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외할아버지의 빈소가 마련된 울산시민장례식장
 외할아버지의 빈소가 마련된 울산시민장례식장
ⓒ 김가람

관련사진보기


이번 기말고사 기간에 울산에 계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울산이 고향인 엄마와 외삼촌은 22년 전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셨다. 외삼촌은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울산시 보건환경연구원이 되어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그런데 엄마는 고향에 가지 않고 아빠를 만나 결혼해 부천에 살고 있다. 외갓집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자연 외갓집에 가는 일은 연중행사처럼 되어 버렸다.

엄마가 외할아버지를 본 것은 고향을 떠나온 후 10~15번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동안 외할아버지는 연로하셨고 83세의 연세로 지난 6월 28일 새벽에 돌아가셨다. 하필 그 기간에 나는 기말고사를 쳤다.

부모님은 장례식에 참석하시고 나 혼자 집에 있었다. 외할아버지의 가시는 길을 보고 싶었지만 고3인지라 어쩔 수 없이 가지 못했다. 우울한 마음으로 시험에 임하는 나에게 담임 선생님은 "지금은 중요한 시기니까 돌아가신 것이 마음 아프겠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공부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위로해 주셨다.

외할아버지는 알고 계실까? 외삼촌이 박사학위를 받은 사실을. 외갓집이 있는 울산시 울주군 온양면 망양리  원동에 걸린  현수막
 외할아버지는 알고 계실까? 외삼촌이 박사학위를 받은 사실을. 외갓집이 있는 울산시 울주군 온양면 망양리 원동에 걸린 현수막
ⓒ 김가람

관련사진보기


나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외갓집에 간다 해도 할아버지와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보통 명절 연휴 때 외갓집에 갔는데 경북 영덕에 있는 큰집에도 들러야 하기 때문에 밥 한 끼 정도만 먹고 오는 정도였다.

엄마가 간혹 들려주시는 이야기로 할아버지를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너무나 꼿꼿하셔서 남에게 피해 주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외갓집은 시골이라 도시에서 살기 어려워 시골로 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에게는 외갓집 방을 공짜로 내주며 살게 하셨다. 외할머니께 농사지은 곡식을 주라고 하시고 그런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보증도 서 주셨다고 했다.

이런 외할아버지의 성품을 이어받아서인지 외삼촌, 이모들 또한 꿋꿋하게 살아가신다. 엄마와 함께 상경해 공무원이 된 외삼촌은 우리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잘 안다. 삼촌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스스로 학비를 벌어 공부를 하셨다.

이 삼촌은 '연어에 감염되는 바이러스 연구'로 며칠 전 이학(理學) 박사학위를 받았다. 삼촌이 연구한 바이러스 감염 위험도는 광견병의 8촌 정도 된다고 했다. 영문으로 쓰인 삼촌의 논문은 세계적인 바이러스 저널인 미국 학회지에 소개된다고 한다. 7년 동안 박사과정을 공부한 결과다. 앞으로 삼촌은 이 바이러스 백신 개발을 위해 또 연구를 시작한다니 삼촌을 보며 많은 것을 느낀다. 

외할아버지의 납골 묘지
 외할아버지의 납골 묘지
ⓒ 김가람

관련사진보기


외할아버지의 산소 옆에는 벼가 자라고 있다. 평생 농사를 지으신 외할아버지는 이제 이 벼가 자라 쌀이 되는  모습을 몰 수  없다.
 외할아버지의 산소 옆에는 벼가 자라고 있다. 평생 농사를 지으신 외할아버지는 이제 이 벼가 자라 쌀이 되는 모습을 몰 수 없다.
ⓒ 김가람

관련사진보기


외삼촌은 엄마와 서울에 올라 오셔서 보건전문대를 나와 4년제 대학에 편입을 해 높은 경쟁률을 뚫고 공무원이 되셨다. 서울시와 울산시 두 군데 합격했지만 고향을 찾아 가셨다. 엄마도 신혼 초 살기가 어려웠는데 친정 동생을 7년간 데리고 있느라 아빠 눈치도 많이 봤다고 한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괴롭고 외로운 투쟁도 지나고 나면 한낮 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한다는 게 항상 가슴을 짓누르면서 어언 시작과 동시에 온갖 어려움은 한꺼번에  날아가는 듯합니다. 박사과정 7년 동안이 긴 만큼 이 논문이 나오기까지 감사해야 할 분이 너무도 많습니다.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병석에 누워계신 아버님, 자식을 챙겨주시느라 다 늙어버린 어머님, 아빠가 박사과정 밟느라 언제 커 버린 줄도 모르고 초등학생이 되어버린 지원이에게 감사의 글을 전합니다."

논문 뒷장에 나와 있는 감사의 글이다. 박사공부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외할머니는 이 부분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큰 외삼촌이 전해주셨다. 외할아버지는 안타깝게도 외삼촌 논문이 통과되고 박사학위를 받는다는 소식이 있었을 때는 이미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학위 취득소식이 좀더 일찍 전해졌더라면 할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문에 매진하는 삼촌을 보며 나도 굳은 의지로 내 분야를 개척해야 겠다고 다짐한다.

덧붙이는 글 | 깁가람은 고등학생 시민기자 입니다.



태그:#외할아버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