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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가더라

산채의 봄은 짧다. 왔는가 하면 가버리는 것이 산중의 봄이다. 이름 없는 들풀들이 다투어 꽃을 피우더니만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했다. 신라의 공격으로부터 도읍지를 방어하기 위하여 쌓아올린 석성이 군데군데 허물어졌으나 돋아난 푸른 잎이 감싸주었다. 산채는 역시 천혜의 요새다.

계룡산에 걸쳐 있던 해가 환한 얼굴을 내밀었다. 새 아침이다. 토굴에서 나와 기지개를 켜던 산채꾼들이 넓은 마당에 모여들었다.

"포구에선 발에 치이는 게 덕자라는데 우리는 구경도 못하는구나."

간밤에 잠을 설쳤는지 털보가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덕자가 누군데?"

짝귀가 귀를 쫑긋 세우며 털보 곁에 붙었다.

"누긴 누구야, 덕자가 덕자지."
"네가 함부로 부르는 것을 보니 어느 놈 아낙은 아닐 테고...긴 말할 것 없다. 오늘 밤 보쌈 해오자."

짝귀가 침을 흘렸다.

"덕자를 어떻게 업어 오냐?"

털보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찜해놓고 혼자 업어오려고 그러지? 내가 알고 있는 이상 어림없다. 어디 포구냐?"
"어딘 어디야 갱갱이지."
"갱갱이 어디에 있는 처잔데?"
"우라질 놈, 덕자는 처자가 아니라 물고기여 물고기."
"이런 된장..."

군침을 흘리던 짝귀의 얼굴이 벌레 씹은 모습이 되었다.

"크크크. 회 쳐 먹어도 좋고 찜해 먹어도 좋은 허연 뱃살이 눈앞에 어른거리누나."

짝귀의 등을 토닥거리던 털보가 유쾌하게 웃었다.

병어와 비슷하나 몸 길이와 지느러미가 길다
▲ 덕자 병어와 비슷하나 몸 길이와 지느러미가 길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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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은 다 만들었는가?"

권대식의 시선이 대장장이에게 멈췄다.

"네. 서른 자루를 추가로 더 만들었습니다. 대장님이 쓰실 칼은 사인검을 만들려고 했으나 년(年)운이 맞지 않아 도리 없이 삼인검을 만들었습니다."

대장장이가 양날의 칼을 권대식에게 내밀었다.

"누가 이런 칼을 만들어라고 했나?"

질책이 떨어졌다. 사인검은 왕실에서 의전용으로 제작하던 칼이다. 그러한 칼을 산채에서 만든다는 것이 격에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뒤엎기 위하여 모여든 산채꾼들의 정서에 배치된다는 것이다.

"사인검은 순양(純陽)의 성질을 지녔기 때문에 음습한 궁궐에 처박혀 사특한 기운을 내뿜는 소용 조씨를 치는데 이보다 더한 칼이 없을 것 같아 소생이 만들어라 일렀습니다."

이지험이 무릎을 꿇었다. 이열치열이라 했던가. 사인검(四寅劍)은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제작하는 보검이다. 갑인(甲寅)생 조소용을 호랑이 기운이 응축된 칼로 치자는 것이다.

"창은?"

공공의 적을 치자는 염원이라는데 권대식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다 만들었습니다."
"화승총도 다 만들었겠지?"
"네. 대장님."

주눅이 들어있던 대장장이가 풀어진 권대식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글거렸다.

"손이 떨리지 않은 자들을 골라 화승총 쏘는 법을 익히도록 하라고 했는데 잘 돼가고 있는가?"

좌우를 휘둘러보던 권대식의 눈동자가 유탁에게 꽂혔다.

"네, 토굴에 거적을 씌우고 방사질을 하여 명중률을 높혔습니다만 며칠 전에 온 비로 염초가 젖어 잠시 훈련을 중지하고 있습니다."

화승총을 발사하면 뇌성벽력과도 같은 요란한 소리가 난다. 연습을 하여 손에 익혀야 하는데 그 소리는 곧 관가에 알려질 것이고 산채의 안위가 위태롭다. 이때였다. 잠자코 앉아 있던 이성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채에 한 발을 담그고 있는 무관

"세자빈이 사사됐답니다."
"뭣이라고?"

산채가 경악했다. 소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세자빈을 죽이려는 일당을 징치하고자 들고 일어선 산채꾼들에겐 충격이었다.

"이초관의 첩보는 믿을 수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한양으로 쳐들어갑시다."

안익신의 함성이 산채를 흔들었다. 이성룡은 현직 초관(哨官)이다. 종9품으로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이다. 중앙에 있으면 100명으로 편성된 한 초((哨)를 지휘 감독하고 통솔하는 무관이다. 지방에 있어 그와 같은 부하를 거느릴 수 없지만 그래도 10명을 휘하에 두고 있다. 그 부하를 데리고 산채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상전인 현감 유동준의 밀명을 받긴 했지만 조소용의 치맛자락에 휘감긴 임금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을 잘 알고 있다. 산채꾼들이 성(盛)하면 묻어가면 되고 쇠(衰)하면 발을 빼면 된다.

현감도 마찬가지다. 두령 유탁과 현감 유동준은 막역한 친구다. 사적으로 만나면 조정의 난맥상을 성토하는 사이다. 한양에서 내려오는 정보를 유탁에게 넘겨주고 유탁으로부터 수집한 첩보를 바탕으로 산채의 세(勢)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며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전형적인 양다리 걸치기다.

산채꾼들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대궐로 쳐들어가자."
"조소용의 거시기에 칼을 꽂자."
"김자점과 구인후의 목을 치자."

육두문자가 난무했다. 모두들 몰려나갈 태세다.

"자, 자들 진정하라. 여러분의 울분을 이해한다. 분명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고 며느리를 죽였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사가에서도 아비가 자식을 죽이면 패륜인데 하물며 백성을 어여삐 여겨야 할 나랏님이 자식을 죽인다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죄악이다. 군주이기 때문에 가능하고 통치의 수단이라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용서할 수 없다."

권대식이 삼인검(三寅劍)을 빼어들었다. 북두칠성이 양각된 칼날이 햇빛에 번쩍였다.

"세자를 죽이고 세자빈을 죽인 임금이 원흉이다."
"임금을 광해처럼 위리안치 하는 것도 사치다. 목을 쳐 숭례문에 효시하자."
"효시도 장대가 아깝다. 대궐도 불태워 버리고 조소용과 임금도 불살라 버리자."

격한 함성이 산채를 뒤흔들었다.

"임금이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의 휘하에는 관군이 있다. 우리의 힘은 약하다. 장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

권대식이 임금을 '그' 라 호칭했다. 받들어 모실 임금님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장군 같은 소리하지 마라."
"장군은 올 사람이 아니고 오지 않을 것이다"
"장군은 죽었다. 쳐들어 가 임금의 목을 따면 우리가 장군이다."

산채꾼들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태그:#소현세자, #사인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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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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