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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밤 서울광장에서 열린 남아공월드컵 아르헨티나전 거리응원에서 붉은 응원복을 입은 시민들이 중계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17일 밤 서울광장에서 열린 남아공월드컵 아르헨티나전 거리응원에서 붉은 응원복을 입은 시민들이 중계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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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이 하나 되는 월드컵!
온 국민 엔돌핀 솟아나게 한 월드컵 승전보!

모든 국민이 하나 된다는 월드컵. 그러나 나는 월드컵 시즌만 되면 그 온국민 안에 끼지 못한다. 월드컵 경기를 즐겨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2002년 월드컵 때도 단 한 경기도 제때 경기를 챙겨본 적이 없고, 이후에도 경기 전체를 자진해서 본 적이 없다. 특별히 축구를 좋아하지도 않는 데다가 여럿이 모여 응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사실 월드컵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무슨 월드컵 경기 안 보는 게 자랑이라고 글까지 쓰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월드컵 안 보는 사람'에게는 말 못할 고충이 있다. 월드컵 시즌이 되면 많은 사람들은 내게 "월드컵 안 본다고? 왜 안 봐? 너 한국사람 맞아?"라며 추궁하고 그들 중 상당수는 "한국 사람이라면 월드컵 경기를 봐야지"라고 훈수를 두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할 말이 없어 씁쓸하게 그냥 웃는 수밖에 없다.

김치 안 먹으면 '한국인' 아니듯 월드컵 안 보면 '한국인' 아니다?

나는 한국인으로 살면서 "한국인 맞느냐"는 요지의 검문(?)을 받은 경험이 수차례 있었다. 그 중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초등학교 5학년 때 김치 못 먹는다고 선생님 앞에서 억지로 급식을 먹어야 한 경험이다.

어린 시절 배추김치를 먹고 심하게 급체를 한 경험이 있던 나는 김치를 입에 대면 구토증상이 나타나곤 했다. 그래서 급식을 받을 때도 김치 반찬은 받지 않았는데 담임 선생님이 그 광경을 보시곤 윽박지르듯이 "김치 못 먹는 '한국인'도 있느냐"고 말씀하시면서 "너 당분간 급식 내 앞에서 먹어라, 김치 먹는 모습 꼭 봐야겠다"고 명령하셨다.

그 이후로 근 한 달간 나는 같은 반 아이들 있는 앞에서 선생님의 눈총을 받으며 김치를 먹는 '한국인'임을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그 지옥 같은 한 달 동안 나는 먹었던 급식을 집과 학교 화장실을 오가며 다 쏟아내는 '신공'을 발휘했다.

그때부터 나는 한국 사회에는 한국인이면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정해져 있고 이걸 하지 않으면 꽤 인생이 고달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월드컵 경기 보며 열광하기'라는 사실도 이내 깨달았다. 그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 때는 바로 2002년 월드컵 시즌이었다.
    
2002년 월드컵, 혼자서 고독에 몸부림칠(?) 때

남아공월드컵 아르헨티나전에서 한국팀이 1-4로 패한 가운데 17일 밤 서울광장, 세종로네거리 등에서 거리응원전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차량 통제된 세종로 거리에서 귀가하고 있다.
 남아공월드컵 아르헨티나전에서 한국팀이 1-4로 패한 가운데 17일 밤 서울광장, 세종로네거리 등에서 거리응원전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차량 통제된 세종로 거리에서 귀가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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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2년 월드컵 시즌만 회상하면 아찔하다. 정말 그때 나는 고독하다 못해 솔직히 무서웠다. 월드컵 경기를 안 보는 나로서는 어디가나 혼자였고 경기를 안 보는 걸 들킬(?) 때는 "한국인이 월드컵을 안 보느냐"면서 혼쭐이 났다. 하다못해 체육 수업 시간에도 거의 모든 아이들이 'Be The Red'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5천 원 주고 짝퉁이라도 그 티셔츠를 사야 할지 고민했다.

그 당시 친구들과 나눈 거의 모든 대화 화제는 '월드컵'이라 그 내용을 모르면 대화에 낄 수가 없었는데 이 때문에도 꽤 고달팠던 기억이 있다. 하루는 멋있는 남자 선수에 관심이 많았던 친구들이 "아 진짜 어제 안정환 봤어? 봤어? 진짜 멋있지?"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때 사실 나는 안정환 선수를 몰랐기 때문에 "안정환이 누구지?"하면서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대화에 끼지 못 해서 꽤나 서글펐던 나는 열심히 지식인과 구글링의 힘을 빌려 안정환 선수에 대해서 공부해 갔지만 그 다음날 친구들은 "김남일이 나이트 클럽가고 싶대. 귀엽지 않니?"라는 식으로 대화 주제를 옮겨가곤 해 나를 절망하게 했다. 

그 해 월드컵 경기가 있는 날은 거의 모든 아이들이 학교 근처에 있는 축구 경기장으로 결집하곤 했는데 여러 사람이서 목청 높이고 소리지르는 걸 크게 좋아하지 않는 나는 응원하러 가지 않고 혼자 빠져나와 독서실에 앉아 있곤 했다. 그러나 경기가 있는 날은 독서실 문은 열려 있어도 회원들은 물론 독서실 주인 아저씨조차 없기가 일쑤였다.

주인도 없이 혼자 독서실에 앉아있는 것도 '뻘쭘'한 기분이 들어 집에 터덜터덜 들어갈 때쯤이면 엄마까지도 축구 경기에 빠져 딸내미 얼굴도 안 쳐다보시면서 "왜 넌 월드컵 안 본다고 고집이냐, 내 딸이지만 참"하면서 혀를 끌끌 차시곤 했다. 그때 내 입에선 "안팎으로 진퇴양난이다"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래서 2002년 월드컵 시즌에는 특별히 몸 사리고 살던 기억만이 남아 있다. 괜히 "월드컵 난 별로 관심 없는데"라고 했다가는 "온 국민이 다 응원하는데 너만 뭐하느냐"는 소리를 듣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2010 월드컵 1인 선언, "저 경기 안 보고 집에서 쉴래요"

2002년 월드컵 때만큼은 아니지만 2010년도 남아공 월드컵도 열기가 뜨겁다. 많은 국민들이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고 선수들도 잘 뛰고 있다고 들었다. 그 열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것은 나도 기분이 좋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월드컵으로 온국민이 하나 되기'라는 모토 아래에서 조금 발을 떼고 거리를 두고 싶다. 특별히 축구나 월드컵이 싫은 건 아니지만 모두가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 월드컵에 열광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되는 사회 분위기에서 다소 거리를 두고 싶어서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가 그 속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소외감을 주는지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해는 "나 월드컵 경기 원래 안 보는 걸, 그냥 집에서 쉴 거야"라고 기죽지 않고 말해보고자 한다.  2010년도 남아공 월드컵 시즌에는 월드컵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축구경기를 보지 않는 사람들도 '다양성'이 존중되는 분위기 속에서 어울려 지낼 수 있기를, 성숙한 문화 속에서 월드컵이 진정한 축제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태그:#2010 남아공 월드컵,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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