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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사의를 표명한 박기준 부산지검장
 23일 사의를 표명한 박기준 부산지검장
ⓒ MBC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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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발(發) 검찰 개혁이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오마이뉴스>와 MBC <PD수첩>이 보도한 '검사와 스폰서' 실태가 정국을 뒤흔들고 있다.

부산-경남 지역에서 대를 이어 건설업을 해온 정아무개씨(52)는 20여 년 동안 이 지역을 거쳐간 검사 200명의 스폰서(후원인) 역할을 해왔다. 정씨의 양심고백은 대한민국 검찰의 수준이 과연 이 정도일까, 의심이 들 만큼 충격적이다.

정씨가 검찰의 부조리 행태를 고발하기 위해 부산지검(박기준 검사장)에 제출한 진정서에 따르면, 3명의 현직 검사장급을 포함해 50~60명의 전·현직 검사가 금품과 향응, 그리고 이른바 '2차' 혹은 '3차'로 표현되는 성(性) 접대를 받는 등 최소 100여 명의 검사가 정씨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왔다.

조폭에게 수사비 지원받아 조폭 수사... '악순환의 검찰생태계'

검사의 '스폰(후원, 스폰서)' 문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해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는 인사청문회에서 집을 사는 데 차용증도 없이 15억 원씩이나 빌려준 '천사표 스폰서'의 존재가 드러나 낙마했다. 민유태 전주지검장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1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옷을 벗었다.

2007년에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이귀남 법무부장관 등이 삼성그룹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사실을 공개해 특별감찰조사본부가 꾸려졌으나 별다른 조사 없이 활동을 종료했다. 그전에는 노회찬 의원이 이른바 '삼성 X파일'을 공개해 최경원 전 법무장관 등이 삼성에서 떡값을 수수한 사실을 폭로해 일부 해당자가 사직하기도 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것은 매일 '범죄와의 전쟁'을 하는 검사들이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래서 대개의 검사들은 비교적 자기 관리에 엄격한 편이다. 그런데도 이처럼 많은 검사들이 집단적으로 스폰서의 유혹에 빠지는 것은 아직도 적지 않은 검사들이 낡은 폐습과 권력의 단맛에 취해 헤어나지 못하는 탓이 크다.

이런저런 이유로 상당수 검사들은 평검사 시절부터 '믿을 만한 업자'로부터 지원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선의로 시작한 '믿을 만한 업자'가 곤궁에 처하거나 검찰에 배신감을 느낀 경우에는 검사들이 업자들에게 코가 꿰이기도 한다. 심지어 일부 검사들은 '조폭'으로부터 수사비를 지원받아 조직 폭력을 수사하는, 웃지 못할 '악순환의 먹이사슬 생태계'를 조성하기도 한다.

매월 두차례 촌지-접대... 정례성 띠어 '스폰' 아닌 '뇌물'

한 건설업체 대표가 수십명의 검사들에게 금품, 향응을 접대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파문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21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한 시민이 검찰 로고를 보며 지나가고 있다.
 한 건설업체 대표가 수십명의 검사들에게 금품, 향응을 접대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파문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21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한 시민이 검찰 로고를 보며 지나가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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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도 사람인지라 소소한 접대는 '인지상정'이라고 검사들은 말한다. 또 스폰서 문화의 시작은 대개 검사들의 부족한 수사비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수사비가 모자라는 것이 아니고 수사 이후의 회식 등 부대비용이 모자랄 뿐이다.

더구나 말이 좋아 '스폰'이지 이번 사건의 경우, 정씨의 향응과 접대가 매월 두 차례씩 정례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뇌물'에 가깝다. 부조리한 폐습과 관행을 넘어서, 검찰이 칼을 뽑아야 할 범죄와 비리의 혐의가 어른거린다.

정씨 자신도 진정서에 "뇌물, 촌지, 향응, 성접대 등에 대하여 공직자윤리법, 성매매특별법 등 공소시효가 남아있는 근래의 것은 형사적 책임, 시효가 지난 것은 도덕적 책임을 물어 엄격히 조사해 처벌해 주길 바란다"고 썼다.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정씨의 부산-경남 지역 검사 접대-향응 리스트에 등장하는 검사는 모두 50~60명이다. 이 가운데 현직 검사는 검사장급 3명을 포함해 28명 가량이다. 일단 이들이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키로 한 검찰의 감찰 및 수사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상조사위원장만 민간인일 뿐, 실무를 맡는 진상조사단은 전원 현직 검사들로 구성된 만큼 이들이 과연 선배-동료 검사들을 제대로 조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정씨의 자필 진술서에 따르면, 정씨는 1984년부터 2009년 4월까지 이들을 접대한 것으로 돼 있다. 부산-경남 일대 검사들에게 향응을 제공한 정황이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다. 검사들의 접대 날짜와 장소는 물론, 접대 메뉴와 참석자, 룸살롱 여성 접대부 팁, 결제한 수표의 일련번호까지 적혀 있다. 따라서 조사에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술자리의 '충성주 문화'로 구현되는 '검사동일체의 원칙'

