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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을 지키는 군사
▲ 숙위군 궁궐을 지키는 군사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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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세자빈이 깨어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네가 성 밖에 다녀와야겠구나."

마른 침을 삼키던 세자빈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이렇게 위중한 마마님을 홀로 두고 소인이 어디를 다녀온단 말씀이십니까?"

세자빈이 유폐되어 있는 후원 별당에는 시종이 두 명도 아니고 딱 한명 딸려 있다. 형란이 떠나면 별당에 남겨진 사람은 세자빈 혼자다. 그렇지 않아도 인적이 드문 구중궁궐 깊은 곳. 후원 별당에 세자빈 홀로 고립무원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내 한 몸보다도 더 중차대한 문제다."
세자빈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소인은 떠나지 못하겠습니다. 마마!"

형란이 울부짖었다. 난산의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세자빈은 의식과 무의식 경계선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 심하면 혼절하여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시종마저 없다면 생명을 담보할 수 없다.

"명을 거역하려 드느냐?"
"마마님의 명을 거역하여 죄를 받더라도 소인은 떠나지 못하겠습니다."
"네 심정 이해한다. 하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세자빈의 입술이 파리하게 떨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세자빈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고집부리지 말고 철원으로 떠날 준비를 하라."
"어디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보개산이다."
"네에?"

형란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입을 손으로 가렸다. 한양에서 철원. 평소 같으면 장정 이틀거리다. 하지만 지금 현재는 비상상황이다.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아니, 궁궐이나 빠져 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병조판서가 임금의 부름을 받아 궁궐에서 상근하고 군사들이 쫙 깔렸다. 그 뿐만이 아니다. 도성에는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다.

창덕궁 정문이다
▲ 돈화문 창덕궁 정문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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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에는 남쪽 정문으로 돈화문이 있고 동쪽 정문 홍화문이 있다. 그밖에 선인문과 금호문 등 작은 문이 있지만 이 엄중한 시기에 별당 시종이 나가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설혹 대궐을 빠져 나갔다 해도 성문을 통과해야 한다. 도성에는 숭례문을 비롯한 4대문과 서소문 등 4소문이 있다. 하지만 죄인의 시종이 통과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부엉이가 되어 하늘을 날아갈 수도 없다.

"혜영 스님을 찾아가라."

혜영이라면 동궁전에 드나들던 비구니다. 형란이도 몇 번 보았던 얼굴이다. 그 스님이 있는 철원까지는 지금 너무나 험난한 길이다. 후원 별당에서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선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는 궁궐을 빠져 나가야 하고 도성 문을 통과해야 한다.

"냉큼 떠날 채비를 하라."
멈칫거리는 형란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네에~"
말끝을 흐린 형란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궁궐을 빠져나가다 군사들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혀를 깨물어 자결할 용의가 있다. 허나, 후원 별당 시종이 궐을 빠져 나가다 잡혀 자결했다면 세자빈의 안위도 위태롭다. 성문 역시 그렇다.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아득하기만 했다. 

"꼭 모시고 돌아와야 하느니라."
갈수록 태산이다. 홀몸으로 빠져 나가기도 힘들 터인데 스님을 데리고 들어오라 하니 난감했다.

"예전에는 광범문을 이용했으나 지금은 어림없습니다."
광범문은 창경궁 북문이다. 형란이 몰래 궐을 드나들 때 이용했던 문이지만 지금은 경계가 삼엄했다.

창덕궁 깊은 곳 임금과 신하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며 '유상곡수연'을 펼쳤던 소요암에 새겨진 옥류천 글씨. 인조의 어필이다.
▲ 옥류천 창덕궁 깊은 곳 임금과 신하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며 '유상곡수연'을 펼쳤던 소요암에 새겨진 옥류천 글씨. 인조의 어필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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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천을 따라 오르면 창덕궁 북문이 있다. 그곳을 빠져나가 매봉을 지나면 성곽이다. 숙정문에는 군사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을 것이니 그곳으로 가지 말고 더 위로 올라 암문을 통과하여 도성을 빠져 나가도록 하라."
말을 마친 세자빈이 은붙이 몇 개를 내놓았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어서 떠나라."

희미한 의식 속에서 혼절을 반복하는 세자빈을 홀로 두고 별당을 떠나려 하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떠나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난 형란이 예를 올리고 별당을 나섰다. 형란이 떠난 것을 확인한 세자빈이 붓을 잡았다.

복원용왕수신 애린제도(伏願龍王水神 哀憐濟度)
엎드려 비옵나이다. 바다의 신 용왕님이시어, 슬픔을 불쌍히 여겨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다 써내려간 세자빈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눈물이 빗물 되어 흘러내렸다. 왕(王)자에 떨어진 눈물이 번져 옥(玉)자가 되었다.

"저하! 소첩이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소서."

주체할 수 없는 설움이 폭포가 되어 흘러내렸다. 배 아파 낳은 자식. 거두지 못하고 강물에 띄워 보내야 하는 어미의 심정.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한양성곽 암문이다
▲ 청풍암문 한양성곽 암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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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궁궐을 빠져나간 형란은 청풍암문을 통과하여 잰 걸음을 놓았다. 양주를 거쳐 보개산에 도착한 그녀는 혜영을 데리고 돌아왔다. 완벽한 임무 수행이다.

"불러 계시옵니까? 마마!"
혜영이 두 손을 모으고 예를 갖췄다.

"내 긴히 부탁할 일이 있어 불렀다."
"부탁이라니 당치않은 말씀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나가 강물에 띄워다오."
세자빈이 하얀 보자기에 싼 상자를 내놓았다.

"여부 있겠습니까? 분부 거행하겠습니다."
"지체 할 시간이 없다."
세자빈이 금붙이를 내놓았다.

"마마! 강녕하시옵소서."
혜영이 엎드려 예를 올렸다.

"어서 떠나도록 하라."
"예. 마마!"
보따리를 가지고 별당을 나선 혜영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눈이 있었다. 후궁전에서 심어 둔 세작의 눈이었다.


태그:#세자빈, #소현세자, #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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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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