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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사소한 문제

정춘숙 대표
 정춘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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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문제를 아주 사소한 문제로 치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에요. 전체 사회에서 여성문제는 아주 작은 문제이고,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여성문제보다 중요한 일들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 당하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당장의 생존 문제, 즉 죽고 사는 문제인데도 말이에요."

정춘숙 (사)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지난 3월 24일 발족한 2010유권자희망연대(이하 유권자연대)의 창립총회에서 '밥(무상급식)과 강(4대강)'만이 아니라 여성의 '안전'문제를 주요활동의제로 채택해줄 것을 요청했다.

누군가 '일(비정규직, 실업, 일자리 등)'의 문제를 유권자연대의 주요의제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요구했고, 이에 대해 사회자가 다음번 운영위원회에서 검토해보겠다고 답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성문제도 당연히 유권자연대의 주요의제에 포함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 전 전 국민을 공분케 했던 '부산 여중생 납치 살해 사건'만 둘러보아도 일상생활 속에서의 여성의 '안전'문제는 매우 심각한 일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권자연대에서는 '밥'과 '강'에 이어 '일'의 문제가 주요활동의제로 채택되었음에도, 그가 제기한 여성의 '안전'문제는 주요의제로 포함되지 않았다. '일'의 문제와 달리 여성의 '안전'문제를 의제화 하기에는 약간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리 있는 말이다. 그 역시 이성적으로는 당연히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왠지 좀 섭섭했다. 6월 지방선거를 맞아 시급하게 제기되고 있는 '밥'과 '강', 그리고 '일' 등의 의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고도 또한 올바른 판단일 테지만, 혹여나 여성의 문제가 이렇듯 언제나 홀대받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그의 자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근민과 김민석

얼마 전 그를 매우 황망하게 만들었던 '우근민 사태'만 해도 그렇다. '가치'와 '정책'에 기반한 야권의 선거연합을 이루겠다고 나선 민주당에서 성희롱 전력이 있는 우근민 전 제주지사(그는 이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았다)를 영입해 공천까지 강행하려는 구태를 보였던 것이다.

다행히 한국여성단체연합을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단체의 강력한 반발(정춘숙 대표는 시민사회단체의 대표단의 일원으로 민주당을 항의방문해 정세균 대표를 면담하고 온 바 있다)로 우근민 전 지사의 공천은 하루아침에 '도루묵'이 되고 말았지만, 그 과정에서 우근민 지사와 함께 이름을 빛낸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그는 바로 다름 아닌 정춘숙 대표와 같은 해(1982년)에 대학에 입학하여 서울대 총학생회장까지 지냈던, 학생운동 출신의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이었던 것이다.

김민석 최고위원은 지난 2월26일 제주도까지 직접 날아가 우근민 전 지사의 '복당'을 공식 요청한데 이어, 지난 3월8일에는 시민사회단체 등의 문제제기를 '사실관계에 대한 정확하지 못한 이해'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언급해 많은 이들의 입을 '쩌억' 벌어지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 (아무런 사과의 말도 없이 오히려) '희망과대안' 등에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야권의 선거연합을 위한 4+4 단위의 민주당 측 협상대표로 버젓이 활동하고 있지 않은가?

정춘숙 대표는 매우 착잡해 했다. 우근민 전 지사를 영입하려 했던 당사자가 하필이면 자신과 같은 해에 학생운동을 시작한 김민석 최고위원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그는 불현듯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운동권 역시 여성문제를 대하는 태도에서는 별다를 바가 없어요."

여성문제를 홀대한 1980년대

그가 대학에 입학한 1982년은 엄혹한 시대였다. 어렸을 적 '소망'대로 그저 소설가가 되고 싶어 단국대 국문과에 진학했던 문학도로서, 그가 처음 사회과학 공부를 시작했던 이유는 단지 '소설을 잘 쓰고 싶어서'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그를 문학도로만 잡아두지 않았다. 1980년 5월의 광주이후 아직 세상은 '광주의 광자'도 언급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엄중했지만, 그럴수록 세상을 바꾸어내고자 하는 열망은 더욱 커져만 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는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986년 2월 대학졸업과 함께 그 유명한 '서노련'의 일원으로 노동현장 속으로 투신해 들어갔다. 1986년 7월 구로지역에 있는 '오트론'에 입사하여 1988년 3월에는 꿈에 그리던 노동조합을 만들어냈지만 곧바로 해고당하고 말았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이 맞아본 적은 처음"이라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구속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나온 그는 다시 노동현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경찰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그는 그의 '꿈'이었던 노동현장 속으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취업하고 나면 바로 해고되는 것을 4, 5차례 반복한 끝에 그는 결국 현장 취업을 포기하고 만다. 대신 그가 취업했던 곳은 당시 기아자동차 협력업체의 노조위원장들로 구성되어 있던 안산자동차노동자협의회였다. 그는 이곳에서 간사로 1991년 9월까지 일을 했다.

"이상하게 기구운동(총학생회, 민노총 등 연합기구)을 하기는 싫었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이론투쟁은 아주 싫어했는데, 그것에 질려 버렸는지 머릿속에는 온통 현장에 대한 생각뿐이었어요."

