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조선에 전해진 영화는 신기하고도 매력적인 볼거리이자 자본과 결탁한 근대적인 매체였다. 신문화를 경험한 이들에게는 근대화의 살아 움직이는 교재였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던 일본인들에게는 선전의 수단이었다. 공교롭게도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던 시기에 영화산업이 시작되었기에 조선영화인들은 일제에 협력하고 한편으로는 저항하면서 식민지 조선영화의 토대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에는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서 영화계를 이끌었다. 이들 식민지 조선영화인을 살피고 되새기는 것은 지난했던 현대사를 이 땅의 영화인들이 어떻게 통과해 왔는지를 가늠해 보는 영화사 이면의 기록이다. <기자 주>

단성사에서 상영된 <장화홍련전>은 조선인 관객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후 지방 상영으로 이어졌다. 경성의 경우 조선인 전용 극장이 존재했지만 지방의 경우 조선인을 상대로 한 극장이 드물었기 때문에 순회영사대의 형식으로 상영이 이루어졌다. 경리를 맡은 박승필의 인척들이 직접 순업대를 이끌었다.

<장화홍련전>의 성공과 영화제작

<장화홍련전> 성공을 기회로 단성사의 박승필은 영화제작에 본격적으로 자금을 투입하기로 한다. 영화제작의 책임은 박정현이었다. 그는 <장화홍련전>에서 손발을 맞췄던 이구영과 이필우를 중심으로 영화제작을 준비한다. 당시 이구영은 시마무라 호오게츠(島村抱月)가 세운 예술좌에서 신파극을 배워온 현철(玄哲)과 함께 조선배우학교를 세워 1회 연구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1925년 박정현은 조선배우학교 측에 단성사와 함께 영화 제작을 하자고 제안한다. 막 간판을 달고 활동을 개시하려던 조선배우학교 측에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박정현은 동국문화협회를 세워 그 산하에 조선배우학교를 편입시키고 영화제작을 준비했다. 현철의 주장대로 <숙영낭자전>을 영화로 만들기로 한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현철이 단성사와 조선배우학교 사이의 이윤 배분을 기존 7:3에서 6:4로 조정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여기에 조선배우학교 학생들의 분규가 더해져 사태는 복잡해졌다.

박정현은 동국문화협회를 해산했다. <숙영낭자전> 제작을 포기한 것이다. 그는 문제의 발단이 된 현철을 제외하고 애초 계획대로 이구영, 이필우 만을 데리고 영화를 제작하기로 한다. 박정현이 이필우, 이구영 등과 세운 고려영화제작소에서는 일본의 신파소설을 번안한 <쌍옥루>를 제작하기로 한다.

<쌍옥루>에는 일본에서 활동하다 조선으로 돌아온 김택윤과 강홍식 등이 출연했다. 영화의 길이가 길어져 상, 하 두 편으로 제작된 <쌍옥루>는 1925년 개봉되어 흥행적으로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고려영화제작소는 이구영과 이필우, 김택윤 등 주요 성원들 사이의 불화로 <쌍옥루>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작품으로 남기고 문을 닫았다.

스타 나운규와 손을 잡다

 1927년 9월 21일  <동아일보>에 실린 나운규프로덕션 창립 기사

1927년 9월 21일 <동아일보>에 실린 나운규프로덕션 창립 기사 ⓒ 한상언

1926년 단성사에서는 춘원 이광수의 주선으로 영화카메라를 구입한다. 이를 기회로 단성사 직속 영화부인 금강키네마를 설치한다. 금강키네마 역시 박정현이 책임자였고 단성사 선전부에 입사한 이구영이 연출자로 가세했다. 금강키네마 1회작 <낙화유수>를 준비하던 중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제작된 나운규의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된다.

주로 고전소설과 일본 신파극을 번안한 작품만이 영화로 제작되던 상황에서 당대 조선의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 등장하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카프 출신 평론가 최승일(崔承一)이 소설시대의 종언을 고했을 정도로 <아리랑>은 당대 지식인들의 관심과 대중의 지지를 함께 받았다. 박정현도 나운규를 주목했다.

