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락부락한 인상을 가진 남자들 중에는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이들이 제법 많다. 마찬가지로 고운 피부와 귀여운 보조개를 가진 여성이지만 털털한 성격에 건망증이 두드러지는 이들도 제법 있다. <천천히 그림 읽기>라는 책에서 '읽는 미술'을 친절하게 안내한 미술사학자 '조이한'도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이름도 즐거운 그녀는 자신의 여성성을 자랑스러워하지만, 길을 자주 잃고 건망증이 심한 지라 꽉 짜인 일정의 여행보다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를 좋아한다. 계량적 효율성은 숫제 포기하고 슬렁슬렁 돌아다니다가 벤치나 노천카페에 주저앉아 자신에게 다가오는 거리의 풍경과 사람들을 관찰하는 그런 사람이다. 

<베를린, 젊은 예술가들의 천국> 책 표지
 <베를린, 젊은 예술가들의 천국> 책 표지
ⓒ 현암사

관련사진보기

이 게으른 여행자가 2년 전, 베를린의 거리와 미술관을 어슬렁거리면서 기록한 글과 사진이 <베를린, 젊은 예술가들의 천국>(조이한 저, 현암사 펴냄)이라는 책으로 엮여 나왔다. 저자는 이 책이 미술과 미술환경에 관한 에세이라고 정의하면서 여행안내서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은  활발한 예술창작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수필이면서 여행의 관점과 동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론리 플래닛> 못지 않은 훌륭한 여행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최근 수도로서의 정치적 지위를 회복한 독일 베를린이 미국의 뉴욕이나 프랑스 파리 못지않은 예술의 조건이 구비된 도시라고 보는 것 같다. 나아가 베를린이 젊은 예술가들의 천국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한 여름 내내 베를린의 거리와 사람들을 취재하고 미술관을 끈덕지게 돌아보았다. 그 때문에 책의 구성 또한 두 분야로 이루어져 있는데, 미술환경으로서의 베를린 거리와 사람들을 먼저 그리고, 이어서 베를린의 미술과 예술정책에 대해서 보고 느낀 것을 기술하고 있다.

삶의 여유와 낭만이 있는 도시, 베를린

베를린이라는 지명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불러일으키는 연상은 대부분 정치적인 것이다. 축구와 맥주는 뮌헨, 교통과 금융을 프랑크푸르트에 양보하고 나면  베를린이 연상시키는 이미지는 제한적이다. 물론 여행책자에는 페르가몬이나 유대인 박물관이 소개되기도 하지만, 이 또한 동서분단이나 유대인 학살로 상징되는 정치적인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다.

나도 베를린이라는 지명이 나오면 특별한 근거 없이 지레 그곳이 여행지로서 적합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흥미를 잃곤 했었다. 무엇보다 베를린은 위치가 애매하다. 일부러 들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패키지 상품에 묻혀 가려해도 웬만한 유럽여행 코스에서 빠져 있는 도시가 베를린이다. 그러나 보는 눈이 있는 사람들에게 베를린이란 매우 아름답고 살만한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은 알고 있다.

전쟁으로 부서진 교회 건물
▲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 전쟁으로 부서진 교회 건물
ⓒ 현암사

관련사진보기

눈 밝고 예민한 감성을 가진 미술사가 조이한은 뉴욕이나 런던과 같은 바쁘고 정신없는 삶과는 사뭇 다른 베를린의 거리와 사람들의 일상을 전한다.

그 일상을 스케치하는 방법이 독특한데, 예를 들면 동성애자의 거리인 놀렌도르프 슈트라세의 벤치나 '운터덴린덴'의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과 풍경을 마치 차범근 감독이 하는 것처럼 해설하고 중계한다. 분데스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였던 차 감독처럼, 저자는 독일생활 13년의 경험과 관록을 책 곳곳에서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저자가 안내하는 베를린은 교통의 중심지가 아니기 때문에 관광지가 주는 북적임에서 벗어난 여유로움이 깃든 도시이다. 나무와 공원이 많은 숲의 도시이며, 창작활동의 기초를 이루는 임대료가 저렴하고, 비어 있는 건물을 점거한 예술가에게 관대한 도시이다. 이러한 삶의 여유와 휴식, 넒은 공간과 지원제도가 있는 곳이 베를린이다.    

