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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사용후 눌러주세요

 

며칠 앞서 동인천역 앞에 있는 고기집에 갔습니다. '삼겹살 1인분 2000원'이라고 해서 어떤 집일까 궁금하더군요. 값이 이만큼 싸다면 내오는 부피가 적겠지 생각했는데, 제 생각이 틀리지 않습니다. 비빔냉면 한 그릇을 시키고 고기는 세 그릇(3인분)을 시키지만 적잖이 모자랍니다. 소주 한 병을 비우고 고기집을 나서기 앞서 뒷간에 들러 물을 뺍니다. 오줌 누는 자리에 쪽글이 붙어 있습니다.

 

― 사용후 눌러주세요

 

무엇을 '쓴' 뒤에 누르라는 소리인가 생각해 봅니다. 오줌받이(소변기)를 쓴 뒤 단추를 눌러서 물을 내리라는 소리인지, 오줌받이를 쓴다면 어떻게 쓴 다음 물을 내리라는 소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글월을 놓고 곯머리를 앓거나 헷갈려 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모두들 "오줌을 누고 나서 오줌받이에 오줌이 남지 않도록 물로 씻을 수 있게끔 단추를 누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테니까요. 이 글월이 띄어쓰기가 틀린 줄을 헤아릴 사람조차 아무도 없지 않으랴 싶습니다.

 

 ┌ 쓰신 뒤 눌러 주세요 (?)

 ├ 볼일을 보았으면 눌러 주세요

 ├ 오줌 눈 다음 눌러 주세요

 ├ 오줌을 누었으면 눌러 주세요

 ├ 오줌을 누고 나서 눌러 주세요

 └ …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우리 나라 어느 뒷간에서도 "오줌을 누셨으면 물을 내려 주셔요" 하고 적은 곳을 아직 못 보았습니다. '오줌'이라는 낱말이 내키지 않는다면 '볼일'이라고 적어도 될 텐데, 이렇게 적어 놓은 곳조차 아직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못 보았으나 다른 분은 보셨을까요. 오줌 누는 일도 '사용'하는 셈인가요.

 

 

ㄴ. 외래어의 무분별한 사용

 

.. 외래어의 무분별한 사용에서 일어나는 것은 이러한 언어세계, 아울러 세계 자체의 빈곤이다 ..  <김우창-궁핍한 시대의 詩人>(민음사,1977) 380쪽

 

'외래어(外來語)'는 '들온말'이나 '나라밖 말'로 다듬습니다. '무분별(無分別)한'은 '생각없는'으로 다듬거나, 앞뒷말을 헤아리며 '함부로'나 '마구잡이로'로 다듬고요. '빈곤(貧困)'은 '가난'으로 손보고, '언어(言語)'는 '말'로 고쳐 줍니다. "세계 자체(自體)의 빈곤이다"는 "세계가 가난해진다"로 손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 외래어의 무분별한 사용에서 일어나는 것은

 │

 │→ 들온말을 마구잡이로 쓰면

 │→ 들온말을 생각없이 쓰면

 │→ 나라밖 말을 함부로 쓰면

 │→ 나라밖 말을 아무렇게나 쓰면

 └ …

 

보기글 짜임새를 건드리지 않고 다듬어 본다면, "들온말을 함부로 쓰면서 일어나는 것은 이러한 말세계, 아울러 세계가 가난해지는 일이다"쯤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듬어 놓고 보면, 어딘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설픈 번역 냄새가 나요.

 

글쓴이가 일부러 번역 냄새가 나는 글을 썼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만, 번역글이 아닌 창작글을 쓰면서 이와 같이 써서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글쓴이로서는 이런 글투가 좋다면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만, 이 글투를 통째로 추슬러 보고 싶습니다. "나라밖 말을 아무렇게나 쓰면 내 말밭과 아울러 우리 누리를 보는 눈이 허술해진다."

 

 

ㄷ. 대신으로 사용

 

.. 분교는 현재 폐교가 되어 가끔 마을회관 대신으로 사용되고 있다 … 마을 공동작업장을 부녀회원 5명이 빌려서 사용한다 ..  <이가라시 다이스케/김희정 옮김-리틀 포레스트 (1)>(세미콜론,2008) 42쪽

 

'현재(現在)'는 '이제'로 다듬고, "폐교(廢校)가 되어"는 "문을 닫아"나 "학교문을 닫아"로 다듬습니다. "마을회관 대신(代身)으로"는 "마을회관 구실을"이나 "마을회관처럼"이나 "마을회관과 같이"로 손봅니다. '마을회관(-會館)'은 '마을쉼터'나 '마을모임터'로 손보아도 됩니다. '마을 공동(共同) 작업장9作業場)'은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마을 열린 일터'나 '마을 일터'쯤으로 손질해 보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 마을회관 대신으로 사용되고 있다

 │

 │→ 마을회관처럼 쓰고 있다

 │→ 마을회관으로 쓰고 있다

 │→ 마을회관을 삼고 있다

 │→ 마을회관 구실을 하고 있다

 └ …

 

학교 아닌 곳을 학교로 쓰곤 합니다. 학교인 곳을 학교 아닌 곳으로 쓰곤 합니다. 처음부터 학교라는 간판을 붙여야 학교이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학교라는 간판을 붙였다 해서 학교 노릇을 옳게 하지는 않습니다.

 

학교로 삼아야 할 곳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학교로 삼을 수 없는 곳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사람 몫이요, 배우려는 사람 몫입니다. 교과서도 마찬가지라, 따로 어떤 책 한 가지만 교과서가 될 수 있지 않습니다. 세상 어느 책이든 얼마든지 교과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 빌려서 사용한다

 │

 │→ 빌려서 쓴다

 │→ 빌린다

 └ …

 

우리는 우리 슬기를 빛내어 우리 말글을 빛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슬기를 잠재우거나 내몰면서 우리 말글 또한 잠재우거나 내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우리 말글을 얼마든지 가꿀 수 있지만, 우리 손으로 우리 말글을 얼마든지 괴롭히거나 들볶을 수 있어요.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며 생각하고 말하는 매무새일까요?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 마음과 몸을 어느 자리에 어떻게 쓰고 있지요? 우리 삶이란, 우리 생각이란, 우리 말이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태그:#한자말,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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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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