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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시 경기전 사거리 담벼락밑 한 평 콘테이너 박스는 구두수선공 최창용의 작은 일터다. 최씨는 매일 오전 9시~오후 7시까지 이 박스 안에서 손님의 구두를 수선하는 일을 30년째 해오고 있다.
▲ 구두수선공 최찬용 씨가 손님의 구두를 수선하고 있다 전북 전주시 경기전 사거리 담벼락밑 한 평 콘테이너 박스는 구두수선공 최창용의 작은 일터다. 최씨는 매일 오전 9시~오후 7시까지 이 박스 안에서 손님의 구두를 수선하는 일을 30년째 해오고 있다.
ⓒ 신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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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구두라도 내 손만 닿으면 다 고쳐요. 다른 사람은 인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난 내가 가진 기술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전국 최고라고 생각해요. 가끔 쓰레기로 버려질 구두를 들고 온 사람들이 내 손으로 고친 구두를 신고 고맙다는 말을 할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전주 성심여고 입구 경기전 사거리에서 구두종합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최찬용(69·구두수선공·전주시 평화주동 2단지)씨. 그는 일상에서 얻는 감사함을 무한한 인생의 보람으로 돌려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한 평 작업장에서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구두를 수선하며 고객들을 통해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느껴온 지 어언 30여 년.

어떤 불편한 구두라도 그의 손이 닿기만 하면 편안한 신발로 변화시킨다. 망치로 뚝딱뚝딱 못을 박고, 가죽에 본드를 칠하고, 가위질 몇 번 하고 나면 헌 구두가 새 구두로 변한다. 말하자만 그의 손은 마이더스다.

구두수선공 최찬용씨가 일하는 구두종합병원
▲ 구두종합병원의 모습 구두수선공 최찬용씨가 일하는 구두종합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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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의 고향은 전북 부안군 진서면. 그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끌고 가는 마차에 깔려 척추장애 3급의 후천적 장애인이다.

최씨가 처음 구두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대 초반, 서울 돈암동에서부터 출발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양화기술을 배워 돈을 버는 게 목적이었던 그는 그 시대 양화점을 갖는 건 최고의 직업이었다고 말한다.   

최씨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20대 초반에 배웠던 구두 수선 일을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지금까지 달려왔지만 그건 인생에 있어 큰 의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며, 지금은 노후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지만 때론 친구들을 위해 막걸리 한 잔이라도 베풀 수 있는 생활에 만족한다."고 무탈 없이 지내온 지난 삶을 되돌아봤다.

"전주시내에 구두수선 일을 하는 사람이 약 80명 정도 돼요. 그런데 다른 곳에서 못 고친 구두를 나한테 가지고 오면 거의 다 고쳐요. 나를 찾는 손님은 80%가 단골손님이니까요. 그래서 내 기술이 최고라라는 겁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긍지와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최씨. 일상에서 구두수선일이 마냥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는 "구두를 고쳐주는 것도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과 같은 구두병원 아닙니까? 성격이 다를 뿐"이라고 강조한다.

"요즘 세상 누가 구두 수선을 배우려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죽으면 전주시내 구두수선공은 모두 사라지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일은 고단하지만 마음 편히 사는 세상이 행복한 세상  아니겠냐"라고 그만의 인생철학을 전한다.

그의 이야기는 서민들의 평범한 일상을 자기 일처럼 염려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오늘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구두수선'의 외길을 걸어가고 있는 인생의 주역이었다.


태그:#구두수선공 , #구두종합병원, #구두수선, #최찬용 , #전주경기전사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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