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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복원한 산성이다
▲ 산성 훗날 복원한 산성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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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을 빠져나온 산채꾼들은 뿔뿔이 헤어졌다. 집결지 위봉산성으로 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야음을 틈타 자기 집으로 스며든 사람도 있었다. 100여 명의 산채꾼을 이끌고 교촌 장승백이에 도착한 안익신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에서 잠시 쉬어간다. 풀 섶에 몸을 숨겨라."

산채꾼들이 삼삼오오 흩어지며 풀 섶에 앉거나 드러누웠다. 멀리 노표(路標)가 눈에 들어왔다. '한양 377리'. 산채꾼들이 가고자 했던 목표지다. 한양으로 가려면 북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헌데, 그 반대로 남행길에 올랐다. 가슴이 쓰렸다. 주막거리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현상붙은 사나이

"행인들이 수군대는 것으로 보아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다. 가서 살펴보고 오라."
응칠이가 자세를 낮추며 튀어나갔다.

"대장님과 두령님 목에 현상금 천 냥을 걸었다는 방입니다."
다녀온 응칠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내 목이 천 냥밖에 되지 않는다고?"
가소롭다는 듯이 안익신의 입가에 비소가 흘렀다.

"동행하는 산채꾼이 백여 명이다. 이 중에서 변심할 놈이 없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좌우를 휘둘러보았다. 모두가 순박한 산채꾼들이다. 의(義)에 죽고 의에 살기로 맹세한 동지들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시시각각 변할 수 있다. 그것이 문제였다. 모두가 동지이면서 경계해야할 적으로 보였다.

"대장과 유탁은 어디쯤 오고 있느냐?"
"권대장은 앞서 나갔고 유탁은 체포되었다 합니다."
"뭣이라고?"

뒷마무리를 하고 떠날테니 먼저 가라고 권하던 천사 같은 유탁의 얼굴이 떠올랐다. 글공부하다 산채에 들어왔으면서 까막눈이 무지랭이들을 무시하지 않던 사람. 관노출신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해주던 선비. 모든 사람은 잠재된 능력이 있다며 자신의 억센 힘을 높이 평가해주던 유탁. 그 사람이 붙잡혔다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여기에 오래 지체할 수 없다. 빨리 이곳을 떠나자."

다리쉼도 잠깐. 관군의 추격이 어디에 와있는지 모른다. 안익신은 산채꾼을 이끌고 남행길을 재촉했다. 덕들을 지나고 풋개다리를 건너 마구평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질펀한 마구들을 지나야 한다. 대낮에 많은 인원이 평야지대를 통과한다는 것은 위험하다.

"여기에서 해가 저물기를 기다려 야음을 틈타 마구평을 지난다."
산채꾼들은 땅거미가 짙어오기를 기다려 마구들을 지났다. 어두운 야밤 오모 내(川)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잠시 쉬어간다."
모두들 냇가 둑 방에 앉았다.

처녀귀신은 여자를 괴롭힌 사내를 찜한다

"여자에게 잘 한 사람은 아무 일 없지만 여자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은 여기를 빨리 벗어나시오. 오모 내 처녀귀신이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마구평리 출신 석섬이가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옛날 이 마을에 주막이 하나 있었는데 주모의 딸이 한 미모 하는 미인이었답니다. 오가는 한량과 잡배들이 군침을 흘리며 갖은 수작을 걸었겠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말을 붙여오면 좋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치근대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견디지 못한 처녀가 끝내는 오모 내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고 말았답니다. 그 후, 이 처녀는 남자에 원한이 맺힌 귀신이 되어 밤에 이 다리를 건너는 남자를 깊은 물속으로 유인하여 빠져 죽게 하였답니다."
석섬이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밤에 여자가 나타나면 그게 사람인지 귀신인지 어떻게 아냐?"
껄떡쇠가 딴지를 걸었다.

"사람은 머리를 곱게 빗어 올리고 귀신은 산발한답니다."
"야, 너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소리도 못 들어 봤냐?"
"그건 몇 백 년 후에나 나오는 소린디요?"
"곰실네 기방에서는 지금도 써먹더라."
"그게 무신 소린디요?"
"여아가 여성으로 변하고 그 여성이 여인으로 변하는 여자의 변신 말이다?"
껄떡쇠가 석섬이의 턱밑에 얼굴을 디밀었다.

"잘 모르겠는디요."
"귀신이 머리를 곱게 빗고 나타나면 어떻게 알아보냐 그 말이다."
석섬이가 껄떡쇠의 턱을 치받았다.

처녀귀신 어셥쇼, 발가벗었으면 쌍수를 들어 대환영

"사람 옷은 바느질 자국이 있지만 귀신 옷은 이음매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의무봉(鬼衣無縫)이라 하지 않습니까?"
"야, 너 문자 쓴다. 그럼, 발가벗고 나타나면?"
"후웃!"
"푸, 푸, 푸!"
"히. 히. 히!"
게슴츠레한 눈가에 끈적끈적한 눈웃음이 달빛에 반짝거렸다.

"왜 이렇게 으스스하지"
엉금엉금 냇가를 벗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포복절도하며 배를 잡고 구르는 사람도 있었다.

"귀신이라도 좋다. 처녀만 나타나면 원이 없겠다."
"크크크!"
"푸하하하"
"처녀 귀신 벼락 한 번 맞아 보면 좋겠다."
"푸훗!"
"꺄악!"
잔잔한 웃음소리가 냇물과 함께 흘러갔다.

"자, 자, 자, 쉰 소리 그만 하고 출발한다."

안익신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은진 관촉사를 지나 채운면 야화리에 도착했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를 이루는 내가 흐르고 있었다. 눈앞에 흐르는 내를 건너면 전라도다. 산채꾼들은 원항교를 건넜다.

훗날 영조시대 건립되었다
▲ 미내다리. 훗날 영조시대 건립되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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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가지 않아 이제는 제법 큰 내가 앞길을 가로 막았다. 밀물 때면 강경포구에서 갯물이 들어오는 내였다. 산채꾼들은 바지를 걷어붙이고 내를 건넜다. 훗날 영조 때 미내 다리가 건설된 내다. 이제부터 호남대로다. 얼마쯤 갔을까. 호남대로 들어 제법 큰 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용담이다.

"여기에서 해를 보내고 땅거미가 찾아오면 떠난다."
산채꾼들이 숲속에 몸을 숨기고 휴식을 취했다.

"전라도의 공기는 어떠한지 정탐을 해야 하지 않겠소."
이지험이 제안했다.

"누구를 내보낼까요?"
"내가 내려갔다 오겠소."
"책사가 내려가시는 것보다 빠릿빠릿한 젊은이를 내려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소?"
나극룡이 끼어들었다.

"아니오. 내가 이곳 지리를 잘 아니 내가 내려갔다 오겠소."
이지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지험은 은진사람이다. 바로 이웃 용담의 지리는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다.

"조심해서 다녀오시오."
떠나는 이지험을 배웅한 안익신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지험의 눈동자가 조금 이상했다. 대화할 때면 항상 눈을 맞추고 얘기를 하던 이지험이 오늘따라 시선을 피했다.


태그:#처녀귀신, #미내다리, #원목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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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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