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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다 보면 힘들어서 눈썹까지 깎아 버리고 싶을 정도예요."

10㎞ 마라톤 이야기를 하다가 성미가 말했다. 몸이 무거워져서 가볍게 하고 싶어진다는 이야기다. 등산을 갈 때 배낭이 무거울까봐 숟가락도 반으로 자르고 칫솔까지 반으로 잘라 무게를 줄이는 건 실제 있는 일이지만 마라톤을 할 때 그 정도로 힘들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그것도 42.195㎞도 아니고 하프도 아니고 10㎞를 뛰는 마라톤에서 말이다.

내 나이 쉰 셋, 마라톤 한번 뛰어볼까

사진은 대구 마라톤 대회 중 한 장면.
 사진은 대구 마라톤 대회 중 한 장면.
ⓒ 유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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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일하는 성미는 이제 서른 살 먹은 예쁜 아가씨다. 작은책 편집부에서 일하는 규화보다는 한 살이 많은데 둘이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규화가 심한 농담을 해도, 목을 치는 장난을 쳐도 화 한 번 내지 않는 아가씨다. 단단하고 탄력이 있어 보이는 성미는 학교 다닐 때 육상을 했단다.

"나도 이번에 한번 뛰어볼까?"
"같이 한번 뛰어봐요."

성미가 부추겼다.

"뛰면 성미가 무조건 일등이에요. 얘 잘 뛰어요."

옆에 있던 규화가 부채질한다. 규화는 마라톤을 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안 선생님은 아마 내가 흘리는 땀을 뒤에서 비처럼 맞고 올 거예요."

규화가 덧붙이는 말에 벌컥 오기가 생겼다. 뭐, 내가 니 땀방울을 맞으면서 뒤따라 갈 거라고? 아니 내가 축구를 하고 등산을 다니는데 이제 겨우 마라톤 세 번 뛴 규화를 못 이길까. 내가 뛴다고 하니까 작은책에서 일하는 지은이도 뛴단다. 그래서 규화, 성미, 지은이까지 넷이서 뛰기로 했다. 나중에 나라말출판사에서 일하는 종필이와 그의 친구 수정이도 같이 가기로 했다.

마라톤 신청을 하니까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내가 그래도 달리기 하나는 알아줬는데 설마 규화 정도 못 이기겠나. 아냐 못 이길지도 몰라. 벌써 내 나이 쉰셋 아닌가. 이제 스물아홉 살 된 규화를 이길 수가 있겠나. 게다가 규화는 한참 마라톤에 재미를 붙여 열심히 다니는 사람 아닌가. 게다가 나는 술 담배를 너무 많이 한다. 10㎞ 완주나 할 수 있을까.

죽어도 네 땀방울은 안 맞겠다, 각오했지만...

드디어 5월 30일 일요일! 잠원시민공원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오전 8시 45분에 시작인데 8시 20분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많이 와 있다. 규화가 보였다. 성미는? 안 온대요. 에이 실망. 얼마나 잘 뛰는지 보려고 했는데.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짐을 봉투에 담아서 주최 측에 맡기려 하는데 지은이한테 전화가 왔다.

"안 선생님, 저 이제 거의 다 왔는데요, 제 짐까지 같이 넣어 주세요."
"어딘데?"
"이제 압구정역이요."
"빨리 와야 되는데. 벌써 시작하려고 해."
"네, 뛰어가고 있어요."

지은이는 신청은 안 하고 그냥 뛴다고 했다. 그러면 주최를 맡은 곳에서 짐을 맡겨 둘 수가 없다. 한 10분이라도 준비운동을 해야 하는데 짐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8시 35분에 지은이가 왔다. 빨리 나가자. 잽싸게 내 짐에다 지은이 옷과 가방을 넣고 운동장 출발선으로 갔다. 가면서 발목 돌리고 어깨 돌려보고 다리도 펴 보았다. 에구 시작부터 안 좋다.

8시 40분에 사람들이 뛰기 시작한다. 10㎞ 뛰는 사람들은 45분에 뛴다고 했으니 준비운동 좀 하자. 어 근데 다 뛴다. 뭐야? "같이 뛰는 거래요." "뛰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봐요." "뭐야, 이거. 개판이네." 맨 뒤에 있다가 헐레벌떡 쫓아나갔다.