<아리랑>과 <풍운아>를 연속적으로 성공시킨 나운규는 당시 조선영화계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나운규의 위치가 공고히 해질수록 행동은 독선적으로 바뀌었다. 1927년 공산주의 사상을 지닌 주인규, 남궁운, 이규설 등 오래전부터 나운규와 행동을 같이하던 동료들이 이념적 차이를 이유로 나운규와 결별한다.

그러던 차에 박정현이 나운규와 만난다. 박정현은 나운규에게 일본인 밑에서 영화제작을 하지 말고 단성사에서 자금을 지원해 줄 테니 차라리 독립하라고 설득한다. 나운규는 박정현과 함께 하기로 약속하고 동인제 회사인 나운규프로덕션을 세운다. 대표격인 총간사는 박정현이 맡았다.

1927년 단성사 직속의 금강키네마와 방계인 나운규프로덕션의 총지휘(프로듀서)를 맡게 된 박정현은 개봉되는 조선영화 대부분에 그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더불어 이 시기 단성사 직속 극단격인 신무대도 운영하면서 박승필의 대리인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던 상황에서 나운규가 박정현을 배신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1928년 <만주강을 건너서>라는 이름의 영화를 촬영 중이던 나운규가 단성사의 자금 외에 조선극장 측에서도 자금을 지원받아 제작비로 사용한 것이다.

이 영화는 검열에서 문제가 되어 제목이 <사랑을 찾아서>로 바뀌었는데 나운규가 영화의 개봉을 단성사가 아닌 조선극장에서 한 것이다. 나운규, 단성사, 조선극장 사이에 고소 고발이 이어지며 폭풍 같은 풍파가 지나갔다. 나운규와 단성사와의 관계는 이로써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죽마고우인 윤봉춘을 비롯한 동인 대부분이 나운규의 방종과 무책임을 이유로 나운규에게서 등을 돌리면서 승승장구하던 나운규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혼자 남은 나운규는 박정현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대 최고의 스타를 버릴 수 없었던 박정현은 금강키네마와 나운규프로덕션을 통합한 원방각사라는 영화사를 차려 나운규를 잡아두고 <아리랑>의 속편 제작을 하는 조건으로 고소, 고발 사건을 취하한다. 1930년 박정현의 지휘로 <아리랑>의 속편 격인 <아리랑 그 후 이야기>가 제작된다. 이구영 연출, 나운규 주연이었다. 이어 나운규 연출, 주연의 <철인도>도 제작되었다. 이 영화들은 좌익영화인들의 집중적인 공격대상이 되었다.

이후 원방각사의 활동은 지지부진 했다. 대공황의 여파로 조선에도 불황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인 극장 간의 경쟁으로 수입영화의 단가가 폭등하자 극장 경영은 더욱 어려워졌다. 1930년부터 경성에 상영되기 시작한 토오키 영화로 인해 무성영화를 제작할 필요성도 줄어들었다. 단성사에서는 더 이상 영화제작 자금을 지원하지 않았다. 이 시기 조선 영화의 제작 편수는 급감한다.

박승필 사후 단성사 경영

1932년 단성사 운영자 박승필이 사망한다. 단성사의 2인자였던 박정현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토월회의 박승희와 박승필 간의 단성사 운영권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다툼이 마무리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박승필이 가지고 있던 단성사 운영권이 누구의 손에 돌아갈지가 초미의 관심이었다. 당시 단성사를 소유하고 있던 다무라 미네는 단성사의 운영권을 단성사 지배인인 박정현을 중심으로 한 단성사 종업원 측에 넘겨주었다. 박정현은 박승필의 유족에게 금전적 보상을 약속하고 단성사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게 된다.

박승필의 유족이 경영에서 물러난 단성사는 박정현을 중심으로 동인제로 운영되었다. 박정현은 아들 박명준에게 매표주임을 맡겼고, <장화홍련전> 이후 박정현이 지휘한 대부분의 영화를 연출한 이구영과 서상호의 동생이자 단성사 영사기사 출신으로 변사로 전향한 서상필 등 자신과 가까운 인물들로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1933년 박정현은 동인제로 운영되던 단성사를 경영난을 이유로 박정현 사장체제로 바꾸었다.

