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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언론에서 담론화되는 '지방대학'은 인종차별 언어인 '유색인종'과 유사한 맥락을 지닌다.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대상을 하나로 묶어 타자화함으로써 '열등함'의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유색인종으로는 드물게 ~가 되었다'든가, '지방대 출신으로 외국 명문대 교수가 되었다'는 외견상 긍정적인 맥락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성공은 '지방대'나 '유색인종'이 능력상의 아무 차이가 없음을 증명함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이 구분을 부각해 '희한한 일'로 의미화함으로써 차별적 범주체계를 재생산한다.
 한국언론에서 담론화되는 '지방대학'은 인종차별 언어인 '유색인종'과 유사한 맥락을 지닌다.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대상을 하나로 묶어 타자화함으로써 '열등함'의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유색인종으로는 드물게 ~가 되었다'든가, '지방대 출신으로 외국 명문대 교수가 되었다'는 외견상 긍정적인 맥락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성공은 '지방대'나 '유색인종'이 능력상의 아무 차이가 없음을 증명함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이 구분을 부각해 '희한한 일'로 의미화함으로써 차별적 범주체계를 재생산한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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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사회의 거울이다. 독특한 언어습관을 잘 살피면 한 사회의 강박을 읽어낼 수 있다. 한국 역시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특한 언어용법이 있다. '지방'이라는 말이 그렇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지방(local)'은 '전국'(혹은 '세계')의 상대 개념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서울'의 반대말로 쓰인다. 한국에서 '지방'이 보편타당한 의미를 갖는 드문 용례는 '서울 지방법원'과 (서울시장도 뽑는) '지방선거' 정도일 것이다. 이 말은 서울도 전국을 이루는 지방의 하나라는 당연한 (그러나 잊혀진) 상식을 일깨워준다.

'서울이 아닌 모든 지역.' 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언어인가? 도대체 '서울 아닌 지역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기에 한꺼번에 뭉뚱그릴 수 있을까? 워싱턴 디시 이외의 북미대륙을 싸잡아 '지방'이라고 부르거나 미국 이외의 나라를 '변방'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지방'이라는 말이 얼마나 기괴한 언어인지를 알 수 있다.

야만의 언어 '지방대학'

언어는 의미만을 갖지 않는다. 모든 말에는 사회가 부여한 정서와 평가 또한 담겨있다.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알 것이다. '지방'이 '서울이 아닌 지역'이라는 기능적 의미만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별개의 대상들을 한 덩어리로 묶는 행위 자체가 모멸의 의도를 갖는다. 인종차별적 표현인 '유색인종(colored)'처럼 말이다.

사전적으로 '유색인종'이라는 말은 '백인이 아닌 인종들'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백인이 아닌 인종들' 사이에 대체 무슨 유사성이 있으며, 이들을 백인과 구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놀랍게도, 영어권에서 오래 전 폐기된 '유색인종'이라는 모멸적 언어가 한국언론에는 흔히 등장한다. 이런 언론이 '지방'이라는 차별적 언어에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닐지 모르겠다.

'지방'의 담론 가운데 가장 억압적이고 모순적인 것은 '지방대'라는 말일 것이다. 완전히 다른 역사적, 문화적, 교육적 배경과 철학을 지닌 대학들이 왜 한데 묶여야 하는가? 단지 수도권에 있지 않다는 이유 만으로 말이다. 이 독특한 어법을 미국에 적용해보자. 한국인들이 높이 평가하는 대다수 대학들이 '지방대'로 편입될 것이다.

한국인들의 교육수준은 매우 높다. (한국의 교육제도 덕분에 높은 것이 아니라는 점도 덧붙여야겠다. 교육제도에도 '불구하고' 높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한국에서 초중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수도권'과 '비수도권' 대학을 구분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훌륭한 능력과 잠재력을 갖고있다는 말이다.

