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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광장과 분수의 도시이다.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거치게 되고, 목적하지 않아도 이르게 되는 곳이 광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반질거리는 돌길을 걷다 보면 저절로 나타나는 공간이 광장이고, 그 중심에 꽃봉오리처럼 솟아 공간을 짜임새 있게 분할하는 건 분수의 역할이었다.

참 '가까운' 광장이다, 애써서 찾아 가야 하는, 늘 폐쇄되어 있어서 '멀고 먼', 섬처럼 외따로 떨어진 공간이 아니라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 사이로 난 돌길의 끝에서 꽃처럼 광장이 피어난다. 복잡한 도시에서 여백처럼 펼쳐진다.

친근한 스페인 광장

로마에 홍수가 지나간 후, 바로 이곳에 조그만 조각배가 하나 남아 있었는데, 피에트로 베르니니는 이 조각배에서 영감을 얻어 분수를 만들었다고 한다.
▲ 스페인 광장 로마에 홍수가 지나간 후, 바로 이곳에 조그만 조각배가 하나 남아 있었는데, 피에트로 베르니니는 이 조각배에서 영감을 얻어 분수를 만들었다고 한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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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스페인 광장'은 가장 친근한 광장이 아닐까 싶다. 아이스크림 생각이 간절해지는 건 꼭 영화 <로마의 휴일> 때문만이 아니다. 뜨거운 태양을 머리에 인 채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왜 주름 풍성한 개더 스커트 차림의 오드리 헵번이 체신 머리 없는 어린 아이처럼 이 계단 위에서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고 있었는지를.

우리 가족 역시 너무나 뜨거운 날씨에 달콤한 젤라또(이탈리아 아이스크림) 생각 간절했으나 도대체 그 많던 젤라또 가게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눈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로마시가 스페인 광장 주변에서의 아이스크림 판매를 금지하고 있다는 말이 있다. 영화 속 한 장면을 재현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스페인 광장이 더러워지는 걸 우려하기 때문이라는데 나는 이 말이 도무지 믿겨지질 않는다. 사실 로마를 다니다 보면, 덕지덕지 때가 묻고 구석구석 담배 꽁초가 나뒹굴며 마치 포장마차가 머물던 자리처럼 더럽혀진 바닥을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항변한다. 그런 멍청한 대책이 어디 있나, 스페인 광장은 순전히 영화 때문에 유명해진 건데, 젤라또 한 입 베어 물고 헵번 스타일 한번 연출해 보려는 건데 그걸 박탈하다니 말도 안된다, 차라리 젤라또 가게에 청소세를 물면 될 거 아니냐.

아닌게 아니라, 스페인 광장은 영화 때문에 유명해진 곳인데, 그곳을 방문하는 여행자라면 다들 오드리 헵번 흉내낼 로망을 품고 올 터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들 젤라또를 입에 물고 계단을 내려온다면….

더럽혀지기도 하겠지만, 젤라또로 벌어들이는 수입도 엄청날텐데. 게다가 그 가게를, 바로 영화 속 헵번이 젤라또를 산 가게라고 홍보한다면 그 인기는 폭발적일텐데. 가게는 가이드북마다 소개가 되고 세계 도처로부터 온 여행자들은 너도나도 줄을 서서, 꼭 그 가게에만 줄을 서서 젤라또 하나 사기 위해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차례를 기다릴텐데.

몽글몽글 판매전략이 피어오른다. 그 가게는 명물이 될 것이고 엄청나게 벌어들이는 수입과 세금도 무시하기 힘들텐데. 돈이냐 보존이냐. 결국 로마가 선택한 건 돈이 아니라 보존이라는 말? 역시 로마는 위대한 도시로구나.

그냥 이런 정도로 위안을 삼을 수 밖에. (사실 이탈리아에서는 그런 잔머리 상술 따위는 별로 필요할 것 같지 않다. 수많은 유적과 유물, 성당의 입장료만으로도 수입은 굉장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이탈리아가 관광객으로부터 벌어들이는 수입은 주로 명품판매에서 온다고 한다.)

어쨌든 우리 가족은 젤라또 대신 작은 배 형상을 한 분수의 물줄기만으로 더위를 식힐 수 밖에.

