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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조금만 더 용써보면 뭔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고문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데 실체가 고문이기는 해도 느낌은 희망 같은 거라서, 그걸 날려버리고 나자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은 갑자기 지옥이 됐다. 욕구불만에 가득찬 일곱 살짜리가 되어 엄마한테 짜증이나 내고, 내내 투정이나 부리기 시작했다.

스물한 해 동안 부단히 스스로를 파악해온 바에 따르면 나는 무지 단순하고 또 일희일비하는 성격이라, 세상에 둘도 없이 불쌍한 시늉을 내다가도 <무한도전>이나 한 회 보고 나면 이내 까르르 웃고 털어버린다. 그런데 <무한도전>은 물론이고 <강심장>에 <세바퀴>까지, 오락 프로를 연이어 틀어 봐도 그게 안 됐다. 그래서 더 불안하고 괴로웠다. 천하의 박솔희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실없고 철없고 즐겁고 유쾌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내가?

결론은 너무 오래 머물렀다, 로 났다. 역마살이 따로 없이 언제나 '거주가 일정치 않'을 정도로 여기저기 쏘다니는 걸 좋아하는 내가 근 한 달이나, 그놈의 되도 않을 책을 쓴답시고 집과 도서관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여행의 시작, 기차표를 끊는 것부터

'내일로 티켓(RAIL路 Ticket)'이란?
젊은이들이 기차여행을 통해 추억을 많이 만들 수 있도록 7일간 새마을호, 누리로, 무궁화호, 통근열차를 자유석과 입석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한 기차표. 가격은 54,700원이고 매년 여름과 겨울 방학 동안에 운영한다. 올 여름 운영기간은 6월 18일부터 8월 31일까지이고, 사용개시일 기준 만 25세 이하만 구매할 수 있다.
코레일 홈페이지 http://www.korail.com

일단 기차표부터 샀다. 어딜 갈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일주일동안 기차를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내일로 티켓'을 끊었다. 매번 방학이면 늘 이용해왔던 티켓이라 복잡할 것도 없었다.

어디부터 갈 것인지도 사실 답은 간단했다. 바다. 도시인들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습관처럼 바다를 그리워한다. 성수기가 되기 전에 차분하게 바다를 보고 오자 생각했다. 우선 가까운 대천, 그리고 부산. 이 정도면 됐다. 나머지 일정은 차차 정하기로 했다.

어떤 이에게 여행은 답답한 일상의 환기통 같은 것이겠지만 나에게 있어 여행은 삶 그 자체다. 열여섯에 기숙사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한 곳에서 이 년 이상 살아본 적이 없다. 보통은 육개월이나 일 년마다 거처를 옮겼고 엠티가기, 여행, 외박도 밥먹듯 해 왔다. 아르바이트를 해도 꼭 타지에서 숙식하거나 전국일주하는 걸 한다. 삶이란 게 하나의 순례이자 여행이구나 생각하게 된 뒤부터는 언제나 가볍게 떠나기 위해 삶의 방식을 아예 바꿨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될 뿐인, 부질없는 쇼핑을 멈추었고 예쁘지만 불편한 구두 대신 쿠션이 좋고 편한 신발만 찾는다.

그런 내가, 근 한 달이 다 되도록 그 가벼운 발을 제자리에서만 동동 거렸으니 병이 나는 것도 당연했다.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를 붙잡을 수 없는 것 아닌가. 후후 불어 더 멀리 날게 해 주지는 못할 망정.

대천, 바다... 그곳은 내 고향

대천 가는 기차 안.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대천 가는 기차 안.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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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전날. 오랜만의 여행에 새삼 가슴이 뛰었다. 한동안 죽은 듯이 딱딱하게 굳어 뛰지 않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이다. 여름이 되니 밤새 귀뚜라미가 울고 네댓 시면 뒷산의 새들이 여간 짹짹대지 않는데, 새소리가 들릴 때까지 두근대며 잠을 못 잤다.

몇 시간 못 잤어도 기분만은 날아갈 듯이, 아침을 대강 챙겨먹고 기차역으로 간다. 장마철이라 걱정했지만 오늘은 맑다. 기차를 타자마자 튼 MP3 플레이어에선 '뜨거운감자'의 <고백>이 흘러나온다. 좋아하는 곡이라 기분이 좋다. 출발부터 아주 유쾌하다. 창밖으로는 산도 논도 푸르러서 역시 여름이구나 싶다.

충남 계룡에 있는 우리 집에서 대천까지는 무궁화호 기차로 두 시간 남짓이다. 대천역은 터미널과 바로 붙어 있고 10분 간격으로 해수욕장행 버스가 있다. 터미널에서 표를 사서 타도 되고 역전에도 차가 선다. 버스비는 천 원 남짓인데 티머니카드도 이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근처에 이마트가 있으니 이용하면 된다. 해수욕장에도 크고작은 마트와 편의점이 여럿 있으니 짐이 많다면 그쪽에서 사는 것이 낫겠다.

