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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동이>.
 MBC 드라마 <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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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원 노비 즉 천민인 동이(한효주 분)를 궁녀로 임명하는 문제를 놓고 조선 왕궁은 한바탕 소동을 겪었다. 하지만, 숙종(지진희 분)과 장옥정(장희빈, 이소연 분)의 뜻이 확고했기에, 동이는 궐내 반발에도 무사히 궁녀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반발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명성대비(명성왕후, 박정수 분)의 주도 하에 궁녀 동이를 도로 내쫓기 위한 음모가 고개를 들고 있다. 정기적인 감찰부 시험에서, 동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중용>에 관한 시험을 출제해서 그를 떨어뜨리려는 움직임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속의 명성대비가 동이를 내치려는 것은 동이가 장옥정 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동이 같은 천민을 궁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기도 하다.

"평민은 궁녀 될 수 없다"는 사료들

그러나 드라마 <동이>의 이 같은 풍경과는 달리, 실제 역사에서는 천민들 중에서만 궁녀가 선발되었다. 드라마 속의 등장인물들은 "어떻게 천민을 궁녀로 뽑을 수 있느냐?"며 반발했지만, 실제로는 '규정상' 양인(평민)들은 궁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기사의 제1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궁녀는 공노비 중에서 선발한다'는 왕명이 누적되어, 이런 명령이 1698년까지의 왕명을 담은 자료집인 <수교집록>에 수록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746년 법전인 <속대전>과 1865년 법전인 <대전회통> 등에 명문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형성된 조선시대의 법률에 따르면, 공노비만 궁녀가 될 수 있고 평민이 궁녀가 되는 행위는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현종 5년(1664) 10월 24일자 <현종실록>에 나오는 "조종(祖宗, 앞선 임금들)의 옛 제도는 다만 각 관청의 하전(노비) 중에서 (궁녀를) 선발해서 후궁의 인원을 보충할 뿐이었지만, 그 당시에도 부리는 사람이 적다고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하필 궁녀 선택에서만 유독 옛 제도를 어겨, 양인에게까지 미치게 하여 훗날의 폐단을 만들려 하십니까?"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공노비 중에서 궁녀를 선발하는 것은 '조종의 옛 제도'에 해당하는 오랜 제도였다.

하지만, 여기에도 예외는 있었다. 위의 <현종실록>에는 "궁녀 뽑는 것을 형조로 하여금 법전에 의거하여 각 관청의 하전(공노비) 중에서 하도록 했는데도 별감이 사사로이 여염집에 나가 양인을 뽑아 들이는 폐단에 대해 어제 탑전에서 아뢰었습니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왕실이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양인을 궁녀로 선발하는 사례들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 인한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나온 것이 바로 <수교집록> <속대전> <대전회통> 등이었다. <수교집록>에서는 평민 중에서 궁녀를 뽑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고 그 후의 법전에서는 그런 행위에 대해 형사처벌을 가하기로 했다.

위와 같이 조선시대에는 천민이 궁녀가 되는 것이 원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 공빈(광해군의 어머니)과 장 희빈(경종의 어머니)과 최 숙빈(영조의 어머니)처럼 하급 궁녀에서 후궁을 거쳐 왕까지 낳은 여인들의 사례가 있는 탓에, 우리의 인식 속에는 궁녀와 관련하여 '보랏빛 환상' 같은 게 존재한다.

1960년대만 해도 한국의 역사학 연구가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은 탓에, 사료를 통해 구한말 궁녀들의 주장을 검증하려는 노력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1964년 논문에서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을 기초로 '궁녀는 중간계급 출신이었다'고 결론을 내린 역사학자 김용숙(2003년 작고)이 1987년 저서에서는 조선시대의 법전을 근거로 '궁녀는 천민 출신이었다'고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 것은 그간에 진전된 한국 역사학 연구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이나 유료 역사학 D/B 사이트들을 통해 조선시대 법전을 포함한 한국사 자료를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1960년대만 해도 오늘날처럼 연구 여건이 좋지 않았기에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을 근거로 논문을 쓸 수밖에 없었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간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궁녀의 출신성분이 천하지 않게 인식된 데에는 위와 같은 요인들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또 그동안 역사학계가 대중과 충분한 소통을 나누지 못해서 '궁녀는 공노비 출신'이라는 연구성과들이 대중적인 문화나 출판물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측면도 있다.

