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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취업포털 사이트에서 남녀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인생이모작'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조사 결과, 전체 대상자 가운데 약 88%가 '제2의 인생설계 계획이 있다'고 답했으며, 제2의 인생을 위해 현재 준비하는 것으로는 경제력 향상(51.9%), 자기계발(42.3%), 취미특기 개발(37.6%), 개인사업, 창업(17.7%), 이직(15.1%)순이었다. 이모작 준비에서는 (재테크를 통한) 자금 마련이 가장 중요하고, 또 이것(자금부족)이 가장 어려운 점이라고 고백했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맞이하는) 시점을 언제로 보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36-40세가 가장 많은 비율(23.6%)을 나타냈고, 그 다음이 41-45세(21.6%)로 나타났다. 응답자 가운데 약 43%가 40세가 되기 이전에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싶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40대를 새로운 '전환점'으로 생각하는 비율은 33%에 불과했고, 표에서 보는 것처럼 '45세'를 분기점으로 비율은 현저히 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45세 이전이 전체의 65%를 차지). 놀랍게도 '사오정'(45세에 정년퇴직)이라는 유행어가 설문조사에서도 딱 들어맞는다.

직장인 대상 인생이모작 설문조사 결과 (잡코리아/2009.10)
▲ 연령대별 이모작 시점 직장인 대상 인생이모작 설문조사 결과 (잡코리아/2009.10)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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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가장 적절한 은퇴시점(인생 이모작 출발시기)은 언제일까? 지금 같은 불황기에 가족을 부양해야 할 30대 가장이 '평소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겠다'는 의지만을 믿고 별다른 준비 없이 직장을 박차고 나왔다면, 그것은 옳은 결정일까? 반대로, 평균 수명이 늘어나건 말건,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둑)라는 말을 듣건 말건, 아무 생각 없이 현재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일까? 정답이 있을 리 없다. 각자의 생각에 따라, 처해진 상황에 따라 답변은 천차만별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언제가 적절한 시점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라는 점이다.

베이비 부머(55년생에서 63년까지 태어난 세대)들의 은퇴가 시작되면서, 시니어(Senior) '창업'과 관련된 다양한 '이벤트'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곳 저곳에서 시니어클럽과 창업 학교, 컨설팅 회사들이 생겨나고 있고 정부 차원에서도 몇 십억의 예산을 투입해 '시니어 창업육성 지원정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움직임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이 곳이 어디인가? 평균 기대수명 100세,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 매년 30만 명 이상의 은퇴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곳 아닌가?

지금 몸 담고 있는 직장에서 아무리 오래 버틴다 하더라도 60세 이전에는 은퇴를 할 것이고, 따라서 최소 20년이라는 세월을 '할 일 없이' 보낸다는 것은, 소득이 있고 없고를 떠나 두렵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짚고 가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시니어들(아직 정확한 연령대에 대한 사회적 기준은 없음)에게 '창업'을 무조건적으로 권장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라는 점이다.

극심한 취업난에 지금 출근할 직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조차 내일을 할 수 없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 '은퇴한 노인들'에게 허락될 일자리가 얼마나 되겠는가? 따라서 '재취업'은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낮으니 '창업'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 판단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둘 중 어느 것이 더 나은 선택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접근 방법이 틀렸다. 오히려 '시니어'와 '창업'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일 가능성이 더 높다.

왜? 지난 30년간 평범한 직장인(관리자)로 살아온 사람이 우리나라처럼 자영업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시장 환경에서, 창업을 통해 성공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성공이라는 표현 대신 '살아남기'라는 말을 써도 좋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니 현재도 퇴직금을 몽땅 털어 사업을 시작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망한 사례들이 얼마나 많은가?

앞서 은퇴한 선배들의 실패를 교훈(?) 삼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정답'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긴 하지만, '일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도 일정 정도 노후 준비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 한참 나이에 직장에서 밀려난 '젊은' 시니어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다. 여전히 은퇴를 앞둔 혹은 이미 은퇴한 시니어들에게 '인생 2막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라는 화두는 매우 절박한 주제임에 분명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다른 나라(미국)의 경우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미국에는 AARP(American Association of Retired Persons)라는 은퇴자 협회가 있다. 미 전역에 지부를 두고 있고, 회원 수만도 3500만 명이 넘는(50세 이상이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음) 미국 최대의 은퇴자 조직으로, 비영리로 운영되는 단체다. 협회 차원에서 은퇴자들을 위한 다양한 봉사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 단체에서 실시하고 있는 프로그램 가운데 '고령자 지역사회 고용 프로그램(SCSEP, Senior Community Service Employment Program)'이라는 것이 있다.

