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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CIA와 피노체트 군부의 쿠데타로 무너진 칠레의 아옌데 민주정부의 마지막 항전을 다큐멘터리기법으로 기록한 영화 <산티아고에 비는 내린다>
ⓒ 헬비오 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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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이었던 1989년 12월 31일 밤.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전두환 씨가 국회에서 소위 '면피용' 대국민연설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전씨가 광주민중항쟁과 관련해 자위권 발동 운운할 때 민정당 의원들을 향해 "전두환이 아직도 너희들 상전이야!"라고 소리치고 국회의원 명패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정치인이 있었습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날 그 시간. 당시 KBS 명화극장에서는 KBS 노조가 기습적으로 편성한 영화 한 편이 안방을 찾았습니다. 영화는 낭만적인 냄새가 흠씬 묻어나는 제목 덕분에 적잖게 멜로물이나 신파물로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낭만적인 제목과는 달리 영화는 칠레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체 게바라로 상징되는 라틴아메리카의 현대사는 미국 CIA(중앙정보국)의 군부 쿠데타 지원과 피의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독재정권의 억압에 맞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염원하는 민중의 항쟁이 선연한 핏자국으로 점철된 고난의 역사이자 희망의 역사였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비극적인 나라 중의 한 곳이 칠레입니다. 한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최초로 맺어 칠레산 포도가 우리네 식탁에 오르는 나라. 그곳 칠레에서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 휘하의 군부가 국민이 직접 선출한 민주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내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산티아고와 이스터섬에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1973년 9월 11일 아침.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국영 라디오가 반복해서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방송을 내보냅니다. 화창한 날씨인데도 아나운서의 잘못된 기상예보는 계속됩니다. 미 CIA와 피노체트 군부의 쿠데타 암호명이자 행동개시 신호인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헬비오 소토 감독, 1976년작)>가 발령된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탱크 부대가 움직이고 전투기가 이륙합니다.

 1973년 9월 11일. 라디오에서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쿠데타 암호명이 떨어지자 피노체트 휘하의 탱크 부대가 대통령궁을 향해 출발하고 있다.
ⓒ 헬비오 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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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화면은 1970년 9월 4일 대통령 선거일로 되돌아갑니다. 공산당 후보인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단일화를 이룬 인민연합의 대통령 후보인 아옌데가 당선되고 지지그룹인 유니다드 파퓰러와 공동체센터를 중심으로 승리의 깃발이 휘날립니다.

다시 1973년 9월 11일. 쿠데타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라 모네다(대통령궁)를 포위한 상태에서 유니다드 파퓰러와 대학과 공동체센터 등지에서는 군부 쿠데타에 맞서 방어전선을 구축하고 아옌데 대통령과 함께 결사 항전할 것을 결의하며 총을 듭니다.

그리고 오전 9시 53분. '파시스트 쿠데타 저지와 민주주의 사수'를 위한 아옌데 민주정부 와 '빨갱이 몰살'을 전면에 내건 피노체트 군부 간의 피를 말리는 대치 끝에 쿠데타군의 첫 발을 신호로 마침내 대통령궁과 경향 각지에서 치열한 총격전이 시작됩니다.

CIA와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

영화는 1970년 9월과 1973년 9월을 오가는 교차편집 속에 아옌데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사수하기 위해 국민들과 함께 결사항전하다 최후를 마감하는 장면과 뒤이은 피노체트 군사정권의 학살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 이유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칠레의 역사를 톺아봐야 합니다. 칠레의 최고 수입원은 노천 구리 광산이었습니다. 체 게바라의 청년 시절을 담은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체가 구리광산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 눈을 떠가던 구리 광산입니다.

 대통령궁에 침입한 쿠데타군에 맞서 참모들과 소총을 든 아옌데 대통령이 결사항전을 하는 가운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 헬비오 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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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구리 광산의 실소유주는 미국계 다국적 기업으로 채굴권을 독점한 채 철저하게 수탈해 갔습니다. 아옌데 대통령은 바로 이 구리 광산의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대통령에 당선되자 국유화를 착착 진행했습니다. 그와 함께 모든 어린이에게 분유와 우유를 공급하고 토지개혁과 빈부격차 해소를 위한 사회제도 개혁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이에 맞서 미국은 칠레에 대한 경제 봉쇄에 돌입했습니다. 구리의 국제가격을 폭락시켜 칠레 경제를 공황에 봉착하게 하고 다국적 식품회사 네슬레는 분유 수출을 중지합니다. 그 결과 아옌데 집권 3년 만에 물가는 500%나 급등하고 칠레 경제는 2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며, 아기에게 먹일 분유가 없어 통곡하는 엄마의 모습을 스크린은 냉정하게 담아냅니다.   

