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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6월 20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난민의 날' 10주년이 되는 날이다. 전 세계 난민의 수는 4천만 명, 이중 0.006%에 해당하는 2492명의 난민이 한국에 난민 지위 인정 신청을 했다(2009년 연말 기준). 하지만 난민 협약 및 의정서에 가입한 지 20년이 다 돼 가는 우리 정부가 지금까지 인정한 난민은 175명에 불과하다.

한국에 오는 난민은 주로 아프리카나 아시아 출신으로, 정치적 의견이나 종교 혹은 인종적 갈등을 피해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난민 신청 후 1년이 지날 때까지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없고, 정부나 사회로부터 어떤 생계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난민은 본국으로 돌아갈 수도, 한국에 머물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난민 신청을 하는 대부분이 신청 거부를 당하듯, 데이빗(가명)씨 또한 난민 신청을 거부당했으며 7월 20일까지 출국하라는 통지를 받은 상태다. 하지만 4개월 된 딸 맨디(가명)와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그는 어디로 가야 할까.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유난히 춥던 겨울에 태어난 난민의 딸

5월 17일 저녁, 우간다에서 온 난민 데이빗, 그레이스 부부가 사는 집을 찾아 갔다.
▲ 우간다 출신 난민 데이빗, 그레이스 부부 5월 17일 저녁, 우간다에서 온 난민 데이빗, 그레이스 부부가 사는 집을 찾아 갔다.
ⓒ 이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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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우간다를 떠나던 날이요. 그날 가장 행복했어요."

데이빗(가명, 43)씨의 말이다. 우간다에서 한국에 온 지 1년 6개월 된 그는 난민이다. 생명을 노리는 시퍼렇게 날선 칼을 피해 고국을 떠나온 사람, 난민 말이다.

그러하기에 우간다를 떠나던 날, 가장 행복했다는 그의 말에서 위장이나 거짓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내 나라를 떠난 날은 곧 나의 생명을 지킨 날이 되고 말았으니까.

월드컵 16강 진출을 위해 아르헨티나와의 경기가 있었던 6월 17일 저녁, 6호선 이태원역에서 걸어 20분 걸리는 곳에 있는 데이빗씨가 머물고 있는 집을 찾아 갔다.

밤새 꺼지지 않을 것 같은 시내의 불빛과 달리 그가 머물고 있는 집에는 빛이 들어오지 않았고, 그날따라 형광등이 말을 듣지 않아 간신히 불을 켤 수 있었다. 불 켜진 그의 집에서 발견한 것은 바닥에 깔린 매트리스 한 장과 빈 우유병, 옷가지들, 곳곳에 죽어 있는 바퀴벌레 몇 마리였다.

"원래 안산에 살았었어요. 그런데 아내가 지난 2월에 아기를 낳았어요. 하지만 그 집은 너무 습하고 가스도 끊겨서 도저히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만난 우간다에서 온 친구의 배려로 여기 이 집에서 지낼 수 있게 됐어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벌레도 많고 아기가 살 수 있는 형편은 못 돼요."

유난히 춥고 눈비가 많이 왔던 겨울이었다. 그 겨울에 아이를 낳아 고생한 아내 그레이스(가명)씨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비쳤다. 그의 아내 또한 우간다에서 온 난민이다. 부모 없이 친척집에서 자란 그녀는 강제로 결혼시키려는 친척을 피해 한국에 와서 난민 신청을 한 상태다.

한국 정부가 준 선물, 출국 명령서

어떤 사정이 있었기에, 얼마나 사정이 나빴기에, 이들은 나고 자란 땅을 떠나야 했던 걸까. 왜 이렇게 남루한 공간이 그들의 유일한 안식처가 된 것일까.

"아버지는 무슬림, 어머니는 기독교인이었어요. 두 분이 결혼하기 전부터 집안의 반대는 말할 수 없이 심했습니다. 결혼 후 어머니가 임신한 상태에서 결국 두 분은 이혼을 하셨어요. 저는 태어나서 아버지와 함께 산 적이 한 번도 없고, 열다섯 살 때까지 어머니와만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재혼한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아버지는 저를 강제로 데려갔어요.

그때부터 문제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제 앞으로 땅을 주었는데, 그 땅의 일부를 제가 교회에 주었고 교회 건축을 하게 됐어요. 그러자 무슬림들이 찾아와 건축 중인 건물을 부쉈죠. 그들은 아버지를 찾아가 왜 아들에게 땅을 줘서 교회를 짓게 하느냐고 따졌고, 그 싸움은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문제가 점점 심해지자 무슬림들이 저를 납치하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그는 외딴 곳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이상한 총기, 벽에 묻는 핏자국만으로 이미 두려움에 떨던 그의 발목에 칼이 들어왔다.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일을 겪은 후, 데이빗씨는 스웨덴, 수단 등으로 도망을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상황이 좀 진정되었을까 싶어 집으로 돌아오면 어디선가 사람들이 나타나 괴롭히고 집의 유리창을 모두 깨 버렸다. 그는 다시 도망을 가야만 했고 2008년, 친구의 도움으로 한국 비자를 받아 한국에 왔다. 하지만 한국에 온 손님인 그에게 정부가 준 선물은, 출국 명령서였다.

원래 출국 기한은 5월 19일이었으나, 딸 맨디의 출생으로 2개월 간 출국 기한이 늘어났다. 하지만 데이빗 씨가 출국 전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데이빗 씨가 법무부로부터 받은 출국 명령서 원래 출국 기한은 5월 19일이었으나, 딸 맨디의 출생으로 2개월 간 출국 기한이 늘어났다. 하지만 데이빗 씨가 출국 전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이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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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출입국관리소에 가서 난민 신청을 하자, 그들은 '이건 민사에 해당하는 사안이니까 우간다 정부가 보호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간다는 나를 보호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 정부는 국민 보호에 실패했고 나는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건 인터넷만 찾아 봐도 알 수 있지 않나요?"

196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우간다는 20년 넘게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었으며 지금까지 한 번도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한 적이 없다. 무세베네(Museveni) 대통령은 1986년에 정권을 잡은 뒤, 독재 체제를 만들어 1996년 처음 대통령에 당선했고, 무리하게 헌법 개정까지 해 지금까지 3선 대통령을 지내고 있다. 25년째 장기 집권하고 있는 것이다.

빗장이 쳐진 데이빗 부부의 하루하루

출국 명령을 받은 데이빗씨에게 가장 힘든 건 무엇일까.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외국인 등록증 자체가 없어서 합법적으로 일을 못 하는 상황입니다.안산에 있을 때는 최종 불허 판정이 나오기 전이라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어요. 간신히 하루하루 살고 있습니다."

(난민 신청이 최종적으로 거부되면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는 외국인 등록증을 회수하고 출국 명령서를 발부한다. 난민 신청자는 행정 소송을 제기할 수 있지만 취업 등을 할 수는 없다.)

4개월 된 딸 맨디를 애처롭고 미안한 듯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보는 이의 눈이 벌게진다. 맨디는 난민인권센터(대표 이재복·홍세화)의 도움으로 분유를 지원받고 있다. 하지만 데이빗 부부의 오늘 저녁은 누가 챙겨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복음과상황(www.goscon.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난민, #난민의 날, #법무부, #출국명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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