그러나 리스트에 오른 검사들이 경중에 따라 징계 또는 처벌을 받더라도, 검사동일체(檢事同一體)라는 독특한 조직문화와 '견제받지 않는 검찰권'이 존재하는 한 '악순환의 생태계'는 언제든지 생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이번 사건에서 드러나듯, '엄격한 상명하복을 전제로 한 검사동일체 원칙'은 검찰 사무에서뿐만 아니라 퇴근후의 회식자리에서도 '충성주 문화'로 구현됨을 알 수 있다. 정씨가 스폰한 회식자리의 풍경은 검사들이 폭탄주를 마시면서 "훌륭한 부장을 모시고 생활하게 돼서 영광이다"라고 인사하는 '상명하복의 충성서약주'로 시작된다. 충성서약을 받은 부장은 후배 검사들에게 이런 식으로 피의자 압박조사 기법을 전수한다.

"니는 그런 것도 구속 못시키나. 밤잠 안 재우고 조사하면 다 분다. 실토 안하면 회사를 압박하든지 해야지 그 말만 믿고 풀어주면 어떡하노? (피의자가) 구치소에 있으면 몇 번 불러다가 조사 안하고 처박아 놓고 그냥 보내는 기라. 그게 사람 죽이는 기라."

검찰조직에서 상명하복의 충성주 문화는 남녀와 노소를 불문한다. 여검사들도 예외없이 폭탄주를 마시면서 충성서약을 한다. 다만, 여검사들은 질펀한 '2차' 자리를 가지 않을 뿐이다. 햇병아리 검사인 검사시보도 예외가 아니다. 정씨가 시보 시절에 5~6회 성접대를 했다고 지목한 한 검사는 지검의 현직 차장검사로 있다.

처음에는 정씨가 '보험'을 들기 위해 접대했지만 나중에는 검사들이 지역에 부임하면 스폰을 해달라고 먼저 연락을 했다. 정씨는 "부장검사를 따라왔던 평검사 가운데 나중에 나한테 따로 연락해 접대 등을 요구한 경우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따라서 상명하복의 검사동일체 원칙이 유지되고 충성주 문화가 지속되는 한, 견제받지 않는 검찰권력에 '보험'을 들거나 '기생' 혹은 '공생'하려는 지역유지들과의 유착은 계속되고 그것 자체가 검찰이 척결해야 할 '토착비리'인 것이다. 결국 검사동일체 조직문화와 견제받지 않은 검찰권의 존재가 '악순환의 먹이사슬 생태계'를 유지하는 터전인 것이다.

'진주지청 6호 검사' 박기준 검사장과 '7호 검사'로 통한 정씨

그런데 문건을 자세히 보면, 정씨의 접대-향응은 84년~2004년까지 20년 동안에 걸쳐 있다가 2009년으로 건너뛴다. 2005~2008년 동안의 '공백기'가 있다. 정씨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2005년 이후에는 접대가 별로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도 정씨가 2009년에 다시 부산지검 검사들에 대한 접대를 재개한 것은 다분히 의도성이 엿보인다.

정씨가 폭로를 결심하게 된 검사와 스폰서의 관계에서 보면, 모든 중심에 박기준 부산지검 검사장(51, 사법시험 24기)이 있다. 정씨의 자필 문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정씨는 "박 검사장과 회식을 수십 번 했을 것"이라고 했다. 울산 출신인 박 검사장과 정씨의 관계는 '악어와 악어새'를 떠올리게 한다.

대학 학번이 같은 두 사람이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박 검사장이 87~88년 '진주지청 6호검사'로 부임했을 때였다. 처음에는 '영감님'과 '업자'의 '갑 대 을 관계'였으나 정씨가 90년대 초반 도의원 선거에 나올 때쯤에는 박 검사장이 먼저 "말 트고 지내자"고 제안해 '친구 관계'로 바뀌었다.

