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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을 어지간히 좋아하는 나라도 이래 보기는 또 처음이다. 하루 24시간 중 1/3이 넘는 8시간 30분동안 꼬박 기차에 실려 다니는 일.

아침잠 많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나, 여행 가는 날만은 예외다. 오전 다섯 시 사십 분에 알람과 함께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이른 여름 해가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있어서, 이른 시간에 일어난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뭐랄까, 이런 시각에는 아직 간밤의 흔적이 조금쯤 더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시간에 일어날 일이 잘 없는데 평소와 다를 바도 없네'하는 심드렁함 같은 것을 느끼며 오전 6시 15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 분주하게 몸을 움직인다.

평소같으면 쿨쿨 자고 있을 시간이지만 새로운 출발의 설렘에 좌석을 뒤로 끝까지 젖혀도 잠은 오지 않는다. 조치원과 제천에서 두 번이나 환승해 가는 나의 목적지는 강릉. 호남선에서 시작해 충북선, 태백선을 지나 영동선의 끝까지 가는 대장정이다.

열차는 점점 산골로, 고랭지 채소밭에서 국내 유일 스위치백까지

 강원도께 접어들자 차창밖의 풍경이 탁 트이기 시작한다.
 강원도께 접어들자 차창밖의 풍경이 탁 트이기 시작한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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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아래 판잣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강원도 산골 어드메. 이런 곳이 있는 반면 한쪽에는 화려한 네온사인을 밝힌 모텔과 리조트가 즐비하여 대조된다.
 산 아래 판잣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강원도 산골 어드메. 이런 곳이 있는 반면 한쪽에는 화려한 네온사인을 밝힌 모텔과 리조트가 즐비하여 대조된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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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쪽으로 기차를 타고 다니다보면 만나는 고랭지 채소밭. 한국지리 교과서에서만 보던 것이 눈앞에 펼쳐지니 신기하기만 하다.
 강원도 쪽으로 기차를 타고 다니다보면 만나는 고랭지 채소밭. 한국지리 교과서에서만 보던 것이 눈앞에 펼쳐지니 신기하기만 하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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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만고만한 산과 강과 건물들 사이를 달리다가 어느 순간 시야가 탁 트여오면, 안내방송을 듣지 않아도 이제 강원도에 접어들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철로 아래 펼쳐진 침엽수림의 골짝과 말로만 듣던 고랭지 채소밭. 높아지는 고도에 왠지 귓구멍까지 먹먹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기차는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달린다.

알랭 드 보통은 <동물원에 가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차 여행이 주는 사색을 예찬한다.

"모든 운송 수단 가운데 생각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아마 기차일 것이다. 배나 비행기에서 보는 풍경은 단조로워질 수도 있지만, 열차에서 보는 풍경은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 열차 밖 풍경은 안달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사물을 정확하게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인다. 기차를 타고 가다 우리는 순간적이지만 남의 사적인 영역을 보고 영감을 얻기도 한다. 기차는 어떤 여자가 부엌 찬장에서 컵을 꺼내는 순간을 보여주었다가, 이어 테라스에서 어떤 남자가 자고 있는 모습을 구경시켜주었다가, 공원에서 누군가가 던진 공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아이의 움직임을 드러내기도 한다."

내가 유난히 기차를 좋아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고속버스는 무궁화호 열차보다 빠르지만 오히려 더 지루하다. 짙게 선팅돼 새까만 창밖으로 보이는 거라곤 오로지 고속도로 방음벽, 지열이 올라오는 아스팔트길, 저렴한 부지에 대형으로 지어놓은 공장이나 창고 들. 무진장한 속도로 달리다 이따금 휴게소에서 십오 분씩 쉬어가는 일은 마치 무리한 달리기 선수가 숨을 헐떡이는 것만 같다.

그에 비해 기차는 느긋하지만 꾸준하게 움직이며 다양한 삶의 풍경을 보여준다. 새로운 시야가 주는 자극은 훌륭한 영감의 원천이어서, 나는 끊임없이 사진을 찍고 펜을 놀린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매 장면이 순간순간 던져주는 상념들을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기 전에 붙잡아서 사진으로, 글자로 고정시켜 박아 두는 것이다. 지루할 틈은 전혀 없다.

 기찻길 바로 옆에 있어서,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집. 어떻게 이런 곳에 집이 있는지 신기할 따름.
 기찻길 바로 옆에 있어서,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집. 어떻게 이런 곳에 집이 있는지 신기할 따름.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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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열차가 태백선에서 영동선으로 넘어가 통리역을 통과할 즈음 기다리던 안내방송이 나온다. 바로 '스위치백' 구간이 시작됨을 알리는 것. 국내에서 유일하게 영동선의 흥전~나한정 구간에 남아 있는 스위치백은 강원도의 산길이 워낙 험해 철로를 직선으로 놓을 수가 없다보니 산허리를 에둘러가게 설계한 기술적 장치다. 쉽게 말하면 철로가 'Z'자 모양으로 생겨서 진행하는 중간에 후진이 필요한 것이다. 몇 분 동안 기차가 거꾸로 가는 움직임을 경험할 수 있다.

그냥 역방향 기차를 타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희한하다. 몇 자리 건넌 곳에 엄마와 함께 탄 꼬마는 "어! 뒤로 간다!"하면서 가만 있지 못하고 까불어댄다. 스위치백은 예정대로라면 몇 년 이내에 없어진다는데, 그 전에 영동선을 타 보게 되어 감개가 무량하다.