충남 보령, 그러니까 대천은 내가 태어난 고향이다. 일곱 살까지 살다 초등학교에 입학만 하고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왔다. 어릴 때라 기억은 흐리지만 괜히 친숙한 기분. 버스는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내질러 달리고 이십 분이 채 안 걸려서 해수욕장에 도착한다. 저기, 바다가 보인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평온한 대천의 바다
 평온한 대천의 바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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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 해수욕장
보령 머드축제로 유명한 대천 해수욕장은 무창포, 꽃지 해수욕장과 함께 서해안의 대표 바다다. 동양 유일의 패각분(조개껍질) 백사장으로, 물이 깊지 않고 수온이 적당해서 가벼운 해수욕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서울에서도 2시간정도밖에 걸리지 않고 용산역과 고속터미널에서 직행 차편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각종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고급 펜션도 있지만 저렴한 민박도 많아 친구들끼리 놀러와서 머무르기에 부담이 없다. 다양한 머드 체험을 즐길 수 있는 올해 머드축제 기간은 7월 17일에서 25일까지다.
대천해수욕장 http://www.daechonbeach.or.kr/
보령머드축제 http://www.mudfestival.or.kr/

설레는 마음으로 바다를 향해 간다. 신발을 벗어들고 바닷가를 걸었다. 6월이라 아직 물이 차다. 청량하다. 해수욕장은 아직 개장 전이라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대개 내 또래일, 친구나 연인 단위가 많다. 아이를 데려온 부부도 가끔. 그러고보니 작년에 여기로 동아리 엠티를 왔었다. 요 뒤에 어디쯤 민박에서 묵었는데. 머드 축제 기간 맞춰 왔는데 때마침 태풍이 몰아쳐서 고생 좀 했었다.

이렇게 온종일 백사장에 누워 광합성을 했다.
 이렇게 온종일 백사장에 누워 광합성을 했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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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두 시, 태양은 작열한다. 자외선 차단제도 제대로 바르지 않은 몸을 태양 아래 고스란히 누인다. 따뜻한 햇살이 좀 필요했기 때문이다. 뭔가 아주 많이 밝고 환한 것이 좀 필요했다. 저편에선 이글이글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백사장에 누워 글을 쓰고 생각을 하고 책을 읽으며 몇 시간이나 뒹굴거렸다. 점심으로는 집에서 싸 온 유부초밥 도시락을 먹었다. 한참을 그러고나서 일어나 보니 썰물이 좍 빠져나가 있다. 썰물처럼, 마음의 찌꺼기도 빠져나간다.

게의 숨구멍이 젖은 흙 위로 발 디딜 틈 없이 자리잡았다.
 게의 숨구멍이 젖은 흙 위로 발 디딜 틈 없이 자리잡았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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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모래 위를 걸었다. 게의 숨구멍이 송송 나 있다. 까치발을 든다. 종종걸음친다. 모래를 밟으면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이 게가 흙 속에서 큰 한숨을 쉰다. 미안해! 불가사리는 널브러져 꿈틀거리고 갈매기는 낮게 난다.

바다는 잔잔하고 갈매기는 낮게 난다.
 바다는 잔잔하고 갈매기는 낮게 난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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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응급처치... 내 비상약은 대천 바다예요

어느새 일곱 시가 다 되어서, 저녁 먹을 곳을 찾았다. 대천 해수욕장은 이름난 관광지이니만큼 식당도 많다. 생선회나 조개구이, 꽃게찌개 등을 판다. 성수기가 되면 호객하는 아주머니들의 외침 소리와 함께 북새통을 이룰 것이지만 지금은 한산하다. 노천식당 아무 곳에나 들어가 해물칼국수를 시켰다. 이름도 잘 모르는 온갖 해산물이 가득이다.

신비로운 황혼의 대천 해수욕장
 신비로운 황혼의 대천 해수욕장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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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바다는 신비했다. 사진으로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 내가 이 광경을 본 적이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유년이지만 그 시기를 이 바다가 있는 시에서 보냈다는 게 기쁘다. 파도소리를 뒤로 하고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는다.

여행 테라피. 살다 보면 마음에도 응급처치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주저없이 가볍게, 어느 때고 다녀올 수 있는 여행지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곳이 내게는 대천이다. 나고 자란, 그래서 친숙하나 그럼에도 늘 새롭고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

소요비용
내일로티켓 54700원
대천역→해수욕장 버스비 약 1000원(교통카드 이용)
해수욕장→대천역 버스비 약 1000원(교통카드 이용)
커피, 물 2000원
해물칼국수 6000원

덧붙이는 글 | 따뜻함이 필요해 떠난 스물한 살의 기차여행은 6월 말 시작해 8월 하순까지로, 이번 여름 내내 이어집니다. 더 많은 사진과 소통은 기자의 블로그에 있습니다.



태그:#대천, #대천해수욕장, #내일로, #보령, #머드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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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2011년 <청춘, 내일로>로 데뷔해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2021년 10월 아기 호두를 낳고 기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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