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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 축구는 경쟁과 승리의 결정체다. 오직 승자만 최고 대우를 받는다. 패자에겐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그만큼 월드컵도 자본주의 체제 속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패자에겐 끝 모를 추락만 남고, 승자에겐 더 넓은 무대가 기다리게 된다. 돈도 명예도 마찬가지다. 선택과 집중 외엔 그래서 어떤 묘책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세계화, 신자유주의체제의 산물들이 다들 그렇다. 돈이라는 맘몬이 세계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시장만능주의가 지고선의 자리에 올라 서 있다. 대기업과 다국적 기업이 환경파괴를 일삼아도 국가는 제제할 마음이 없다. 한 사람이 열 사람을 먹여 살리는데 그 입에 재갈을 물려서 뭣 하겠냐는 것이다. 윤리와 도덕은 낄 틈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때에 한국개신교는 뭐라 답을 할까? 되레 한국개신교도 성공과 낙오라는 강박 속에 살고 있지 않을까? 재물 축적과 재산 확장을 오히려 신앙의 축복으로 여기며 만족해하지 않을까? 지난 30년 동안 300년에 달하는 초고속 성공신화에 한국교회가 음으로 양으로 기여했다며 한껏 고조된 목소리를 내 놓고 있지는 않을까? 

 

강원돈 외 11명이 함께 쓴 <다시, 민중신학이다>는 지배적 야훼이즘에 대한 해방적 야훼이즘으로, 로마의 제국주의와 같은 팽창주의식 근본주의 선교정책에 대한 대안적 대항마로, 구축해 온 한국개신교 내의 70년대와 80년대 민중신학을 재평가하고, 90년대 이후 그 줄기가 희미해졌거나 제도권 안으로 흡수돼 버린 민중신학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보고자 한 뜻에서 나온 학술서다.

 

사실 70년대와 80년대 우리나라는 군사독재정권 치하에 있었다. 그 아래에서 의분을 터트린 백성들은 고통에 처해지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국개신교는 그 와중에 대부분 개인구원에만 치중하며 각자의 부와 성공신화를 꾀하는 기도와 집회에 열중했다. 하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에 초점을 맞춘 민중신학자들은 개인과 사회윤리의 부재를 일깨워 나갔다. 더욱이 그들은 민중이 당하는 고난과 함께 했고, 80년대엔 도시선교회와 산업선교회와 농촌선교회로 그 지평을 확대했다.

 

그토록 활발하던 민중신학도 90년대부터는 돋보이지 않았다. 그때 이후 적정 수준의 민주주주의가 우리사회에 구축돼 있는 까닭이었다. 그렇더라도 민중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불의한 집단들도 더 활개를 쳤고, 경제만능주의를 부추기는 세계화도 활활 타올랐다. 민중신학은 그때 수면아래에서 침묵하는 듯 했지만, 신자유주의체제로 대두될 이주노동자들의 문제와 같은 부분에 대비해 왔다. 다만 그것이 국가의 제도권 안에 흡수돼 있어서 본래의 신학적인 색깔을 나타내지는 못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자생적 질서를 만들어가기 때문에 시장을 시장 원리에 맡기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최저임금제, 사회적 소득재분배, 고용보장 등과 같은 시장 규제는 시장 주체들에게 도덕적 해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제아무리 사회적 형평과 연대라는 고상한 가치를 앞세워 시장 규율을 정당화하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공동체에 해악을 가져올 것이다.

 

따라서 시장을 시장원리에 맡기라는 주장은 그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적 결론이다. 그러나 시장 원리의 절대화로 치닫기 마련인 이와 같은 주장은 시장의 자생적 질서로 내세워지는 경쟁이나 시장분배나 가격장치에 대한 미신에서 기인한 것임이 분명하다. 제도가 자생적 질서에 따라 움직이게 내버려 두라는 주장은 제도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점을 도외시한다는 점에서 역시 신화요, 이데올로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90쪽)

 

이는 한신대학교의 강원돈 교수가 이야기한 것으로, 민중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최선의 길은 현재의 세계화 추세와 신자유주의체제에 어느 정도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사회윤리적인 차원의 제도적 장치를 강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그것만이 우리나라 백만이 넘는 이주노동자들을 보호할 수 있고, 환경을 파괴하는 무분별한 개발에 제동도 걸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성숙한 개인들일지라도 집단적인 이기주의의 힘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에 제도적인 장치로 그것을 옭아매자는 것이고, 그 일에 민중신학자들이 앞장서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엘리트 지식인 계층의 의식만으로는 완성해 낼 순 없을 것이다. 예전 70~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민중신학자들이 민중이 당하는 고통의 현장, 생태계가 신음하는 생명의 현장에 함께 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명령하거나 새롭게 디자인만하는 지배신학이 아닌 참된 디아코니아의 섬김의 신학을 추구할 때에만 그 지평을 새롭게 열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민중신학의 창시자인 안병무를 안병무답게 한 참된 면모이지 않았던가.


다시, 민중신학이다

강원돈 외 지음, 동연(와이미디어)(2010)


태그:#민중신학, #안병무, #강원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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