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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침전으로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 통명전 왕비의 침전으로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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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가 짙게 내린 궁궐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통명전에 다향(茶香)이 그윽하다. 주군이 총애하는 여인과 마주하고 있는 시간, 한없이 황송했고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바늘방석 같아 빨리 일어나고 싶은 생각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고 싶은 욕망이 교차했다.

"그래, 저자의 공기는 어떠합디까?"

"성난 암캐가 후원에 틀어박혀 인심이 흉흉하여 장사도 안 되었는데 이제는 잘 될 것이라 대환영입니다."

"암, 그래야지요."
소의 조씨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앓던 이가 빠짐으로서 만백성들이 좋아한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조정에서는 더 이상 말이 없습니까?"

"양주에 내려가 있는 청음이 좀 거슬리기는 하지만 대체적인 정지작업이 끝났습니다."

"대감의 노고가 크구려."

"망극하옵니다."

젊은 유생들이 따르는 김상헌에게 감투를 안겨주어라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서 돌아온 김상헌은 인조의 관직 제수를 사양하고 덕소에 내려가 있었다. 허나, 그를 따르는 젊은 선비들이 인조에겐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대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 알고 있지요?"
소의 조씨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예."
"이번에 대감이 올라가면 그 자리를 청음에게 돌아가도록 하세요."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영의정 김류의 사직으로 영상 자리가 비어있다. 그 자리로 밀어 올려줄테니 좌상자리는 김상헌이 사양하지 않도록 청음을 설득하라는 것이다. 어명보다도 지엄한 후궁전의 명이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후원에서 불어오는 바깥바람을 쐬고 싶소."

후원 별당에 세자빈이 유폐되어 있을 때에는 그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던 소의 조씨다. 헌데, 이제는 그곳에서 불어오는 내음을 맡고 싶단다. 행동대장으로 열심히 일했던 김자점과 그 기쁨을 공유하고 싶다는 것이다.

통명전 연못에 걸쳐있는 돌다리
▲ 석교 통명전 연못에 걸쳐있는 돌다리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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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조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자점도 뒤따라 일어났다. 조씨가 통명전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휘영청 둥근 달이 걸려있었다. 연못에 놓인 석교를 건너던 소의 조씨가 걸음을 멈추었다. 초롱불을 밝히고 앞장섰던 나인은 다리를 건너가고 다리 위에는 소의 조씨와 김자점 단 둘이 서있었다.

"대감! 궁녀들이 이곳에서 동전 점을 치는 것을 보았소,"
"그러셨습니까?"

"연못에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면 행운이 따르고 뒷면이 나오면 그렇지 않다나 뭐라나. 호호호. 대감도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동전을 준비한 것이 없어서..."

김자점이 말끝을 흐렸다. 글씨가 새겨진 앞면이 나온다면 본전이고 글씨가 없는 뒷면이 나온다면 공연히 구설수에 오를까봐 꽁무니를 뺐다.

"그러실까봐 동전을 준비해왔습니다."
소의 조씨가 동전을 내밀었다. 기으라면 기어야 하는 갑과 을 사이인데 아니 던질 수가 없었다. 조씨로부터 동전을 받아든 김자점이 연못을 향하여 동전을 던졌다.

"축하합니다."
"망극하옵니다."

김자점이 던진 동전에 상평통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행운이 온다는 뜻이다. 소의 조씨가 호들갑스럽게 축하했으나 김자점은 민망스러웠다.

인조11년에 주조되었으나 유통에 실패하여 아이들의 놀잇감으로 사용했다.
▲ 상평통보 인조11년에 주조되었으나 유통에 실패하여 아이들의 놀잇감으로 사용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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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1년 상평청을 설치하고 주조한 상평통보는 유통에 실패하여, 구리와 주석을 중국에서 들여온 조정에 막대한 재정적인 부담을 안겨 주었다. 유통 그 자체가 중단되어 화폐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상평통보는 아이들이 재기를 만들어 차는가 하면 동전치기 놀이를 했다.
"김대감 손자가 준수하다 들었소."
"황공하옵니다."
뜻밖의 질문에 김자점이 어쩔 줄을 몰랐다.

"올해 몇이오?"
"열 살이옵니다."

"그래요? 이제 장가를 들여야겠군요?"
"아직 철부지이옵니다."

"호호호"
소의 조씨의 웃음소리가 구중궁궐 깊은 곳에 길게 여울져 갔다.

융숭한 대접을 받고 후궁전을 나선 김자점은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이제 영상 자리는 떼 논 당상이다. 내가 더 바랄 것이 뭐가 있겠는가? 있다면 왕실과의 혼인인데 임금의 딸을 손주 며느리로 맞아들인다면 개인의 광영이자 가문의 영광이다. 지금 죽어 저승에서 조상을 뵈어도 여한이 없다."

김자점에게는 김식이라는 아들이 있다. 그의 아들이 김세룡이다. 그러니까 김자점의 손자다. 그 손자에게 소의 조씨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에게는 효명옹주가 있다. 임금의 고명딸이다.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고 궁궐에 돌아온 인조 임금의 시름을 풀어주던 딸이다. 임금의 서녀이긴 하지만 실세의 맏딸이다. 어떻게 표정관리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태그:#통명전, #상평통보, #김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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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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