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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술적 야권 단일화가 승리를 담보하지 못하는 이유

 

워싱턴가 1600번지(백악관)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다룬 <머더 1600>이란 영화에서 사건을 담당한 형사는 사진 한 장에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살해당한 여성의 사진 끝부분에 잘려나가 인화되지 않은 부분을 확대해 백악관 경호요원이 피해 여성을 경호하고 있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잘려나간 사진과 영화 얘기로 선거 관련 글을 시작하는 것이 다소 뜬금없을 수도 있겠지만, 주말 양일(24,25) 동안 보궐선거가 펼쳐지는 은평을 지역 각 후보의 유세장을 전전하면서 인화과정에서 잘려나간 1인치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먼저 시야에 들어온 후보 단일화로 선거 승리를 이끌어내겠다는 다짐인지 공약인지 아니면 일종의 언론 플레이인지 의도가 짐작되지 않는 야당 후보들의 현수막을 보며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랜 기간 동안 이 지역에 공을 들여온 이재오 후보 측은 지지율에서 월등하게 앞서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지역의 숙원사업 해결 같은 공약을 앞세워 민심을 파고들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기성 언론에서는 민주·민노·국민참여당이 전격적으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진 야권단일화가 과연 얼마만큼의 파괴력이 있을까하고 의문을 표하고 있지만 단일화의 효과는 3당의 지지율을 산술적으로 합친 수준을 절대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저의 예측입니다.

 

물론 이런 예단의 근거는 복합적입니다. 그 중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요소는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 은평주민은 피곤하다

 

각 정당에서는 정권심판론이니 지역발전론이니 하며 7.28 재보선에 갖가지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막상 지역 유권자들은 전국 동시 지방선거 직후 전개된 선거전을 성가시게 여기는 분위기가 역력했습니다.

 

행인이나 상인들은 후보들의 지지 호소에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귀찮아하는 모습도 공공연히 볼 수 있었고, 시장 주변 상가의 쓰레기통에는 각 후보들의 공약이 담긴 명함들이 구겨진 채 버려져 있었습니다.

 

시장의 상인 한 분은 "가뜩이나 장사도 안 되는 데, 간혹 문을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선거운동원들이니 짜증이 난다"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다른 한 분은 "이재오도 해 놓은 게 없지만 지역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에서 '심판론'을 재탕 삼탕하는 야당이 더 싫다"며 "투표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정치에 대해 냉소적인 분위기는 유세 현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유세장에는 각 후보를 무리져 따라다니는 지지자의 행렬만 이어질 뿐, 주민들은 후보 진영의 유세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으며 차량 정체 등에 항의하여 노골적으로 경적을 울려 불쾌감을 표시하는 차량도 적지 않았습니다.

 

 - 잘못된 단일화 방정식

 

현재까지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이재오 후보의 지지율은 야권 모두를 합쳐도 따라잡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야권은 당연히 시너지 효과롤 통해 역전을 기대하겠지만 효과를 내기에는 시기적으로도 너무 늦었고 방법으로도 특히 잘못됐다는 생각입니다.

 

야당이 선거를 이틀 앞두고도 단일화에 합의하지 못했던 것은 각 야당이 자기 정당에 유리한 방식의 단일화를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은평을 양보하면 호남 지역에서 지역구를 보장해 달라'는 소위 땅 놓고 땅 먹기식의 단일화 협상 과정은 은평을 주민으로 하여금 오히려 불신감을 부추기는 역효과가 더 컸다고 보입니다.

 

가려진 1인치의 진실

 

지방선거 출마를 위해 사퇴한 의원들을 충원하기 위해 실시되는 다른 지역과 달리 은평을 선거는 창조한국당 문국현 전 대표의 의원직 박탈로 인해 치러진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야당은 작년 9월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문 전 대표에 대한 검찰의 수사와 기소가 정권의 2인자인 이재오 살리기의 일환으로 전개된 이명박 정권의 정치보복적 사법살해행위라고 규정한 바 있으니, 이번 은평을 선거는 '이재오 구하기 시나리오'의 완결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대운하나 촛불정국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등 이명박 대통령 집권기간 동안 공룡 여당의 횡포에 공동대응해 온 야권 공조의 정신으로 돌아간다면 이번 선거전의 핵심 이슈는 정권심판이 아니라 정치 권력과 검찰이 공조해 진행하고 있는 '이재오 구하기 시나리오'가 완성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데 맞추어졌어야 합니다. 물론 그 배경에 야 4당 대표가 공동으로 '사법살해'라고 규탄한 바 있는 문국현 사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이번 선거에서 창조한국당은 후보를 내기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문 전대표의 사퇴 이후 선거 직전까지 오랜 기간동안 내분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비대위와 평당원측이 각각 별도의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지도부를 구성하는 등 지속되던 극심한 혼란이 수습되고 현 지도부가 중앙선관위에 등록된 것이 6월 말경입니다.