평민들은 궁녀 되기를 기피했다

하지만, <속대전>이나 <대전회통> 등에서 잘 나타나는 바와 같이, 조선시대에는 천민들만 궁녀가 될 수 있었고 그 외의 사람들이 궁녀가 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렇다면, 왜 천민에게만 궁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것일까?

엄밀히 말해서, '천민에게만 궁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는 표현은 부정확하다. '천민들 중에서만 궁녀를 선발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다. 천민 중에서만 선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 평민들이 궁녀가 되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 평민들이 궁녀가 되는 것을 견제하는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두 가지를 각각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평민들은 궁녀가 되기를 거부했다. 효종 4년(1653) 9월 24일자 <효종실록>에 의하면, 한때 조선 정부가 '궁녀는 공노비 중에서'란 관례를 깨고 평민들을 궁녀로 선발하려고 하자, 평민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반응이 나타났다.

"내수사에 명하여 양가(良家, 평민)의 딸을 뽑아 궁녀로 삼도록 했다. 이에 내수사 사람들이 여러 날 동안 쉬지 않고 민간을 수색했다. (그러자) 여염집들에서 소요가 일어나 10세 이상인 자들이 다투어 혼인하면서 이를 기피했다. 국법에서는 궁인(궁녀)은 의례 각 관청의 노비 중에서 뽑도록 했는데도, 지금 도리어 양민을 침범하고 환관(내시)들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도록 하니, 듣는 자들이 속으로 개탄했다."

여기서 내수사란 궁중에서 사용할 물품이나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담당한 기관이다. 사건이 일어난 효종 4년(1653)은 <동이>의 주인공인 최 숙빈(숙빈 최씨)이 궁녀가 되기 23년 전이었다.

이 해에 효종이 전례를 깨고 평민 중에서 궁녀를 선발하려고 하자 민간에서는 강력한 반발이 나타났다. 그것은 '소요'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딸을 궁녀로 만들지 않기 위해 민간에서는 조혼 현상까지 나타났다.

궁녀가 되는 게 얼마나 싫었으면 이런 저항까지 나타났을까? 청나라에 공녀로 끌려가지 않으려는 평민들의 정서가 조혼 풍습을 낳았듯이, 조선 왕궁의 궁녀로 끌려가지 않으려는 그들의 정서가 조혼 현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효종이 처음부터 사회적 저항을 예상하고 평민 중에서 궁녀를 선발하려 했다는 점은 내수사 사람들의 사무처리 방식에서 잘 나타난다. 그들은 '공채'를 통해 궁녀를 선발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사람들을 풀어 민간을 수색하는 방식으로 궁녀를 뽑으려 했다. 일종의 '강제징집'이었던 셈이다. 만약 궁녀가 선망의 대상이었다면, 이런 현상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된 직업인데다가 '성관계 금지 의무'까지

이 대목에서 '그 좋은 궁녀 자리를 왜 거부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궁녀는 힘들고 고된 직업인 데다가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자리였다. 특히 '독신의 의무'에는 '성관계 금지의 의무'도 포함되었다. 이런 의무는 궁녀를 그만둔 후에도 계속 부과되었다. 이 의무를 위반한 대가는 사형이었다.

'설령 그렇게 힘든 자리일지라도, 잘만 하면 김 공빈·장 희빈·최 숙빈처럼 후궁이 될 수도 있는 자리가 아니냐?'며 여전히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런 기회는 '로또 당첨'보다도 더 만나기 어려웠다. 조선시대에 실제로 그런 기회를 만난 궁녀의 숫자가 오늘날 로또에 당첨된 사람의 숫자보다 적기 때문이다.

사실, 일개 궁녀가 가까이서 왕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궐내에서의 행동반경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또 왕을 둘러싸고 있는 인(人)의 장벽이 일반 궁녀가 넘기에는 너무 높고 두꺼웠다. 일개 궁녀가 왕을 만난다는 것이 그처럼 힘든 일이기에, 그런 일을 해낸 장 희빈과 최 숙빈 등이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수 있는 것이다.

로또 당첨보다 더 어려운 '왕을 만나보겠다는 꿈'을 안고 평생 궐 안에 갇혀 살기에는, 궁녀 생활은 그 자체가 너무 힘든 것이었다. 무서운 분위기 속에서 고된 노동을 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고, 지엄한 궁궐에 신분적으로 예속되는 것도 힘든 일이었고, 궁녀를 그만두더라도 평생 이성교제를 할 수 없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양반관료집단, 국왕 주위에 궁녀들 모이는 것 경계

경복궁(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소재) 내부. 궁궐 내에서조차 궁녀들의 행동반경은 제한되었다.
 경복궁(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소재) 내부. 궁궐 내에서조차 궁녀들의 행동반경은 제한되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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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평민들이 궁녀가 되는 것을 견제하는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했다. 그 '강력한 정치세력'이란 양반 관료집단을 말한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라는 조선시대의 정치구도에서 알 수 있듯이, 양반 관료집단은 한편으로는 왕의 신하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왕과 대립하는 세력이었다.