나는 이 문제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판단할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과 외국의 교육과정을 거쳐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그동안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의 학습능력과 연구성과로 출신대학의 '수도권'과 '비수도권' 여부를 짐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회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닌텐도는 도쿄가 아닌 교토에 본사를 두고 있다. <뉴스위크>는 닌텐도가 수도에서 지리적으로 분리됨으로써 일본 특유의 답답한 기업문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아래 사진은 닌텐도의 게임기 위(Wii)와 3디에스(3DS).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회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닌텐도는 도쿄가 아닌 교토에 본사를 두고 있다. <뉴스위크>는 닌텐도가 수도에서 지리적으로 분리됨으로써 일본 특유의 답답한 기업문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아래 사진은 닌텐도의 게임기 위(Wii)와 3디에스(3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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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학의 심각한 '하향 서열화'

최근 한국 정부와 기업은 '한국의 스티브 잡스' 양성 계획에 여념이 없다. 어리석은 짓이다. 한국에서 잡스같은 인재가 나올 수 없어서가 아니다. 양성하지 않아도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학벌과 배경에 눈이 먼 사회가 이들을 알아 보지 못할 뿐이다.

나는 '지방대'라는 말을 없애는 것이 한국사회에 포진한 인재들을 발굴하는 첫 걸음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학교 졸업장이 있든 없든 능력에 따라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학교 서열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것은 '경쟁원리'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경쟁이지 학벌경쟁이 아니다.

학교 서열화는 도리어 경쟁을 저해한다. 소수의 '특권계층'에 속한 학교들은 교육의 질로 경쟁하기보다는 '이름장사'를 하면서 학생 선발만으로 권력을 유지하려 들기 때문이다. 반면에 부당하게 낮은 대접을 받는 학교들은 경쟁 의욕 자체를 잃기 쉽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을 시켜도 졸업생들이 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기운이 빠지지 않겠는가?

'1명의 인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엘리트론'으로 유명한 기업 총수가 있다. 최근 그 기업에 속한 이사 한 명이 공개적으로 고교평준화를 비판했다. 그는 "평준화 제도는 말도 안 되는 소리"며, '평준화 체제 속에서는 우수 인재를 기를 수 없다'고 단언했다. 누구든 자신의 견해를 말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사실은 분명히 밝혀야 할 것 같다.

평준화된 한국 초중고등학생들의 학업성취도는 전세계에서 수위를 다툰다. 국제적으로 가장 경쟁력이 떨어지는 곳은 오히려 대학이다. 한국교육개발원의 2009년 12월 연구보고서를 보아도 이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보고서가 밝히고 있듯, "초중등교육에 있어서 문해력, 수학, 과학 등에 있어서 성취도는 가히 세계적인 수준"인 반면, "대학 경쟁력은 아직 밑에서 세는 것이 빠를 정도로 낮은" 실정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 가장 서열화된 고등교육 단계가 가장 경쟁력이 낮은 것이다. 한국에서 초중등교육이 '상향 평준화'된 반면, 고등교육은 심각한 '하향 서열화'의 길을 걸어 온 셈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정말 경쟁이 필요한 곳은 초중고등학교가 아니라 대학임을 말해준다. 대학들 사이에 경쟁을 유도하는 방법은 출신학교 이름 프리미엄이 아니라 졸업자들의 능력대로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학벌 사회의 폐지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하자면, 앞의 이사님은 자신의 회사 먼저 걱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경쟁이 중요하다면서도, 정작 그 기업의 총수는 능력 경쟁이 아니라 유전자 친밀도로 기업을 물려줄 계획이니 말이다. 게다가 평준화 체제 속에서 교육받은 그 '비인재'에게 말이다.