박정현의 친정체제로 운영되던 단성사의 경영은 날로 악화되었다. 대내외적인 상황 모두 호의적이지 않았다. 1934년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이 시행되자 모든 영화관에서는 외국영화와 국산영화(일본영화)를 비슷한 비율로 상영해야 했다. 서양영화전용관으로 일본영화를 상영하지 않던 단성사에서는 의무적으로 일본영화를 상영해야 했고 이제 조선인 극장들과의 경쟁뿐만 아니라 남촌의 일본인 극장들과도 경쟁해야 했다. 낡은 시설도 문제였다. 1918년 지어진 단성사 건물은 새로 신축된 남촌의 영화관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1934년 12월 박정현은 토오키 영화 상영에 알맞은 모습으로 단성사를 신축 개관한다. 그러나 600여석에 불과한 단성사는 1000석 이상의 약초좌, 명치좌 등 남촌의 극장에 비해 협소했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의 메이저 영화회사들과 직영 혹은 공영 형태로 운영되던 남촌의 영화관은 단성사에 비해 수준 높은 영화들을 공급 받을 수 있었기에 프로그램에서도 차이가 났다. 자연스래 단성사는 2류 영화관으로 전락한다.

단성사와 함께 몰락

 1934년 12월 신축된 단성사

1934년 12월 신축된 단성사 ⓒ 한상언

1937년 박정현은 경영난을 타계하기 위해 극단 중앙무대와 손잡고 동양극장과 같은 연극전용관으로의 전환을 꾀했으나 실패했다. 믿었던 아들 박명준이 바람이 나 자금을 횡령해 써왔던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금고는 텅텅 비었고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아직 단성사의 신축비용도 갚지 못한 상황이었다.

박정현은 충격으로 몸져누웠다. 이 사이 단성사 운영권을 두고 분쟁이 발생했다. 단성사 고문변호사 혼다(本田)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김영호 등이 단성사의 운영권을 빼앗기 위해 박정현에게 1만2천원을 꿔주고 경영권을 위임 받았다.

이들은 박정현의 측근들을 단성사에서 몰아냈다. 해직된 이구영, 서상필, 박명준 등이 심신박약자에게 받아낸 위임장은 무효라며 진정을 냈다. 곤란해진 김영호 등은 우선 이들을 다시 복직시키고 운영권을 양도했다. 그러나 이도 잠시였다. 2차 경영권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채권자인 혼다와 김영호, 본정에서 여관을 운영하던 깡패 하야시(林)까지 가세해서 단성사의 운영권을 동아부인상회를 운영하던 최남(崔楠)에게 팔아 버린 것이다.

박정현은 처가에서 돈을 빌려 가까스로 운영권을 다시 획득했다. 그러나 경영할 능력이 없었다. 연이어 3차 경영권 분쟁이 일어났다. 이번엔 박정현의 사촌처남까지 가세하여 박정현에게서 운영권을 빼앗았다. 권총을 들이민 이들의 협박에 박정현은 4500원이라는 헐값에 단성사의 운영권을 일본국수회 소속의 흥행업자 와께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단성사의 운영권을 빼앗기고 엄청난 빚더미를 떠안게 된 박정현은 빈털터리가 되어 뚝섬의 토굴 같은 집으로 쫓겨 간다. 그는 거동도 못하는 상황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한때 조선영화의 총지휘자로 활약했으며 박승필 사후 단성사를 이끌었던 조선영화의 대부의 종말은 이렇게 비참했다. 1939년 8월 22일 박정현은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박정현의 손을 떠난 단성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1939년 6월, 단성사의 경영권은 명치좌를 운영하고 있던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넘어갔다. 이시바시는 조선색이 강한 단성사라는 이름 대신 새로운 이름을 공모했다. 1939년 9월 단성사는 내부 시설을 새롭게 단장하고 일제의 대륙침략을 기념하는 의미의 대륙극장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재탄생 했다.

공교롭게도 박정현의 죽음과 함께 단성사라는 이름도 함께 죽은 것이다. 해방이 되어서야 단성사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처음 맞는 3·1절을 기념하여 대륙극장은 적산관리인과 종업원들에 의해 원래 이름인 단성사로 개칭되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林鍾國 ; 朴魯埻 共著, 「朴晶鉉 篇」, 『흘러간 星座 : 오늘을 살고간 韓國의 奇人들』, 國際文化社, 1966.
한국예술연구소 편, 『(이영일의)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 / 복혜숙 / 이구영 / [이영일 대담]』, 도서출판 소도, 2003. 『每日申報』 『東亞日報』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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