 

겨우 체제를 정비해가는 창조한국당측이 부랴부랴 은평을에 후보 등록을 하게 된 것이 타 야당으로 하여금 은평을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여 자당 후보로의 단일화를 고집하거나 혹은 양보를 조건으로 다른 지역구를 보장받는 식의 거래의 속셈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이 저로 하여금 공성경 후보가 뻔히 낙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비록 티끌만한 도움이라도 손을 거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이번 선거에 나선 공성경 후보의 공약은 그다지 거창하지 않습니다. 지역 발전을 위해 중대형 종합병원 건립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말로야 뭐든지 약속할 수 있겠지만 실천 가능한 공약만을 제시하려다 보니 (공약이) 거창하지 않다"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시장과 거리를 누비면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언급한 것은 2년 전 총선에서 이재오의 아성에서 문국현을 뽑아 주었던 은평 유권자들에게 잘못 알려진 재판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재판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한 사람에게 2~30분의 시간을 할애하며 설명하는 것도 개의치 않을 만큼 열성적이었습니다.

 

후보 당사자뿐 아니라 당원 지지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자당 후보를 당선시키거나 야권 단일 후보로 만들기 위해서 뛰는 것이 아니라 문국현의 가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투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협상 테이블에서 창조한국당이 완전히 배제된 후보 야권단일화 과정에 실망과 배심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24일 응암역 유세가 있기 전 마침 국민참여당 천호선 후보의 유세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마침 천 후보의 유세에 함께한 지지자와 창조한국당 지지자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김대중 전 대통령님 존경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님 정말 사랑하고 유시민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난 지방선거에서는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한명숙 후보의 당선을 위해 생업을 포기해가며 지지활동을 해왔습니다. 아마 그 때 그쪽(천호선 지지자)분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춤도 여러 번 췄을 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게 뭔가요? 이곳 선거는 정권의 사법살인 결과의 장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얼마전까지 함께 했던 동지들이 그 장물을 서로 내가 차지하겠다고 싸우다니요? 은평을 선거전에서 왜 야당이 문국현 문제를 언급초자 하지 않는 건가요? 실망입니다."

 

듣고 있던 국민참여당 지지자는 얼굴을 붉히며 문제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선거가 끝나면 내부에서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야권이 은평을 단일화 협상 테이블에 창조한국당을 배제시킨 것은 것은 정치 도의적으로도 옳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전략적으로도 큰 실수였습니다. 이재오 후보에 대한 은평 주민의 평가는 호불호가 분명합니다. 2년 전 총선에서 문국현 전 대표가 득표한 51%는 한나라당이나 이재오 후보에 반대하는 한편 대안 정치인 문국현에 대한 기대감이 표출된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야당의 단일화에는 2년 전 문국현을 찍었던 51%의 유권자를 투표장으로 이끌어낼 동기부여가 필요했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누가 야당 단일 후보가 되던 간에 정치보복적 차원으로 진행된 문국현 사법살해를 주요 이슈로 삼고 '왕의 남자' 이재오의 복귀가 사법살해의 시나리오의 완성이라는 점을 주지시킬 때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야권 단일후보가 문국현 문제에 적극 대처함으로써 부가적으로 얻어지는 선물은 또 있습니다. 바로 자발적이며 열성적인 자원봉사자들의 후원입니다. 그들은 지난 3년 동안 자신들의 가치를 이루거나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해 왔습니다. 대선에서 그랬고, 총선에서 그랬으며 문국현 재판과정이나 창조한국당의 내홍과정에서 그래왔습니다. 야권이 단일화 협상 테이블에서 창조한국당의 목소리에 조금만 귀를 기울였다면 단일화의 시너지 효과는 선거 판세를 뒤집을 수 있을 만큼의 폭발력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 단언합니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씀드리자면 저는 무조건 문국현을 지지하는 소위 '문빠'가 아닙니다. 창조한국당 당원도 아니지요.

 

다만 대안정치인으로서 문국현이 가진 가치와 자발적인 정치 참여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창조한국당의 정치 문화의 소멸을 안타까워하는 입장에서 이 일을 모른 채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설사 어떤 불필요한 오해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진실에 입각하여 바른 말을 해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안 하니 저라도 해야지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과 한겨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은평을, #야권후보단일화, #문국현, #이재오, #사법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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