 교토대학의 상징인 시계탑. 자유로운 학풍의 교토대학은 60년대에 학생운동과 교수들의 진보적 사회참여로 명성이 높았다. 교토대학의 분방한 정신은 교토의 문화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교토대학의 상징인 시계탑. 자유로운 학풍의 교토대학은 60년대에 학생운동과 교수들의 진보적 사회참여로 명성이 높았다. 교토대학의 분방한 정신은 교토의 문화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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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보다 심각한 집중과 위계

두 가지 모두 근거 없는 차별이지만, '지방대'는 '유색인종'보다 더 부당한 내용을 담고 있다. '유색인종'은 그나마 소수인종에 대한 다수의 차별이었다. '지방대'는 소수의 몇몇 대학을 위해 국민 대다수가 교육 받는 배움의 터전을 차별하고 모욕하는 행위다.

일차적으로 이 언어는 지시 대상을 억압하지만, 그 피해는 '수도권대'를 비롯해 사회 전체에게 돌아간다. 실력을 갖춘 이들이 제대로 사회에 이바지할 기회를 누릴 수 없다는 것도 모두의 손실이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은 학교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서울 안에 존재하는 것 자체를 특권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심각한 집중화, 위계화, 획일화다. 이전 기사 <우리는 '이런 거' 왜 못만드냐고?>에서 집중과 위계가 어떻게 일본을 일사불란한 '일본주식회사'로 만들어 혁신과 창의성을 빼앗아갔는지를 지적했다.

믿기 어려울지 모르나, 한국의 상황은 일본보다 훨씬 심각하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신뢰(Trust)>라는 책에서 일본과 한국의 기업문화를 비교한다. 이 분석에 따르면, 한국 대기업은 과거 일본의 재벌(zaibatsu)을 모델로 삼아 성장했으나, 그보다 훨씬 집중적이고 위계적인 기업문화를 만들어냈다.

후쿠야마는 유교적 혈통주의를 원인으로 꼽는다. 한국의 기업은 아버지를 수장으로 하는 위계적 가정의 사회적 확장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는 전체의 합의를 중시하기 때문에 개인이 조직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반면에 한국은 경영자 개인이 혈통의 권위에 힘입어 조직 전체에 막대한 권력을 행사한다. 조직이 개인과 다른 목소리를 어려운 기업문화인 것이다. 이로 인한 독단성의 폐해는 현재 한국의 기업과 정부 모두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미국의 가장 창의적 산업이 동부의 대도시를 벗어나 캘리포니아에 자리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60년대 서부해안을 휩쓸었던 저항운동은 인권, 여권, 성적 다양성, 반전운동뿐 아니라 반부패, 환경주의, 탈도시 운동을 축으로 삼았다. 사진은 '실리콘 밸리의 수도'라 불리는 산호세의 전경으로, 이곳 교외에 애플, 구글, 인텔, 휴렛패커드, 어도비, 이베이 등이 자리잡고 있다. 애플의 본사가 있는 쿠퍼티노는 인구 5만 명, 구글의 마운틴뷰는 7만의 소도시다.
 미국의 가장 창의적 산업이 동부의 대도시를 벗어나 캘리포니아에 자리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60년대 서부해안을 휩쓸었던 저항운동은 인권, 여권, 성적 다양성, 반전운동뿐 아니라 반부패, 환경주의, 탈도시 운동을 축으로 삼았다. 사진은 '실리콘 밸리의 수도'라 불리는 산호세의 전경으로, 이곳 교외에 애플, 구글, 인텔, 휴렛패커드, 어도비, 이베이 등이 자리잡고 있다. 애플의 본사가 있는 쿠퍼티노는 인구 5만 명, 구글의 마운틴뷰는 7만의 소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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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과 닌텐도는 '지방'에 있다

<뉴스위크>는 2008년 2월 25일자 기사에서 '애플이 일제가 아닌 이유'를 분석했다. 기사는 획일화된 기업문화로 인해 혁신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에 비견되는 '예외적 사례'로 닌텐도를 들었다. 사용자의 신체 움직임을 포착하는 '모션콘트롤'을 처음 도입한 게임기 위(Wii)나, 안경 없이 3차원 시각효과를 내는 3디에스(3DS) 등 비디오 게임의 혁신을 주도해 온 회사다.