나가는 길목이 좁다. 남대문시장 같다. 앞서가는 사람에다 오가는 자전거들까지 걸리적거린다. 앞에서 나란히 달리는 종필이와 수정이를 따라 붙었다. 놓치면 못 따라 갈 것 같다. 천천히 뛰는 사람들을 피해 요리 조리 빠져 나갔다. 사람들을 피하면서 뛰니 더 힘들다. 5분도 되지 않아 숨이 찬다. 숨을 크게 몰아 쉬어 본다.

앞에는 종필이와 수정씨가 나란히 뛰고 규화와 지은이가 뒤 따라온다. 종필이는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라 몸이 가벼워 보인다. 20분쯤 뛰었나? 벌써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뭐야. 아, 5㎞ 뛰는 사람들이구나. 얼마쯤 뛰었을까. 5㎞ 반환점이 보인다. 뭐야, 이제 반이구나. 아니 여기서 돌아가야 5㎞니까 겨우 2.5㎞ 왔네. 저 앞에 풍선을 허리에 맨 사람이 보인다. 그 사람은 페이스메이커라고 한다. 10킬로 뛰는데 얼마가 걸리는지 풍선에 써 있나 보다. 잘 보이지 않는다.

같이 가던 종필이가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나도 조금 속도를 내서 풍선 든 사람을 추월했다. 수정이가 뒤떨어지기 시작한다. 종필이는 벌써 200미터 쯤 앞서간다. 뒤를 돌아보니 지은이와 규화는 안 보인다. 규화는 나중에 따라 붙을 거라고 자신했다. 처음에는 우리 먼저 보내고 나중에 자기가 추월하겠다고 장담했다.

음, 내가 자기 땀방울을 비처럼 맞으면서 올 거라고? 죽어도 니 땀방울은 안 맞겠다. 속도를 더 냈다. 종필이는 따라갈 수 있겠는데 나중에 쓰러질지도 모르니 이 속도로 뛰어보자. 저 앞에 책상이 있다. 종이컵에 물을 담아 놓았는지 뛰면서 먹는 사람, 서서 먹는 사람들이 보인다. 쉬면 안 될 거 같아 뛰면서 잽싸게 컵을 잡았다. 달리면서 꿀꺽! 꿀꺽! 두 모금 먹고 컵을 버렸다.

뒤 어깨가 파진 옷을 입은 여자, 따라가고 싶었지만

휴, 지겹다. 10㎞가 이렇게 멀어? 10㎞ 반환점이 어디야? 저긴가? 88올림픽 도로 위로 잠실구장 위 꼭대기가 보인다. 그 앞 도로를 보니 뛰는 사람이 없다. 저기구나. 조금 힘이 생긴다. 마라톤은 체력도 중요하지만 마음가짐이 더 중요한 것 같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하면 힘이 생길 수도 있고, 아직 멀었어? 생각하면 스스로 힘이 빠질 수가 있겠구나. 다리는 괜찮은데 숨이 차다. 약간 꺾어진 길에서 종필이가 돌아오는 게 보인다.

손을 흔들면서 꺾어진 길을 도니 반환점이다. 아, 이제 반이구나. 끝까지 뛸 수 있겠다. 반환점을 돌면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물 한 컵을 먹었다. 그래도 목이 마르다. 반대편을 봤다. 얼마나 뛰었을까. 지은이가 보인다. 아, 대단하다. 압구정역에서 급하게 뛰어오자마자 또 금방 뛴 건데 잘 따라오네. 규화는 어디 있지? 몇 미터 뒤에서 그 뒤를 따라온다. 규화가 나를 보고 "화이팅!"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흐흐 규화야, 니 땀방울을 맞기는 맞는데 뒤가 아니고 반대편에서 맞는구나. 힘은 드는데 왜 그런 생각이 나면서 웃길까. 아니야, 아직 지친 모습이 안 보이는데 나를 따라올지도 몰라. 나중에 추월한다고 했으니 아직 마음 놓을 때가 아니야. 이제 속도를 더 내 볼까. 힘은 남아 있다. 아냐, 그러다 혹시 끝에 가서 쓰러질지도 몰라. 그래 한 2㎞미터 남겨 놓고 속도를 내 보자.

