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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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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①] 나환자(가명·28)씨는 발목을 다쳐 종합병원을 찾았다. 진료를 받기 위해 2시간을 기다렸지만 진료시간은 단 3분. 사무적인 진료에 화가 난 나씨는 충동적으로 의사의 멱살을 잡았다. 현장에서 보안요원에게 제지당한 나씨는 사과를 하고 합의를 보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반의사불벌죄(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처벌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닌 개정 의료법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사례②] 김억울(가명·38)씨의 어머니는 요실금 수술을 받았다. 간단한 수술이라고 생각했지만 3번의 재수술이 이어졌다. 의료사고가 아닐까 의심스러웠지만 호소할 곳은 없었다. 담당의사는 면담을 피하며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을 뿐이었다. 불만이 쌓인 김씨는 회진중인 의사와 말다툼 끝에 주먹다짐을 했다. 고소를 당한 김씨는 가중처벌을 받았다. 일반 폭행죄가 아닌 의료인 폭행 법이 적용된 까닭이다.

새로운 의료법 개정안이 통과됐을 때 벌어 질 수 있는 상황이다.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 상정을 앞두고 있는 '의료인 및 의료기관 종사자 폭행·협박 가중처벌 법안'에 대해 환자단체와 보건의료시민단체가 제동을 걸고 나선 이유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8일 오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의료인 단순 폭행·협박을 가중처벌하는 의료법 개정안'의 철회를 촉구했다.

전현희 민주당 의원과 임두성 한나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이번 의료법 개정안은 지난 4월 26일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했다. 법안이 6월 중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최종 통과될 경우 의료인이나 의료기관 종사자를 폭행·협박 하면 5년 이하의 징역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는다.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던 현행법에 비해 대폭 강화된 내용이다. 또한 개정안은 기존 형법과는 달리 반의사불벌죄가 적용되지 않아 피해자 의사와 관계 없는 처벌이 가능하다.

의사-환자 수직적관계 고착시키는 응보적 성격의 법

한국환자단체연합회가 지난 8일 오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의료인 단순 폭행·협박을 가중처벌하는 의료법 개정안'의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가 지난 8일 오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의료인 단순 폭행·협박을 가중처벌하는 의료법 개정안'의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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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단체연합회는 이번 개정안은 의사 특권의식을 조장할 뿐 아니라 의사와 환자 사이에 수직적 관계를 고착시키는 응보적 성격의 법이라고 주장했다.

최성철 암시민연대 사무국장은 "의사에 대한 폭행은 짧은 진료시간과 불친절한 태도 같은 의료시스템과 커뮤니케이션 방식에서 발생하는 문제다"라며 "환자가 원인을 제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주장했다.

최 사무국장은 "의료현장의 폭력과 협박은 근절돼야 한다, 하지만 원인분석과 예방노력 없이 결과에 대해서만 가중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미 현행법으로도 처벌이 가능한 상황에서 의사책임과 의료 시스템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환자의 책임만 늘리는 입법이라는 것이다.

법률적인 문제도 제기됐다.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정정훈 변호사는 "의료 기관에서의 폭행·협박은 이미 폭력행위 처벌 법률이나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로도 가중처벌이 가능하다"며 "일반적인 의료상황에까지 적용범위를 확대하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개정안은 우발적 행동이라도 결과적으로 진료방해를 받았다면 가중 처벌이 가능하도록 업무방해 구성요건을 확대하고 있다.

반의사불벌죄가 적용되지 않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정 변호사는 "이번 법안은 폭행과 협박이라는 우발적 사고에 대해서 당사자 간에 자체적 해결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다"며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처벌함으로써 대화를 통한 해결보다는 대결구도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폭행·협박사고 본질 해결, 법 처벌 규정 강화 아니다"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의원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소속 최영희 민주당 의원은 과도한 입법이라며 개정안 공동발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최 의원실 김현진 비서관은 "장소나 상황 등에 제한이 없는 건 문제가 있다, 일반의료 상황이 아닌 응급실, 수술실 등 특수한 상황으로 적용범위를 제한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으로 활동 중인 곽정숙 민주노동당 의원실 한 관계자는 "법안 내용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대로 통과돼서는 안 되는 법이다"라며 "의료 분쟁과 관련해 악용될 소지도 있기 때문에 전체 회의에서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전현희 의원실 김영삼 수석보좌관은 "이번 법안은 의사에게 특혜를 주기 위한 법안이 아니다, 폭행·협박 사고로 침해되는 국민의 진료권을 보장하고 안정적 진료환경 만들기 위해 도입했다"고 해명했다.

의사 출신인 전 의원이 의사들 의견만 반영해 법안을 발의했다는 환자단체의 비판에 대해서는 "법안소위 통과까지는 환자단체나 시민단체의 의견 수렴과정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라며 "하지만 전체회의 전에는 공청회나 간담회를 열어 충분히 의견을 수렴하고 법안을 합리적으로 수정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논란이 되고 있는 반의사불벌죄 적용 부분은 법률적인 검토가 부족했다며 보완하겠다고 말했다.

폭행·협박 근절을 위해서는 근본적 대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강태언 의료소비자시민연대 총장은 "법으로 처벌 규정을 강화한다고 폭행·협박사고가 본질적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며 "의료사고가 의사 폭행이나 협박의 주요 원인이라고 가정했을 때 환자나 환자 가족이 신속히 피해구제를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게 먼저다"고 말했다. 강 총장은 "과거에는 교통사고를 둘러싸고 분쟁이 많았지만 피해자 구제법률이 보완되면서 지금은 많이 나아진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정정훈 변호사가 개정 의료법의 법률적 문제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정정훈 변호사가 개정 의료법의 법률적 문제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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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법 개정안 비교
* 현행 의료법
o 제12조 제2항
누구든지 의료기관의 의료용 시설·기재·약품, 그 밖의 기물 등을 파괴·손상하거나 의료기관을 점거하여 진료를 방해하여서는 아니 되며, 이를 교사하거나 방조하여서는 아니 된다.

o 제87조 제1항
제12조 제2항에 해당하는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 의료법 개정안
o 제12조 제2항
정당한 사유 없이 의료인이나 의료기관 종사자를 폭행 또는 협박하여 진료를 방해하여서는 아니되며, 이를 교사하거나 방조하여서는 아니된다.

o 제12조 제3항
누구든지 의료기관의 의료용 시설·기재·약품, 그 밖의 기물 등을 파괴·손상하거나 의료기관을 점거하여 진료를 방해하여서는 아니 되며, 이를 교사하거나 방조하여서는 아니 된다.

o 제87조 제1항
제12조 제2항·제3항에 해당하는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태그:#의사폭행, #의료법, #진료권, #반의사불벌죄, #한국백혈병환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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