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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인천 골목동네에서 충주 산골마을로 들어온 지 열흘 남짓입니다. 아이는 날마다 차츰차츰 깜깜한 밤에 익숙해지고, 들길을 거닐며 꽃과 풀과 나무와 벌레들을 사귀는 일하고 가까워집니다. 아니, 아이는 처음 목숨을 얻으며 이 땅에 나오는 때부터 온갖 목숨붙이를 동무로 삼았을는지 모릅니다. 아이를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도 매한가지일 텐데, 몸뚱이가 커진 어른이 되는 동안 이러한 만남과 사귐을 잊거나 잃었다고 해야지 싶습니다.

 

자동차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디를 다녀도 두 다리로 걷거나 버스나 기차나 전철을 탑니다. 도시에서는 전철과 버스가 잘 뻗어 있어 어디로든 어렵잖이 다닐 수 있었는데, 시골마을에서는 한두 시간에 한 대 지나가는 시골버스가 아니고는 면내이든 읍내이든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 살림집은 행정구역이 충주이니 충주 시내로도 갈 수 있다지만, 충청북도 충주시 맨 끝자락 우리 산골마을은 음성읍이나 금왕읍하고 훨씬 가깝습니다. 인천이나 서울에 볼일이 있어 고속버스를 타자면 충주 시내가 아닌 음성군 생극면 버스역으로 갑니다.

 

그런데 시골버스를 타는 일도 만만치 않으나, 우리 살림집에서 시골 버스역까지 걸어가는 일부터 만만하지 않습니다. 어른 걸음으로 삼십 분이요, 아이랑 함께 하느작하느작 걸으며 놀다 보면 사오십 분은 금세 지나갑니다. 버스를 타러 사십 분 남짓 걷고, 버스가 오기까지 삼십 분쯤 가볍게 기다리며, 버스를 타고 면내로 나갔어도 고속버스가 오기까지 또 이삼십 분은 넉넉히 기다립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며 보내고 또 보내는 나날입니다. 따지고 보면, 농사짓기도 씨앗을 심고 씨앗이 뿌리를 잘 내리고 줄기를 올려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기까지 기다리며 알뜰살뜰 돌보고 건사하는 일입니다. 기다리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고, 기다리는 동안 시나브로 이룹니다. 기다리지 않고서는 누릴 수 없고, 기다리는 동안 차근차근 누립니다.

 

시골 들길을 사십 분 남짓 걷는 동안 자동차나 자전거 한 대 마주치지 않습니다. 작은 시골마을이거든요. 아이는 마음껏 뛰고 앉고 장난하며 노래부릅니다. 걱정없이 놀고 구경하며 쓰다듬습니다.

 

낮나절 내린 빗방울을 아직 머금고 있는 풀잎을 쓰다듬습니다. 짝짓기하는 벌레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우리로서는 아직 이름을 알아내지 못하는 고운 나비들 팔랑걸림을 눈여겨봅니다. 동네에 제법 보이는 제비나비 가운데 한 마리가 우리 텃밭가에서 자꾸 맴돌거나 앉는데, 벌써 알을 낳으려 그러는가 궁금해집니다. 빨간 빛깔 오디가 어서 익어 까맣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는 아이가 쓰다고 뱉던 버찌를 오늘은 꽤나 잘 받아먹으며 씨까지 잘 발라냅니다.

 

아빠 사진기를 목걸이처럼 걸고 걸으며 신나게 사진찍기를 하며 놀던 아이는 사진기가 무겁다고 칭얼거리다가는 다리가 아프다고 꿍얼거립니다. 아이 엄마가 아이를 업습니다. 아이는 업힌 채 좋다고 방방거립니다. 옥수수밭을 지나고 고추밭을 지납니다. 벼포기 무럭무럭 자라는 무논 곁을 지납니다. 깃털 하얀 큰 새가 여러 소리를 내며 날아갑니다. 왜가리는 왝왝 하고 운다지만, 곁에서 왜가리를 바라보고 있자면 꼭 왝왝 소리만 내지 않습니다. 밤나절 잠자리에 드러누워 산골마을 멧개구리 소리를 들어 보면 개구리는 개굴개굴 괙괙 하는 소리만 내지 않습니다.

 

글을 쓴다는 사람들이나 교사로 일한다는 사람들이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나 국어학자라는 사람들이나 도시 아닌 시골에서 좀더 오래 살아가거나 시골마을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일하고 있다면, 국어사전에 오르는 새들 울음소리나 개구리들 울음소리는 사뭇 다르거나 무척 갖가지로 많이 싣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 짖는 소리라든지 고양이 우는 소리도 얼마나 많은가요. 이 많은 소리 가운데 국어사전에는 몇 가지 소리말이 실려 있는가요.

 

인천 골목동네에서 마실을 하면서 길가 돌 틈바구니에서 자라나는 꽃을 자주 보았습니다. 충주 산골마을에서도 아스팔트를 깔아 놓은 끝자리 블록담 한켠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는 봉숭아를 보고, 이 곁에서 앙증맞게 꽃을 피운 해바라기를 봅니다. 아이는 꽃송이 앞에서 떠날 줄을 모릅니다. 아빠랑 엄마가 불러도 한참 동안 올 생각을 않습니다.

 

동네 빈 기와집 둘레에는 아직 해바라기가 노란 꽃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꽃을 피운 해바라기도 곱지만, 아직 꽃을 피우지 않은 해바라기 또한 곱습니다.

 

산 너머로 해가 기울고, 느릿느릿 땅거미가 집니다. 오늘 저녁에도 반딧불이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밤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고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는 삶을 아이가 잘 받아들이며 사랑해주면 좋겠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푸르디푸른 산골마을 여름은 몹시 시원하고 호젓합니다.

 

ⓒ 최종규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태그:#산마을일기, #시골살이, #아이키우기, #사름벼리, #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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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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