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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골목길(사진은 특정사실과 관계없는 자료사진으로 낙안읍성입니다)
▲ 고샅길 시골 골목길(사진은 특정사실과 관계없는 자료사진으로 낙안읍성입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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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이 몸을 숨긴 산골짜기를 빠져나온 이지험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머지 않아 마을이 보였다. 마을 어귀에 들어선 이지험이 담장에 몸을 붙였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고샅길을 꺾어 또 다시 몸을 담장에 붙였다. 뒤쪽을 주시했다. 아무도 따라붙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잰걸음을 놓았다.

숨을 헐떡이는 그를 가로막는 높다란 성벽이 있었다. 제법 큰 읍성이다. 좌우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다. 발걸음을 옮겼다. 북문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 문을 지키는 군사는 간 곳이 없다. 재빠르게 읍성 안으로 들어섰다. 성안은 화적 떼가 휩쓸고 지나간 성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읍성문(사진은 특정 사실과 관계없는 자료사진으로 낙안읍성입니다)
▲ 읍성문 읍성문(사진은 특정 사실과 관계없는 자료사진으로 낙안읍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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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창(鎭倉) 곳간문은 열려 있었다. 군사들의 군량미와 흉년에 백성들을 구제할 구휼미가 가득히 쌓여 있어야 할 식량창고가 텅 비어 있었다. 군량미로 차출해 나갔는지 고을 아전이 빼먹었는지 알 수 없다. 몇 걸음 더 옮겼다. 훈련청이다. 군사들이 있어야 할 훈령청에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읍치라면 우리 동지 20여명이면 장악할 수 있겠다."

은근히 객기가 발동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

이지험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야, 내 판단이 옳았어.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

입술을 깨물던 이지험이 훈련청을 지나 조금 더 걸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고을 양반들의 사랑방 향청(鄕廳)이었다.

영조때 미내에 건설된 다리
▲ 미내다리 영조때 미내에 건설된 다리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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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들이 미내를 건넜다며?"
"우리 마을로 곧 들어오는 것 아니오?"
"관군을 피해 계룡산으로 들어갔다는 소문도 있고. 무주구천동으로 들어갔다는 풍문도 있으니 알 수 없지요."
"그놈들이 관군을 피해 도망친다면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가겠소? 남쪽으로 내려가지."
"그렇다면 큰일 아니오. 그놈들이 천것들은 손 안대고 우리 같은 사람들만 손본다던데."
"아이쿠 이 일을 어쩌나? 이대로 있다간 벼락 맞겠소. 빨리 피난 갑시다."
"그 놈들이 산은 다 차지하고 있을 텐데 갈 곳이 어디 있다고 피난 타령이오."

피식 웃음을 흘린 이지험이 향청을 지났다. 얼마 가지 않아 내리 장시가 보였다. 유기전은 파시하여 철수했고 어물전이 장시를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말라비틀어진 것을 누가 사먹는다고 팔고 있소?"

사려는 사람이 망둥이를 들고 타박을 하고 있었다.

"술은 익어야 맛이 있고 망둥이는 말려야 맛이 있다는 소리도 못 들어 봤소? 이래 뵈도 갱갱이에서 가져온 말뚝망둥어유."
"누가 사갈 사람도 없을 테니 죄다 떨이해서 두 냥에 주시오."
"일없소. 역도들이 목에 칼을 들이덴다 해도 줄 수 없소."
"건 그렇고, 미내를 건넌 역도들이 벌써 우리 읍성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던데 알고 있소?"
"지랄 같은 세상, 이리 살아도 한 세상, 저리 살아도 한 세상인데 한 번 뒤집어져 버렸으면 좋겠소."

장사꾼이 넋두리를 했다.

지랄 같은 세상, 한 번 뒤집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거참, 듣고 보니 목에 가시처럼 걸리네."

흥정하던 사람이 불콰해졌다.

"입은 비틀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라 했다고 큰물이 나야 강바닥이 뒤집어 지듯이 팍팍한 이 시상도 그렇게 한 번씩 뒤집어져야 살맛이 나지 않겠수?"
"이 사람이 역적 눈깔 빼먹겠네. 시방 역도들이 들어와야 좋다는 소리여 뭐여?"

붉으락푸르락 해진 얼굴로 눈알을 부라렸다.

"설마 들어왔어도 새 세상을 만들겠다던 그들이 우리 같은 장돌뱅이를 해하겠소?"

눈치를 살피던 장사꾼이 꼬리를 내렸다.

"우리 같이 말뚝 박고 사는 사람은 당해도 싸다 그 말이오?"

흥정을 하던 사람이 미투리에 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져버렸다.

"아이쿠, 이 주둥이가 방정이야, 이걸 팔아야 식량사서 애들 강냉이 죽이라도 끓여 줄 텐데 해는 떨어지고 손님을 놓쳤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장사꾼이 자기 입을 마구 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지험이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형청이 보였다. 굳게 잠겨 있어야 감옥 문이 열려 있었다. 역도들의 내습을 염려하여 죄수들을 공주 감옥으로 이송했기 때문이다. 사령청에 이르렀다. 군사 몇 명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보시오. 사령 나리. 현감을 만나려는데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소?"
"이 고장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왔소?"

이지험이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을까?"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았다.

"아, 녜, 은진 사람입니다. 근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지험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우리 고장은 조무래기 고을처럼 현감 같은 거 모시지 않고 현령이 계시우, 보아하니 무지렁이는 아닌 것 같은데 영감이라는 소리도 못 들어 봤수?"

현령 아래 현감이 있다는 것도 모르느냐?

은근짜하게 한방 먹인다. 먹이니 먹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팔도 지방관에는 관찰사와 그 아래 목사, 부사, 군수가 있었고 현감 사이에 현령이 있었다. 맨 아래는 찰방이다. 현감은 종6품이었고 현령은 종5품 벼슬이었으니 동급으로 보지 말라는 핀잔이었다. 현령이 있었던 고장으로는 용담을 비롯하여 창평, 임의, 만경, 금구가 있었다.

"지송합니다. 지가 가진 것이 무식밖에 없어서리. 영감님은 어디 계시는지요?"

이지험이 두 손을 비볐다. 현령과 현감을 묶어서 파생된 말이 영감이다.

"조금 전에 찰미루에 계셨는데 그리로 가보시오."

고을 원님이 높은 곳에 올라 주민들의 얼굴을 살피는 곳이 찰미루(察眉樓)다. 태성성대에는 백성들의 행복도를 관찰하고 사회가 불안할 때는 불만의 도를 살피는 일종의 감시탑이다. 사령들이 가르쳐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또는커녕 이방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동헌으로 향했다. 그 곳 역시 고을 수장은 없었다. 통인청으로 향했다.

"원님은 어디 계시냐?"
"뉘신데 염감님을 찾으시오?"

통인청을 지키던 꼬마 아이들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통인청(通人廳)의 아이들은 수령의 잔시중을 드는 아전들의 자제들이다.

"은진 사람 이지험이라는 사람이 뵈올 일이 있다고 여쭈어라."

통인 아이가 바람같이 사라졌다.

"동헌에서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내아를 다녀온 아이가 전했다. 이지험이 동헌으로 향했다.


태그:#고샅길, #진창, #훈련청, #찰미루, #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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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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