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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들의 저승사자, 독사 눈을 가진 내관

내관의 시선이 피부를 훑고 지나가자 소름이 돋았다. 먹잇감을 찾는 뱀은 혀로 냄새를 맡는다. 궁녀를 다루는데 이골이 난 내관은 눈으로 냄새를 맡는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용서 없다. 형란이 지친 심신을 추스렸다.

"모릅니다."
"정말 모르느냐?"
"네, 정말 모릅니다."

산발한 머릿결 사이에서 형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봐라, 이년을 주리를 틀어라."

수염도 없는 내관이 턱을 쓰다듬으며 명했다. 발목을 묶은 형란의 정강이에 박달나무로 만든 두 개의 막대기가 끼워졌다. 공포에 질린 형란의 무릎이 경련을 일으켰다.

"정강이뼈가 으스러져도 말하지 않겠느냐?"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할 뿐, 어찌 안다 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각오한 형란은 담담했다.

"시행하라."

명과 함께 '악'하는 여인의 비명소리가 내사옥을 흔들었다. 그것은 생과사의 갈림길에서 절규하는 여인의 외마디 소리였다. 내사옥 형리들의 의욕이 넘쳤을까? 여인의 뼈가 부실했을까? 형란의 정강이뼈가 부스러짐과 동시에 형란이 정신줄을 놓았다. 혼절한 것이다. 그리고 깨어나지 못했다. 동궁전 궁녀 형란이 죽은 것이다.

여승이라고 봐줄 수 없다, 승복을 벗기고 형틀에 묶어라

형란의 입에서 거명된 도총부 군관과 성곽 경비를 맡은 훈련도감 별장이 내사옥에 투옥 되었다. 드디어 보개산 비구니 혜영이 압송돼 왔다. 승려라고 봐주는 게 없다. 똑같이 형틀에 묶고 심문이 시작되었다.

"강씨가 무엇을 내주더냐?"
"보자기에 싼 상자를 받았습니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더냐?"
"도성을 빠져 나갈 때까지 펼쳐보지 않아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몰랐으나 양주에 이르러 보자기를 펼쳐보니 아기 시체가 들어 있었습니다."
"시체라고? 살아있는 아기가 아니라 시체란 말이냐?"

내관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가며 언성이 높아졌다.

"네, 그렇습니다."
"허튼 수작하지 마라. 아기를 어떻게 했느냐?"
"정말입니다요. 마부도 보았습니다."
"마부가 그 자리에 있었느냐?"
"네."
"마부를 잡아들여라."

내관의 명에 따라 종사관이 튀어나갔다.

"마부를 잡아오면 네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밝혀질 것이다. 만약 거짓이라면 네년이 여기에서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알겠느냐?"
"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거짓이라면 이실직고 하라."
"참입니다요."
"좋다. 네 말이 참이라 치자. 상자 속에 아기 시체 말고 또 무엇이 들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정말이냐?"
"네."
"네년이 금덩이를 받아와 자랑했다고 하던데 이래도 바른 대로 말하지 않을테냐?"

내관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이봐라, 중년들을 끌어내라."

굴비 엮이듯 끌려나오는 여승들, 보기 드문 진풍경이 벌어지는 궁궐

옥에 갇혀있던 비구니들이 끌려나왔다. 삭발한 여승들이 목에 칼을 차고 줄줄이 끌려나오는 모습은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형리와 옥졸들도 진기한 풍경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혜영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의 암자에 있던 비구니들이었다.

"이년이 금덩이를 가져와 자랑하는 것을 보았느냐?"
"네."

연화의 목소리는 모기소리처럼 작았다. 혜영과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여승은 혜영이 가장 아꼈던 수제자였다. 내사옥 종사관이 보개산에 들이닥쳤을 때, 암자에는 아홉 명의 비구니가 있었다. 혜영을 묶어 한양으로 출발시킨 종사관은 여승들을 상대로 탐문했다. 그 결과 대궐을 다녀온 혜영이가 금덩이를 보이며 자랑했다는 말을 들은 종사관은 거동이 불편한 노 비구니 한 명을 제외한 전원을 붙잡아 왔던 것이다.

"이런 앙큼한 년이 있나? 네년이 금덩이를 가져와 자랑했다는 것을 보았다 하지 않느냐. 몇 냥이나 받아 왔느냐?"
"불사에 쓸 것이라 해서 200냥을 받아 왔습니다."

혜영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절집 뒤깐 간판. 이미지는 특정사실과 관계없는 자료 사진입니다
▲ 뒤깐 절집 뒤깐 간판. 이미지는 특정사실과 관계없는 자료 사진입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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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덩이가 어디에 있느냐?"
"암자에 있습니다."
"감추어 둔 곳을 말하라."
"뒷간 앞에 땅을 파고 묻어 두었습니다."

매일같이 용변 길에 소재확인을 하기 위하여 해우소 앞에 묻어 두었던 것이다.

"마부를 잡으러 간 종사관에게 암자에 가서 금덩이도 찾아오라 일러라."

전령이 살같이 튀어나갔다.

"금덩이 외에 또 무엇을 받아 왔느냐?"
"비단을 받아 왔습니다."
"비단이 어디에 있느냐?"
"식량으로 바꾸었습니다."
"고얀 것들 같으니라구."

내관이 입맛을 다셨다. 물증을 확보하라는 소의 조씨의 엄명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입수한 물증은 하나도 없다. 내관의 입술이 타들어 갔다.

"아기를 어디에 감추었느냐?"
"아기라니요? 죽은 시체였을 뿐입니다요."
"이봐라. 이년을 매우 쳐라."

곤장을 맞던 혜영이 축 늘어졌다. 물을 끼얹고 다시 심문했으나 정신을 놓았다. 의식을 회복하면 심문이 계속되었으나 혼절을 반복했다. 피비린내 나는 옥사가 이어지자 조정이 술렁거렸다.


태그:#인조, #소현세자, #강빈, #김자점, #구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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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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