 해외의 어떤 유명 해변 부럽지 않게 아름답던 창 밖의 동해
 해외의 어떤 유명 해변 부럽지 않게 아름답던 창 밖의 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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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랗게 깨끗하던 동해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랗게 깨끗하던 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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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치백 구간 그리고 기차가 서지도 않는 몇 개의 작은 역들을 지나 다음 눈요기 메뉴는 바다!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랗고 깨끗한 동해를 보며 "여기 우리나라 맞아?"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잦은 파도가 갯벌의 흙을 일어 황색으로 보이는 서해안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바다란 다 그런 것인 줄로 알았으니까.

갈앉은 돌이며 모래빛... 해변에서 몇 미터 이상 떨어진 열차 안에서 내다보기에도 파랗고 투명하기 그지없는 동해를 보며, 비싼 돈 들여 해외여행 갈 것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가족여행을 가서 본 필리핀 보라카이의 일곱 빛깔 바다가 꼭 이랬다. 가슴이 두근두근할 지경. 동해역께부터 해서 망상의 해수욕장과 드라마 <찬란한 유산>에도 나왔던 오토캠핑장, 그리고 두말할 나위도 없이 유명한 정동진까지, 그저 눈이 호강이다. 성수기를 피해 바지런히 나서기를 참 잘 했지 싶다.

바다열차 타고 색다른 추억 만들기

13시 46분에 강릉에 도착하기로 한 열차는 5-6분 가량 연착했다. 무궁화호를 타고 다니다보면 5분 정도 지연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문제는 바다열차로 갈아타는 일. 강릉에서 동해, 추암을 거쳐 삼척까지 들어가는 바다열차가 13시 50분에 떠나는 걸로 알고 있었기에, 내리자마자 역무원에게 다짜고짜 "바다열차 떠났어요?" 묻는다.

 강릉역에 대기하고 있는 바다열차. 강릉~삼척 구간을 운행하는 3량짜리 관광용 열차다.
 강릉역에 대기하고 있는 바다열차. 강릉~삼척 구간을 운행하는 3량짜리 관광용 열차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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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내가 알고 있던 시간표가 예전 것이어서, 바다열차 출발까지는 아직 20여 분이 남아 있었다. 그럼 그렇지, 다 고려해서 기차 시간을 배정했겠지 하며 한숨 한 번 크게 쉬고 표를 구입했다. 아직 성수기가 아닌데다 평일이라 현장에서 표를 살 수 있었지만, 주말 같은 때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어려운 눈치다. 강릉에서 삼척 사이를 오가는 바다열차는 하루 3회씩 총 6회만 운행하기 때문이다. (바다열차 일반실 1만원, 8월부터 1만2천원으로 인상. 특실 1만5천원. 예약 www.seatrain.co.kr)

바다열차는 일반 열차가 아니라 관광상품으로 개발된 특별한 열차여서, 내일로티켓을 가지고 탑승할 수 없고 따로 표를 끊어야 했다. 시원한 바다 그림이 그려진 3량짜리 객차다. 바다열차 자체에 대한 기대보다는 동해에서 추암, 삼척해변, 삼척역에 이르는 삼척선을 운행하는 일반열차가 없기 때문에 그쪽을 들어가보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막상 열차에 오르자 눈이 휘둥그레진다.

 바다열차의 내부 모습. 일반 객차와는 달리 좌석이 모두 창을 향하고 있다.
 바다열차의 내부 모습. 일반 객차와는 달리 좌석이 모두 창을 향하고 있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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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바다 속에 있는 것처럼 그림이 그려진 내부에 좌석은 모두 창 쪽을 향하고 있다. 관광열차란 이런 거구나!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탑승객들은 모두 관광객이기에, 다들 달뜬 듯 즐거운 목소리로 여기저기 환담을 나누고 있다. 분위기, 훈훈하다.

이내 바다열차가 출발하자 앞쪽에 달린 모니터에서 방송이 나오기 시작한다. 열차 내 방송국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방송 진행을 맡은 승무원 분의 입담이 수준급이어서, 승객들은 내내 깔깔대며 웃고 있다. 사연을 보내면 방송을 통해 소개해 주고, 신청곡도 받는데 아주 단순한 형태이지만 생전 처음 '옆으로 가는' 기차를 타서 신이 난 승객들은 연신 문자 메시지와 엽서를 보내온다.

 바다열차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창밖으로 파랗게 펼쳐진 동해.
 바다열차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창밖으로 파랗게 펼쳐진 동해.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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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승객들이 탄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창밖으로 푸르디푸른 동해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분명 강릉으로 올라갈 때 무궁화호에서도 같은 바다가 보였지만 아무도 이렇게 좋은 표를 내진 않던데. 일반 열차보다 큰 창문에, 모조리 바다를 향한 좌석. 마음껏 웃고 떠들어도 누구에게 폐가 되지 않는다는 안심. 바다열차를 탔다는 특별함이 있기에 모두가 솔직할 수 있는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더 많은 사진과 정보는 기자의 블로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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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되는 거라고 믿는 사람. <청춘, 내일로>,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쓴 여행작가. 제4회 오마이뉴스 대학생 기자상(2010), 청춘 기자상(2013) 등 수상. 2016~ 제주도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