정씨는 이 무렵 진주지청 '7호 검사'로 통했다. 당시 진주지청에는 4호 검사실을 제외하고 6호 검사실까지 있었다. 그가 존재하지 않은 '7호 검사'였다는 것은 그만큼 검찰지청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호가호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88년부터 시작된 정기적인 촌지와 접대-향응은 2004년까지 계속됐다. 정씨의 셈법에 따르면, 박 검사장이 부산경남지역에 근무할 때 정례적으로 신권을 봉투에 넣어 제공한 '촌지'만도 적게 잡아 60만 원×12(개월)×4(년)=2880만 원이고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2억 원 정도다. 물론 접대-향응비는 뺀 것이다.

그동안에 박 검사장은 서울과 울산-부산 등지를 오가며 부장검사, 차장검사, 검사장이 되었다. 그동안 그가 거느린 식솔(부하 검사)들은 모두 정씨의 스폰 대상이었다. 명절 때면 박 검사장에게 따로 쥐포와 함께 현금을 보냈고, 서울로 발령이 나면 서울까지 가서 원정 접대를 했다.

정씨가 정신병자?... 자기가 전수한 '함정' 기법에 걸린 검사장

박 검사장과 '7호 검사'의 관계는 2009년에 틀어졌다. 그동안 곧잘 들어주던 정씨의 청탁을 외면한 것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정씨는 지난 2월초에 박 검사가 검사장으로 있는 부산지검에 검사들의 비위를 고발하는 진정서를 접수시켰다.

서울중앙지검장 다음으로 요직인 부산지검장을 맡고 있는 대한민국 일선 검사장이 업자로부터 수억 원에 이르는 촌지(뇌물)와 접대를 받은 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정씨의 진정 이후에 박 검사장이 취한 폭언과 거짓말 그리고 '동지적 관계'라는 자기고백(자백)이다.

뇌물죄는 뇌물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이 쌍방 처벌된다. 정씨는 자신에게 미칠 화(禍)와 사회적 파장을 뻔히 알면서 검찰에 정면승부를 건 것이다. 그런데 박 검사장은 정씨를 정신병자로 몰아갔고, 정씨의 고발 내용을 취재한 <PD수첩> PD에게는 "다른 사람을 통해 당신한테 경고했을 거야"라는 폭언으로 협박했다.

검사동일체의 조직문화에 젖은 박 검사장의 눈에는 정씨가 '정신병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마이뉴스> 기자가 만난 정씨는 멀쩡했다. 용기가 지나쳐 만용일 수는 있지만 결코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사실 박 검사장이 정씨와의 전화통화에서 내부비리를 고발했다가 '왕따'를 당한 김용철 변호사를 언급한 것을 보면 박 검사장도 정씨가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히려 '7호 검사' 정씨는 수십 번에 걸친 박 검사장과의 술자리에서 '전수'받은 기법대로 박 검사장을 '함정'에 빠뜨렸다. 정씨가 <PD수첩>에 제공한 박 검사장과의 전화통화 녹음 내용을 보면 대한민국 검사장의 수준이 드러난다(박 검사장은 정씨가 자신의 음성을 변조했다고 주장했다).

독수독과론? 나쁜 검사장 밑에서 나쁜 검사가 나온다

검찰총장에서 낙마한 천성관 전 서울지검장
 검찰총장에서 낙마한 천성관 전 서울지검장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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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 : 우리가 술을 한두 번 먹었나.
박 검사장 : 그런 건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아, 너와 나는 동지적 관계에 있고 우리의 정은 그대로 끈끈하게 유지가 된다'라는 걸 느끼는 거잖아.

정씨 : 천성관 총장 발령 났다.
박 검사장 : 천성관 총장이 됐다고? 내가 지금 통화 좀 해야 된다. 천성관(과) 아주 친하거든.... 20기, 21기 다 나가지? 그러면 (나는) 무조건 발령 난다. 그렇게 되면 부산이나 검찰국장이나 두 자리 중에 간다.

'동지적 관계'였던 '7호 검사'는 검사장보다 먼저 검찰총장 인사를 알고서 박 검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박 검사장의 예상대로 그는 부산지검장으로 발령이 났다.

노회찬 전 의원이 안기부가 도청한 '삼성 X파일'을 공개했을 때 검찰은 '독수독과(毒樹毒果) 이론'(불법도청 등 위법한 방식으로 수집된 증거는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을 내세워 대화내용에 대한 수사는 포기하고 도청이 이뤄진 경위에 대해서만 수사를 실시했다.

독수독과론을 원용하면, 상명하복의 검사동일체 원칙을 고수하는 한, 나쁜 검사장 밑에서 나쁜 검사가 나온다. 그리고 견제 받지 않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것이다. '나쁜 나무'와 '썩은 나무'는 베는 수밖에 없다.


태그:#검사 스폰서, #검사동일체, #박기준, #독수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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