코와 입으로 있는 대로 벌려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쉰다. 휴우! 한숨을 내뱉어 본다. 포기하고 싶다. 걷다가 뛰면 안 되나? 아냐. 그건 진정한 완주가 아니야. 첫째 목표는 규화를 이기는 거였고, 둘째 목표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뛰는 게 내 목표였다. 한 번이라도 걸으면 완주했다고 할 수 없어. 젊은 학생이 내 곁을 쌩 하고 스쳐간다. 뭐야 되게 빠르네.

저 앞에 뛰는 사람은 나랑 속도가 비슷하다. 저 사람만 추월해 보자. 조금씩 조금씩 다가간다. 넘었다. 어라, 앞에 쌩하고 뛰어가던 젊은 학생은 다시 걷고 있네. 무리했구나. 다시 그 젊은이를 추월했다. 다시 어떤 여자가 나를 추월한다. 뒤 어깨가 파진 옷을 입었다. 구리빛 살결이다. 멋지다. 저 여자를 따라가는 걸 목표로 해야겠다. 근데 점점 멀어진다. 야, 잘 뛴다.

못 따라가겠다. 아까 올 때 봤던 5㎞ 반환점이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과 뛰어야 한다는 생각이 수없이 떠올랐다. 이래서 마라톤은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거였구나. 등산할 때 드는 생각과 같으면서도 차이점이 있었다. 등산은 정상을 갔다가 아무리 힘들어도 내려가려면 걸어야 한다. 집에 가기 위해서, 아니 살기 위해서는 아무리 지쳐도 포기할 수가 없는데 이 마라톤은 뛰다가 포기해도 집에 갈 수 있다는 게 달랐다. 중도에 포기하고 차를 타면 더 빨리 집에 갈 수도 있다는 게 산행과 달랐다.

한번도 쉬지 않고 완주했다, 방귀 뿡뿡 뀌며

스스로 목표를 만들면서 뛰었다. 저 앞에 가는 사람만 따라가자. 그 사람이 빨리 가면 또 다른 사람을 목표로 삼는다. 그 목표가 없어지면 또 다른 목표를 잡는다. 저 여자만 추월하자. 아니 저 뚱뚱한 사람이 어떻게 나보다 빠를 수가 있지? 너는 내가 이길 수 있다. 끊임없이 목표를 만들면서 뛰었다. 이제 2㎞ 정도 남았을까? 속도를 더 내 볼까? 왜 끝이 안 보이지? 앗! 벌써 저기야? 드디어 골인점이 보인다. 시간을 보니 33분. 분명히 한 시간은 안 넘기겠구나. 골인 지점이 가까워 오니 걷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더 빨리 뛰었다. 아쉽다. 아직 힘이 남아 있는데 거리가 얼마 되는지 몰라서 힘을 너무 아꼈다는 생각이 든다. 종필이를 따라갔더라도 괜찮았을 것 같았다. 드디어 골인! 풍선으로 둥글게 만들어 놓은 아치에서 삐! 소리가 난다. 가슴에 칩이 달려 있어 자동으로 기록이 입력된단다. 숨을 크게 몰아쉬면서 천천히 걸었다. 무슨 대단한 걸 해낸 듯 뿌듯하다. 이런 성취감 때문에 마라톤을 하나 보다.

나중에 나온 기록을 보니 53분 2초. 기록보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완주를 한 게 뿌듯하다. 그보다 더 기분이 좋은 건? 규화가 흘리는 땀방울을 뒤에서 안 맞은 거다. 아니 맞기는 맞았지. 뒤따라 가면서가 아니고 맞은편에서 맞았지. 푸하하하! 한 시간 넘어 들어온 규화한테 그 말을 하면서 약 올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중에 규화가 큰소리 칠 때 써먹어야지. 일행 중에 가장 먼저 들어온 종필이는 50분 17초였다.

종필이가 사온 캔 맥주를 한잔하는데 온몸이 짜릿하다. 흠, 다음 목표는 종필이다. 규화야, 다음 번에도 내가 흘리는 땀방울 좀 맞아 봐라. 그런데 나는 그렇게 뛰어도 땀을 안 흘리니 어쩌냐. 대신에 방귀를 잘 뀌니,뒤에서 방귀 냄새나 맡아라. 사실 오늘도 두 번이나 뀌었는데 내 어찌 그 사실을 말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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