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신라 24대 임금인 진흥왕은 흔히 '신라의 광개토대왕'이라 일컬어진다. 그만큼 진흥왕은 나라의 영토를 넓혔다. 그가 개척한 땅의 넓이는 북한산의 순수비, 함경도의 황초령비, 마운령비가 잘 증언해준다.

 

국보 33호인 창녕의 진흥왕 척경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555년 비화가야(경남 창녕 일대)를 정벌한 진흥왕은 561년 그 일대를 직접 방문하여 왕의 지배력을 천하에 과시한 다음 화왕산 한 줄기인 목마산 서쪽 기슭에 비를 세워 그 사실을 기념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1400여 년이 흐른 1950년, 낙동강변의 창녕에는 다시 전운이 흐른다. 육이오가 발발한 지 채 두 달도 안 되어 전선은 낙동강까지 밀려온다. 미군은 8월 3일 왜관 철교와 인도교를 폭파한다. 창녕에도 북한군 제 4사단이 몰려와 도강을 시도한다. 이 때 미군 제 9사단 등이 진퇴 공방 끝에 이를 물리친다. 진흥왕 척경비 바로 옆에 서 있는 UN군 전승기념비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550년 전후, 창녕에서는 동족끼리의 큰 싸움이 벌어졌다. 물론 그 당시에는 동족이란 개념이 없었다고 하지만, 어쨌거나 죽고 죽이는 혈투는 대단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1400년이 흐른 1950년 8월, 다시 이 곳에서 동족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외국인인 UN군까지 가세했다.  

 

두 비석은 나란히 서 있다. 국보인 진흥왕 척경비에 비해  UN군 전승기념비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비의 재질이 돌도 아니고 천박한 시멘트 덩어리이다. 그나저나 그 둘은 나란히 서 있다. 창녕의 두 비석은 1400년이라는 긴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역사 속의 전쟁을 되새기게 해준다. 평화의 소중함을 나란히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태그:#진흥왕, #창녕고분군, #UN군 전승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