국왕의 힘이 너무 강해질 경우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양반 관료집단은 국왕 주변으로 힘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했다. 예컨대,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세력이 효종의 중앙군 확충정책을 반대한 것은 그것이 왕권강화로 연결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왕궁에 궁녀들이 많이 모이는 것도 견제했다. 군인이든 환관이든 궁녀든 국왕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지면 자연히 국왕의 권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국왕이 많은 궁녀를 확보하는 것에 대한 양반 관료집단의 거부감은, 예컨대 숙종 8년(1682) 8월 14일자 <숙종실록>에도 잘 나타난다. 심유·이돈·이이명·서종태와 숙종의 서면 대화를 소개한 이 기록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대화의 쟁점은, 궁녀를 줄이느냐 마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심유 등: "궁녀의 숫자가 지금보다 많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숙종: "궁녀의 숫자가 중국과 다르고 이전에 방출한 자들도 많으니, 지금 이렇게 운운하는 말은 잘못 들은 듯하다."

'궁녀를 줄이라'는 관료집단과 '궁녀 숫자가 부족하다'는 국왕 사이의 갈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관료들은 '궁녀가 너무 많다'고 주장하고, 숙종은 '당신들이 뭔가 잘못 알고 있다'고 응수했다. 이런 대화는 <영조실록> 등에서도 확인된다. 왕실에서 정부 몰래 궁녀들을 선발했다가 들키는 바람에 궁녀들을 방출하는 일이 곧잘 발생하기도 했다.

관료와 국왕의 타협의 산물, '궁녀는 공노비 중에서만 선발한다'

덕수궁(서울시 중구 정동 소재) 중화전 앞마당. 조회 때에 정1품에서 종9품의 관료들이 도열하던 곳이다. 양반 관료들은 한편으로는 국왕의 신하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국왕과 대립하는 세력이었다.
 덕수궁(서울시 중구 정동 소재) 중화전 앞마당. 조회 때에 정1품에서 종9품의 관료들이 도열하던 곳이다. 양반 관료들은 한편으로는 국왕의 신하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국왕과 대립하는 세력이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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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결구도가 낳은 타협의 산물이 바로 '궁녀는 공노비 중에서만 선발한다'는 법률규정이었다. 이는 왕권과 신권 간에 '평민 중에서는 궁녀를 선발하지 않기로 한다'는 타협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공노비 외에는 건드리지 말라'는 양반 관료집단의 경고 메시지를 반영한 것이다. 평민이 궁녀가 될 경우 형사처벌을 가하도록 한 것은 양반 관료집단의 뜻을 반영한 결과였다.  

물론 이런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은 항상 탈법적으로 혹은 은밀히 궁녀를 증원하려 했고 또 그로 인해 왕권과 신권 간에 갈등이 계속되곤 했지만, '궁녀는 공노비 중에서'라는 원칙은 1865년 <대전회통> 시기까지도 여전히 유효했다. 

한편, 조선시대 궁궐문제 전문가인 홍순민은 평민을 궁녀로 만들지 못하도록 한 이유와 관련하여 위의 측면 외에 신분제적 요인도 제시했다. 신분제 사회에서 정당한 사유 없이 양인(평민)을 천민(궁녀)으로 만드는 것은 국가의 근본을 위협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천민 중에서만 궁녀를 선발하도록 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관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평민을 궁녀로 만드는 데에는 두 가지 장애물이 존재했다. 하나는 평민들 자신의 저항이고, 또 하나는 양반 관료집단의 견제였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왕실로서는 평민 대신 '만만한' 공노비들을 궁녀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평민들의 저항과 관료들의 견제를 물리치고 평민 중에서 궁녀를 선발할 있을 만큼 조선 국왕의 권력은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드라마 <동이>에서는 장악원 노비인 동이가 궁녀에 임명된 일을 일종의 신분상승처럼 취급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은 신분상승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다른 관청에 근무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궁궐에서 근무하는 편이 낫기는 했겠지만, 궁녀는 '왕궁에 신분적으로 예속된 존재'라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천민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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