이처럼 도시를 살피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해석하고 변화시키려는 예술가나 그런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예술 정책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래서 역사의 상흔을 쉬이 지우기보다 기억하기 위해 애쓰면서 느리게 천천히 여유롭게 살아가는 베를린 사람들의 모습은 후반부에서 소개되는 베를린의 미술과 미술관이 갖는 특징과 서로 관련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여행자의 눈과 마음을 열어주는 미술, 미술관

화가나 조각가는 대상을 단지 재현하는 존재가 아니다. 예술가는 선택을 하고 강조를 한다. 예술가는 그들이 표현한 대상이 갖는 귀중한 특징들, 특히 감춰져 있거나 막연하게 느끼고 있는 것들을 드러내고 살려냈을 때 관객의 찬사를 받는다. 아마도 우리가 누군가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특정한 대상이 갖는 특징이나 의미를 그 예술가가 잘 골라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화가가 어떤 풍경이나 인물이 갖는 독특한 분위기와 이미지를 예리하게 선별해냈다면, 여행할 때나 그 인물을 상기할 때마다 우리는 화가가 본 바로 그 관점에서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상은 예술에서 현실 세계로 옮겨질 수 있다. 처음에는 그림이나 조각과 같은 전시물에서 이를 발견하지만, 나중에는 그림이 그려진 장소와 현실의 상황에서, 아름다움의 요소들을 발견하고 기뻐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베를린에서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들 너머로 겨울 떡갈나무의 아름다움을, 케테 콜비츠의 조각 '피에타'의 너머로 전쟁의 참혹함을 계속 볼 수 있는 것이다.

박물관 내의 설치작품
▲ 베를린 유대박물관 박물관 내의 설치작품
ⓒ 현암사

관련사진보기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그의 책 <여행의 기술>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에 묘사된 풍경을 살피기 전에는 프로방스에 별로 감탄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마치 배병우의 사진을 보고 난 뒤에 소나무 숲을 살피는 버릇이 생기는 것처럼, 미술관은 위대한 화가의 눈을 통해 어떤 풍경이나 장면을 보고 나면 그 풍경이나 장면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곳이다.

예술의 조건, 여행의 동기 

친절한 미술사가 조이한이 소개한 베를린의 거리와 미술관은 정치의 도시 베를린이 과연 젊은 예술가들에게 천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더불어 독자로 하여금 시원한 녹색 바람이 부는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떠나고 싶은 열망을 부추긴다.

이처럼 시각적인 예술과 여행은 오랫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어쩌면 베를린이 꿈꾸는 예술 정책의 최종적 목표는 시각적인 예술을 통해서 베를린과 독일에 대해 여행자가 갖는 종래의 선입견을 제거하고 새로운 여행과 인식의 동기를 부여하는데 있을지 모르겠다. 

막대한 재정적자를 감수하면서 도로를 깔고 하천을 파면 무얼 하겠는가? 만약 그 도시에서 아무런 예술적 영감도 얻을 수 없다면…. 막대한 예산을 들여 홍보물을 만들어 선전하면 무얼 하겠는가? 시야를 가리는 빌딩과 복제된 아파트들이 단절된 도시의 이미지만 전한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운동장에 걸린 서울시 로고를 보고 여행의 열망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여름, 여행의 동기와 관점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베를린에 가보라! 젊은 예술가들의 천국, 베를린에서 어쩌면 아름다움은 인위적인 것에 있지 않으며, 삶의 여유는 돈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보라. 어쩌면 그곳에서 당신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퉁이는 예술가들이 그려 주거나 글로 써 준 뒤에야 돌아보게 된다는 주장을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베를린, 젊은 예술가들의 천국>, 조이한/2010-6-25/ 현암사/16800원



태그:#베를린, #미술, #미술관, #조이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