SCSEP는 고령자들이 지역사회에 있는 공공기관(학교, 병원)이나 민간단체 등에서 일할 수 있도록 '취업 교육' 및 '직업 알선'을 해주는 (노동부 주관) 프로그램이다. 주로 55세 이상의 비취업 저소득층 고령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는데, 교육 후 취업률은 50%가 넘는다고 한다. 가난한 노인들에게 단순히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직업 교육 및 훈련을 통해 개인의 경제적 독립성을 키우고, 이들을 사회서비스가 필요한 영역에 배치함으로써 지역 사회의 복지 수준을 향상시킨다는 것이 목적이라 할 수 있다(단순히 '구직자 고용'이라는 차원을 넘어,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한 통합적 사회 서비스 구축의 사례로 많이 인용됨).

www.aarp.org
▲ 미국 은퇴자협회(AARP) 홈페이지 www.aarp.org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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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SEP가 담고 있는 핵심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직업훈련 및 교육기회의 제공'이다. 창업이 먼저가 아니라 제대로 된 '준비'가 우선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취업에 성공한 고령자들이 일하는 영역을 보면, 도서관 서비스, 법률상담 서비스, 주택개조, 세금 상담, 공해방지 및 환경 정화 등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거의 전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교육, 훈련 및 취업 연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제대로 된 교육 과정도 없이, 검증도 되지 않은 불확실한 분야에 시간과 돈을 '베팅'하라고 사람들을 현혹하는 이른바 '비즈니스 창업 스쿨'과 비교할 때, 접근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무엇보다 제대로 된 '두 번째 인생학교'(Second Life School)가 만들어져야 한다. 각 개인의 기호와 장점에 기초하여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아이템을 찾고, 과거의 경험을 살려나갈 수 있는 '시니어 학교'가 필요하다. 중앙이든 지역이든, 단기적 성과에 연연해 일자리 숫자 늘리기에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새로운 '경제주체'로서의 시니어 '인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 실천방안들이 나와주어야 한다.

경제활동 기간 내내 부모 된 책임을 다했으되 정작 자신을 돌볼 수 없었던 5학년 가장의 청년 시절 '꿈'을 찾아줄 수 있는 학교(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자아발견 프로젝트), 뜻이 서로 통하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학교(귀농을 전제로 한 마을 공동체 구축, 협동창업), 주니어의 패기와 시니어의 경험이 서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학교(2030과 4050의 세대별 장점을 결합시킨 세대간 창업) 등 새로운 개념의 시니어 '대안학교'가 많이 생겨야 한다.

한국인의 근로공식은 이미 54-68-77로 바뀌었다. 54세에 현재의 직업에서 첫 번째 정년을 맞이하고, 68세까지 두 번째 직업을 가져가다가 77세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나이는 점점 더 뒤로 늘어날 것이다. 우리들의 직업인생은 이미 장기전에 돌입했다. 20대에 입사해 30년간 일하다가 은퇴하여 다시 20년을 더 일해야 하는 이모작 시대. 지금 우리 앞에 그 길고 험난한 길이 놓여져 있다.

이모작의 첫 출발은 긴 안목에서 인생 계획(Life plan)을 세우는 것에서 시작한다. 계획과 준비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런 면에서 이모작 프로젝트는 이미 은퇴한 시니어(Senior)가 아니라 지금 현직에 있는 주니어(Junior)에게 더 필요한 작업일 지 모른다. 준비하는 시간이 충분할수록, 그만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은 사회에서 밀려난 불쌍한 '사오정'이 아니라, 준비된 인생을 살아가는 위풍당당한 '4학년 5반'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시너어들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창업이냐 재취업이냐'의 선택이 아니라 제대로 된 교육 훈련을 통해, 새로운 인생 2막을 열어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진짜 '학교'다.


태그:#인생 이모작, #시니어, #베이비붐 세대, #시니어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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