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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아황산가스에 잠긴 서울시내 초고층아파트는 노동자와 빈민들이 사는 슬럼가로 변한다.
▲ 2039년 슬럼가로 변한 초고층 아파트 365일 아황산가스에 잠긴 서울시내 초고층아파트는 노동자와 빈민들이 사는 슬럼가로 변한다.
ⓒ 김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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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9년 대한민국은 빨강족과 녹색족으로 나눈다. 빨강족이란 비판과 판단을 담당하는 뇌(전두엽)를 녹색족 건설무리에게 팔아넘긴 사람들이다. 아파트라면 사족을 못 쓰며 대한민국 인구의 90% 남짓 차지한다. 열섬인 서울 한복판 아파트에 모여 산다고 '빨강족'이라 이름 붙였다. 녹색족은 개발로 자연을 보호하고, 경쟁으로 인간을 진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대한민국 1%다. 서울시내 아파트값을 다락같이 올려놓고 자신들은 빠져나와 푸른 숲과 농촌을 온통 차지하여, '녹색족'이라 부른다. 

"삐익... 녹색거주지역 대치구역 25-15지구, 대모 숲에 괴 생명체 출현!"
"삐익... 녹색거주지역 대치구역 25-15지구, 대모 숲에 괴 생명체 출현!"

모니터를 보고 있던 녹색족 종원씨가 눈살을 찌푸린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겪는 일이다. 녹색족은 숲과 서울 시내를 이어주는 골목길 자리에, 커다란 레드벨트(30년 전 '뉴타운', '보금자리주택'이라고 부름)를 두르고 곳곳에 숲 지킴이 경비로봇을 세웠다.

365일 희뿌연 아황산가스에 잠긴 서울시내 초고층 아파트촌 슬럼가에 사는 빨강족들이 부족한 산소를 찾아 산기슭으로 파고들 때마다, 어김없이 경보음을 울린다. 서울시내 아파트촌은 이제 숲을 빼앗긴 빨강족 서민들만 남았다.

서울의 골목길은 왜 사라졌나? 

2011년 11월 11일. 대통령은 포고령 2011호 '경쟁과 효율을 해치는 골목길 폐쇄 및 출입금지령'을 발표한다. 포고령 전문이다.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는 꼬불꼬불하고 비좁은 골목길은 경쟁에 필요한 속도를 죽이고, 여유를 구실로 오히려 게으름마저 부추깁니다. 골목길은 정치인이 아닌 한창 공부해야 할 학생과 살림살이에 전념해야 할 주부들조차 함부로 정치적인 발언을 하고, 전문가도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 자기 분수를 잊고 대화와 수다로 마음 속 고민과 사회문제를 풀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곳입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끼리끼리 모여 전문가와 지도층의 전문성과 권위에 도전을 서슴지 않는 불순과 위험이 도사려있는 우범지대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는 돈 한 푼 내지 않고 이루어져 '효율과 경쟁'을 기반으로 삼는 시장경제를 허물어버리는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으로서 이를 좌시할 수 없어 앞으로 모든 골목길을 없애고,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좁고 불결한 길은, 허가받은 건설족 외에, 일체 사람들 출입을 엄격히 통제할 것을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포고령 발표를 기다린 듯,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골목길은 길이 아니다!" "학원에서 공부할 시간에 골목길에 아이들을 내놓는 어른이 부모자격이 있느냐"며 신문이 팔랑팔랑 떠들고 방송이 24시간 맞장구를 친다.

인터넷이나 화상 핸드폰을 놔두고, 골목길에 나와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나누는 풍습은, "몸 속 에너지만 허비하는 비효율적이고 강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창피한 일"이라며 녹색족 대학교수들이 연일 입방아를 찧어댄다.

빨강족 노동자 서민들은 ▷생각을 즐기며 천천히 걷는 즐거움 ▷나지막한 처마 사이로 떠오르는 달과 별을 지켜보는 여유 ▷어두컴컴한 길을 휘휘 돌아 집으로 돌아오는 딸과 아들을 마중 나가는 설렘 ▷이웃끼리 정을 나누는 자유로운 골목길을'재개발'과 바꿔치기 한다.

골목길은 수천년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사람과 자연을 맺어주는 통로 구실을 하였다.
▲ 숲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골목길은 수천년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사람과 자연을 맺어주는 통로 구실을 하였다.
ⓒ 김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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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을 안은 마을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여유롭게 걸을 수있는 자유조차 빼앗겨버렸다.
▲ 마을은 사라지고! 골목길을 안은 마을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여유롭게 걸을 수있는 자유조차 빼앗겨버렸다.
ⓒ 김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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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가는 마지막 길목인 달동네 골목길도 녹색족 차지가 되었다. 포클레인과 불도저를 앞세운 녹색족은 숲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막고, 산자락에 기대어 너나없이 어울리던 마을을 하나씩 허물어나갔다.

도란도란 정을 나누고 자박자박 발길이 오가던 골목길을 안은 수색 북아현 가재울 응암 미아 향동 삼송 하남 남양주 따위 마을은 이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몇 백 년을 이어오던 빛나던 이름과 구국절절 이어오던 사연과 피땀 어린 역사들도 콘크리트 더미 속에 함께 묻혔다. 

2039년, 마침내 모든 골목길이 사라졌으니 서울시민들은 더는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없게 되었다.


태그:#녹색족의 기원, #개발과 성장이 부른 녹색족, #사라진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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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숲 그리고 조경일을 배웁니다. 1인가구 외로움 청소업체 '편지'를 준비 중이고요. 한 사람 삶을 기록하는 일과 청소노동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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