감' 등 조선왕실의궤 72종을 원소재지인 오대산 사고(史庫)로 반환하라는 '동산 인도 신청'을 내기도 하는 등 법률적인 노력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런 법률적인 조치는 실제 판결을 구한다기보다 일본정부를 압박하는 카드로 빼든 것으로 실제 우리 법원이 일본정부에 출석통지서를 보냈지만 일본 측은 접수를 거절했다. 또한 일본 현지에서는 제일동포3세 변호사인 김순식 변호사가 의궤환수위의 법률적인 자문을 맡아주었다.

그와 더불어 의궤환수위는 일본 외무성과 2007년7월 첫 회담을 한 것을 시작으로 그해10월과 11월에 연속해서 회담을 진행하고 정식으로 일본 행정부와 양심적인 의회지도자, 외교라인과 접촉을 시작했다. 이 외교접촉에는 당시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원웅 전 의원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진정한 환수위원이었던 '카사히 아키라'공산당 중의원(왼쪽)의 주선으로 일본 외무성 기무라 부대신을 면담하는 환수위원들
▲ 카사히 의원 진정한 환수위원이었던 '카사히 아키라'공산당 중의원(왼쪽)의 주선으로 일본 외무성 기무라 부대신을 면담하는 환수위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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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천군만마 같은 지원군이 나타났다. 일본 참의회 외교방위위원회 166회 회의에서 조선왕실의궤의 원산국 반환을 강력히 주장했던 '오카타 야스오' 의원과 중의원인 '카사히 아키라' 의원 등 일본 공산당 의원들이었다. 이 두 의원들은 일본 정계의 양심적인 여·야 정치인들을 의궤환수위에 소개했고 이번에 의궤반환을 발표한 '간 나오토' 총리도 그때 환수위과 인연을 맺어 3년 동안 공을 들여왔다. 또 카사히 의원의 주선으로 기무라 외무부대신과 히라사와 일본국회외교원장을 면담하기도 했다.

특히 카사히 의원은 일본 궁내청에 질문서를 보내 그때까지 우리정부도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던 의궤종류와 수가 81종 167책(冊)임을 최종 확인해 주기도 했다. 환수위원들은 "만약 의궤환수가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카사히 아키라 의원에게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여해야 한다"고 입을 모을 만큼 그의 활약은 열정적이고 성실했다. "일본 국회의원이면서도 왜 이렇게 문화재반환운동에 열심이냐"는 질문에 카사히 의원은 "과거를 청산하는 일만이 한·일 양국의 희망찬 앞날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그는 일본인이었지만 진정한 의궤환수위원이기도 했다.

일본에서의 또 하나의 원군은 뜻밖에 <아사히신문>과 <NHK> 등 일본 언론들이었다. 특히 <아사히신문>은 2007년 9월 최초로 의궤반환문제를 비중 있게 보도했으며 특히 지난 7월28일에는 결정적인 보도를 해 반환의 큰 줄기를 잡아주었다. <NHK>도 고비 때마다 환수위의 활약을 보도했으며 일조협회 와다나베 회장 등 일본 진보시민단체들도 힘을 보탰다.

이 같은 일들이 진행되면서 국내에서도 17대와 18대국회에서 의궤반환촉구결의안이 채택되고 구리시의회와 남양주시의회 등 지방의회에서도 반환촉구결의안이 속속 채택 돼 일본궁내청으로 보내졌다. 또한 뜻있는 지역사회인사들이 스스로 '문화재제자리찾기후원회(회장 이희선)'을 결성해 여러 모양으로 환수위를 도왔다. 

"이제 다시는 이런 역사가 없기를..."

2007년 9월 일본 언론으로는 최초로 의궤환수운동을 보도한 아사히신문
▲ 아사히신문 2007년 9월 일본 언론으로는 최초로 의궤환수운동을 보도한 아사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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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들을 성사시키기 위해 의궤환수위 사무처장인 혜문 스님은 40여 차례나 일본을 드나들었으며 의궤환수위 지도부가 몇 차례나 바뀌는 가운데에서도 김의정 조계종 중앙신도회장을 공동위원장으로 모셔 조직을 탄탄하게 정비했다.

지난 7월말 의궤환수의 마침표를 찍겠다며 일본으로 떠나던 혜문 스님은 "아무도 경술국치 100년을 어떻게 맞을 것인지 준비하는 사람이 없는데 환수위가 경술국치를 의미 있게 맞아야 한다"며 "의궤를 환수하는 일은 단지 책을 가져오는 일이 아니라 사관의 정신을 되찾아오는 일이며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식민지배의 찌꺼기들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일이다"고 각오를 밝혔다. 아울러 스님은 "사명대사는 임진년 조일전쟁 후에 외세의 침략에서 실록과 의궤 등 조선의 전적(典籍)을 보호하기 위해 오대산 사고를 지었다"며 "의궤를 찾아오는 일은 대사의 유업을 잇는 일"이라고 말했다.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은 이렇게 많은 이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열매를 맺어 지난 10일 일본총리가 "반환하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4년간의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제까지 조용했던 언론들과 관계부처는 한동안 떠들썩할 것이고, 또 며칠 뒤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잠잠해 질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 일본정부가 반환을 천명했다 해도 양국간 외교적인 절차가 남아있으며 이 과정에서 환국이 지연되거나 일본의 정권이 바뀌어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이 일은 이제 완전히 국가의 몫이다. 환수 절차와 관련해서는 1992년 영친왕비대례복 반환의 외교적 절차에 따르면 될 일이며 혹시라도 국내 사정으로 인해 반환이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써서 신속하고 유연하고 품위 있게 돌려받아야 할 것이다.

11일 일본정부가 의궤반환을 공식발표한 뒤 기자회견을 하는 환수위원들
▲ 기자회견 11일 일본정부가 의궤반환을 공식발표한 뒤 기자회견을 하는 환수위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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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수위가 의궤반환에 큰 공을 세웠다"는 주변의 평가에 대해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의 공식 답변은 이렇다.

"선조의 유산을 지키지 못한 원죄가 있는데 어찌 감히 환수의 공을 논하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바라는 것은 선조의 혼이 담긴 문화재를 어떻게 빼앗겼으며, 어떻게 돌아오게 되었는지, 정확한 역사의 기록을 남겨 다시는 후세에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토록 하는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송영한 기자는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입니다.



태그:#조선왕실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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