뒤뜰 같은 광장, 캄피돌리오 

로마의 일곱 언덕 중에서 가장 신성한 언덕 캄피돌리오. 이 언덕에는 원래 두 개의 봉우리가 있었는데, 그 사이에 현재의 캄피돌리오 광장이 생기게 되었다.
▲ 캄피돌리오 광장 로마의 일곱 언덕 중에서 가장 신성한 언덕 캄피돌리오. 이 언덕에는 원래 두 개의 봉우리가 있었는데, 그 사이에 현재의 캄피돌리오 광장이 생기게 되었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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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의 포폴로 광장에는 오벨리스크의 긴 그림자가 인상적이었다. 낭만과 매력이 넘친다는 나보나 광장은 아름답고 화려한 분수 때문인지 왠지 기가 질리는 곳이었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광장 한 곳이 있었다.

그곳 역시 일부러 우리가 찾아간 곳은 아니었다.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의 '진실의 입'을 찾아가는 도중에 불쑥 나타난(!) 광장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양쪽에 끼고 들어서니 광장이 펼쳐졌다. 비교적 아담한 광장이었다. 별인 듯 꽃인 듯 바닥에 기하학적인 무늬가 그려진 캄피돌리오 광장은, 꼭 미켈란젤로가 설계해서가 아니라, 단박에 마음에 드는 그 무엇이 있었다.

더위에 지친 우리 가족은 적당한 곳에 기대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넓고 화려한 광장들이 신들을 위한 광장이라면, 이곳 캄피돌리오는 마치 작은 천사들이 오붓하게 모이는 뒤뜰 같은 광장이라고나 할까. 아기 천사들의 날갯짓 소리와 소곤거리고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릴 듯 다정한 광장이다.

나는 캄피돌리오의 아늑함과 다정함이, 광장의 삼면이 세 건물로 둘러싸여진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로마에서 산 도록을 뒤늦게 살펴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내가 느낀 편안함이 제법 정직한 느낌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핀초 언덕에서 내려다 보는 로마의 황혼은 유명하다. 오벨리스크의 긴 그림자가  광장을 가르고 있다.
▲ 포폴로 광장 핀초 언덕에서 내려다 보는 로마의 황혼은 유명하다. 오벨리스크의 긴 그림자가 광장을 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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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광장 중 가장 매력적이고 낭만이 넘친다는 나보나 광장. 이 광장에는 세 개의 분수가 있는데 사진은 그 중의 하나.
▲ 나보나 광장의 분수 로마의 광장 중 가장 매력적이고 낭만이 넘친다는 나보나 광장. 이 광장에는 세 개의 분수가 있는데 사진은 그 중의 하나.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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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피돌리오 광장은 도시계획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과 시에나의 팔라오 광장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광장들 중 하나로 꼽힌다. 다른 광장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형성된 반면, 캄피돌리오 광장은 미켈란젤로 혼자서 모든 건축적인 요소를 설계했다. 특별한 것은, 이 광장을 들어설 때, 좌우의 건물이 평행이 아니라 서로 비스듬히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광장은 실제보다 더 넓어 보이며, 감싸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오호라, 그래서였구나. 마주 본 두 건물이 똑같은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게 아니라, 안쪽을 향해 갈수록 벌어져 있기에 포근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여름날 광장에서의 휴식은 달콤했다. 우리 가족은 다시 추스르고 가던 길을 향했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내내, 그런 광장을 가진 로마 시민들이 조금 부러웠던 것도 같다. 곳곳에 광장을 남겨준 조상을 가진 그들이 조금 질투가 났던 것도 같다. 대학에서 대중연설을 배워야 했고 연설을 잘해야 좋은 지도자가 된다고 믿었던 로마인들에게는 사람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광장은 당연히 필수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광장은 무릇 그런 곳이어야 했다. 언제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곳, 나를 거부하지 않는 곳, 특별한 곳에서 특별하게만 존재하지 않는 곳, 나를 감싸 안는 곳, 쉬었다 다시 갈 수 있는 곳, 신발끈 바투 매고 새롭게 시작하는 곳, 무엇보다도, 가득 찼으면서도 텅 빈 곳, 텅 비었으면서도 가득 찬 곳. 그리하여 천사들의 웃음소리가 높게 멀리 울려 퍼지는 곳. 

절대 뒷골목이 아니다. 로마를 쏘다니다 보면 이렇게 더러운 로마의 모습을 종종 마주치게 된다.
▲ 로마의 앞골목 절대 뒷골목이 아니다. 로마를 쏘다니다 보면 이렇게 더러운 로마의 모습을 종종 마주치게 된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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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09년 8월, 2주 동안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습니다.



태그:#캄피돌리오 광장, #스페인 광장, #로마, #이탈리아, #포폴로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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