이렇게 미국에 의해 기획된 사회적 불안 속에 군부와 다국적 기업과 목축업자 등이 CIA의 지도하에 반정부 파업을 조직하는 장면들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우익정당들이 장악한 국회에서는 연일 딴죽 걸기가 이어지고, 이들의 지배하에 있던 산업 전반에서 태업과 파업은 연례행사가 되고, CIA와 군부의 아옌데 정부 흔들기에는 가속도가 붙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혼란으로부터 칠레를 구하겠다'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구국의 결단(?)을 명분 삼아 피노체트는 암호명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를 발동하게 됩니다.

칠레의 별, 아옌데와 파블로 네루다 그리고 빅토르 하라

영화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줍니다. 아옌데 대통령은 쿠데타군의 전투기가 대통령궁에 폭탄을 투하하기 직전 집무실 책상에서 AK-47 소총을 곁에 놓고 라디오를 통해 칠레 국민들에게 마지막 연설을 합니다.

연설을 끝낸 후 대통령은 소총을 든 참모들과 함께 쿠데타군에 맞서 항전하고 전국의 대학과 공동체에서도 마지막 항전에 불을 댕깁니다. 그리고 같은 시간. 라 모네다 건너편 최고급 호텔에 묵은 파시스트들은 "빨갱이 새끼들은 끝났다"며 샴페인을 터트립니다.

아옌데 민주정부가 무너진 뒤 '피의 즉결심판' 속에 대대적인 검거가 뒤따릅니다. 하지만 에스타디오 실내체육관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쿠데타군의 총살형에도 불구하고 '벤세레모스(우리 승리하리라)'를 합창하며 저항합니다. 죽음의 적막을 찢고 '벤세레모스'를 선창한 이는 칠레의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입니다.

 라틴아메리카 민초들의 고단한 삶과 간고한 대륙의 역사를 노랫말에 담아 꿈과 희망을 합창해 온 빅토르 하라가 총살되기 직전 짓이겨진 모습.
ⓒ 헬비오 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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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는 쿠데타 직후 망명 권유를 뿌리치고 투쟁하다 검거돼 체육관에서 쿠데타군이 휘두른 개머리판과 군홧발에 짓이겨진 뒤 즉결처형 당합니다. 그의 삶과 예술은 라틴아메리카 노래운동이자 민족문화운동인 '누에바 깐시온'으로 녹아듭니다. 민초들의 삶 속에서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좌절과 저항의 영혼을 찾아 인디오의 선율로 노래한 '누에바 깐시온'의 가락들은 라틴아메리카 대륙 수백 년의 역사 그 자체이며, 한맺힘입니다.

영화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대문호 파블로 네루다의 장례행렬을 뒤따르며 내지르는 "파블로 동지여~, 아옌데여 영원하라~"가 가슴을 파고드는 가운데 엔딩 크레딧을 올립니다. 민주주의를 사수하기 위해 국민들과 결사항전한 살바도르 아옌데, 그의 오랜 벗으로 펜과 시(詩)로 제국주의와 파시스트에 저항한 파블로 네루다, 민초들의 삶을 써 내려간 노랫말로 변혁과 민주주의를 합창했던 빅토르 하라.

이렇게 세 사람의 항전과 시와 노래는 네루다의 장례행렬에서 '함성'으로 하나가 된 후 이윽고 밤하늘을 밝히는 '별'이 되어 칠레의 국민들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바보들의 '별'을 다시 만나기 위해

영화는 전반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억케 합니다. 대통령궁을 무차별 폭격하는 쿠데타군의 탱크가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로 무너진 광주항쟁과 겹치기 때문입니다. 중반부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억케 합니다. 아옌데를 축출하기 위한 갖가지 정치공작과 음모가 그를 향한 검찰과 조중동의 정조준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핏빛 5월의 함성을 가로질러 노란색 희망으로 채색되는 지금. 아옌데 대통령의 마지막 연설이 마치 그들의 목소리마냥 되살아나 우리 곁을 찾아듭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 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떠났고, 우리는 다시 그들을 만나고자 합니다. 바보스러운 국민들만이 만끽할 수 있다는 그들의 정신과 가치와 꺾이지 않는 희망이 역사의 물줄기를 타고 민주주의를 불러 낼 때,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환하게 웃고 있을 바보들의 '별'을 만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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