소니, 도코모, 엔이시(NEC) 등 혁신을 주도하던 일본 기업들이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닌텐도는 어떻게 창의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뉴스위크>가 분석한 이유는 간단하다. '도쿄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도쿄에서 먼 교토에 본사를 두고 있기 때문에 획일화된 '주류 기업문화'에서 벗어나 독자적 기술개발과 경영방식을 구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아웃사이더' 정체성이 풍요로운 문화적 전통과 결합하여 교토를 창의력의 새 메카로 만들었다. '주류문화'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혁신 도시로 부상한 곳은 교토만이 아니다. 미국 실리콘 밸리 역시 역시 동부의 대도시를 벗어나 서부의 자연 속에 둥지를 틂으로써 성공을 일군 사례다. 수도와 대도시에서 벗어나는 것은 상식화되고 통념화된 관료주의, 부패, 위계질서로부터 탈피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의 정보통신업계에는 '실리콘 밸리 흉내내기'가 유행이다. 회사를 학교처럼 잔디 깔린 '캠퍼스'로 조성하고 사원들의 자유로운 복장을 허락하는 것이다. 이것도 좋은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사고를 배우는 것이다. '캠퍼스문화'의 핵심은 잔디나 청바지가 아니라 주류문화를 거부하는 저항정신에 있기 때문이다. 실리콘 밸리가 60-70년대 저항운동의 온상이었던 캘리포니아에 자리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교토와 실리콘 밸리의 또 다른 공통점은 대학의 분방한 정신 속에서 성장해왔다는 점이다. 두 곳은 실질적 의미에서도 '캠퍼스'인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 교토는 자유로운 학풍의 교토대학, 그리고 실리콘 밸리는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 스탠포드, 산호세 주립대처럼 진보적인 학교들의 세례를 받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교가 기업을 움직여야지, 기업이 학교를 움직여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교토의 야경. 교토 고유의 문화적 전통은 도쿄 중심의 '주류 경영방식'과 구분되는 교토만의 기업문화를 일구어 낼 수 있었다. 한국은 일본보다 더 위계화된 기업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서울 아닌 지역들을 '지방'으로 치부하는 극단적 서울중심주의는 혁신의 여지를 더욱 좁혀가고 있다.
 교토의 야경. 교토 고유의 문화적 전통은 도쿄 중심의 '주류 경영방식'과 구분되는 교토만의 기업문화를 일구어 낼 수 있었다. 한국은 일본보다 더 위계화된 기업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서울 아닌 지역들을 '지방'으로 치부하는 극단적 서울중심주의는 혁신의 여지를 더욱 좁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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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와 실리콘 밸리는 이미 한국에

현재 교토는 '창의경영 연수'를 온 한국의 대기업 임원들로 붐빈다. 이 역시 좋은 일이지만, 더 현명한 것은 한국 곳곳에 교토를 만드는 것이다. 사실 만들 필요도 없다.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 자리 잡은 정부기관, 학교, 기업들이 '지방'으로 무시해 온 유서 깊은 도시들 말이다. 그곳에 투자하고 그곳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사람들을 과감히 채용해 보라. 그 기업들이 혁신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앞의 <뉴스위크> 분석기사는 일본 주류기업의 미래를 낙관하지 않았다. 이제 일본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곳곳에서 쏟아져 나올 혁신과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대만의 부상을 목격하고 있다. <뉴스위크>는 '애플을 만들지 못한' 일본에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하며 기사를 끝맺었다. "일본이 혁신을 원한다면 기술뿐 아니라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우리도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가 왔다. 못난 사람들이나 남을 차별하면서 즐거워하는 법이다. 차별의 근거가 희박하다면 더욱 그렇다. 그 행위가 스스로의 목을 죈다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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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와 <미디어기호학>을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