그 역시 당시에는 여성문제를 사회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자연스레 해소되는 문제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자신이 '여성'임에도, 그래서 막연하게나마 언젠가는 '여성운동'을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음에도, 그는 사회의 최전선에서 우리 사회의 큰 모순부터 우선 해결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남성중심의 조직, 그리고 '여성의전화'

그러나 그에게도 고민은 많았다. 여성인 그가 몸담았던 노동운동은 남성중심의 조직문화가 고착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여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바뀌면 여성문제도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과거의 전력 때문에 현장에서 자꾸 해고되는 것도 그의 고민을 깊게 만들었다. '평생 무슨 일을 하고 살까?'하는 근본적인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시작된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많은 고민과 고통 속에서 불현듯 '도대체 여자가 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싹터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성노동자회에서 일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 3일 동안이나 전화를 받지 않는 거예요."

그러던 중 함께 소모임(소설반)을 하던 친구로부터 '여성의전화'에서 활동가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뭐, 한 번 해보지'하는 생각이 솟아나기도 했다고 한다.

"상담파트와 홍보파트 중 상담파트를 선택했어요. 현장의 경험을 중요시하고 있었으니까요."

1992년 6월,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고 시작한 '여성의전화'에서 그는 지금까지 꼬박 19년을 일해오고 있다. 그리고 2009년 2월부터는 상임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다른 방식, 다른 활동

"처음 1년 동안은 적응이 안 돼 갈등이 많았어요. 6개월 동안은 아주 심했고요."

무엇보다 노동운동과는 다르게 뚜렷한 조직대상이 없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을 의식화하고 그래서 노조를 만들거나, 운영하는 방식과 달리 '여성의전화'에서는 참고, 또 참다가 끝내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그것도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겨우겨우 전화를 걸어온 '벼랑 끝'에 올라선 1인의 여성과 통화를 해야만 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지금 뭐 하고 있냐?'는 옛 동료들의 힐난도 그를 힘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일할) 자리를 만들어 놓았으니 다시 (노동운동진영으로) 돌아오라는 강권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갈등 속에서도 '여성의전화'에 꿋꿋하게 남아 있었다.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대상화할 때 분노를 많이 했어요. 사람을 살리자면서, (사람을 죽이는) 그런 세상을 바꾸자면서, 어떻게 그 사람들을 대상화할 수 있는지, 분노할 수밖에 없었어요."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었다. 물론 여성운동도 여성들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그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이런 고민 때문에 도대체 운동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근본적인 고민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한다. (대상화된) 사람들의 주체성을 무시하면서 그들을 위해 세상을 바꾼다는 운동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여성의전화'에 몸담아오면서 그는 미흡하나마 해답의 단초를 얻었다고 했다.

어린이날 가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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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평등하다는 명제를 구체적인 현실의 과정 속에서 어떻게 실현시켜나갈 것인가? 중요한 건 바로 그거예요."

말로만 운동의 주체를 운운할 것이 아니라 실제의 운동과정에서도 서로가 동등한 주체로서 결합해야 한다는 것. 여성주의 상담원칙은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확립된 것이었다.

여성주의 상담원칙

"보통 상담을 하게 되면 상담자(전화 받은 사람)와 내담자(전화한 사람) 사이에 자연스럽게 위계질서가 자리 잡기 마련이에요. 그러나 이러한 위계질서가 성립되고 나면 제대로 된 상담이 이루어질 리가 없어요. 내담자가 상담자를 반신반의하는 상태에서 자신의 고민을 솔직담백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으니까요. 흔히 여성들의 장점이라 일컫는 '공감'이란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동등한 관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에요."

'여성의전화'에서는 상담자를 상담전문가, 그리고 내담자를 '자기문제 전문가'로 부르고 있다(평등주의 원칙). 상담자가 아무리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문제에 정통할 수는 없는 법. 그리고 자신의 문제는 자기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밖에 없다는 원칙 하에서 내담자(자기문제 전문가)는 상담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문제(삶) 속에서 사회문제(모순)를 발견하게 되고, 또 그러한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 주체적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상담자와 내담자는 서로의 (동등한) 관계 속에서 함께 성장해 나간다.

"내가 중심이라는 생각을 가지고서는 제대로 된 상담을 할 수가 없어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문제 전문가'이듯이 세상의 중심은 하나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수만큼 그렇게나 많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한 때 몸담았던 노동운동의 중심성 태제를 부정한다. 노동운동의 중심성을 이야기하는 순간 다른 모든 것은 아주 사소한 문제로 취급되고 말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여성의전화'에서는 여성들 개인개인의 직접적인 삶의 경험, 그 자체를 매우 중요시한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직접적인 삶의 경험 속에는 이 세상의 모순구조가, 그리고 그것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동력)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주의 상담원칙의 제1의 원리는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란 명제가 될 수밖에 없다. 세상의 커다란 대의를 위해 나의 사소한 삶을 희생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직접적인 삶 속에서 이 세상과 미래 세상의 모습(단초)을 발견해 나가는 것. 개인들의 직접적인 삶의 모습 속에서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그래서 매우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함께 (운동을 통해) 해결해 나가는 것. 바로 이것이 그가 몸담고 있는 '여성의전화'의 여성주의 상담원칙인 것이다.

"노동운동의 중심성 태제에 사상 처음으로 문제제기 한 것, 바로 그것이 여성운동의 공로였던 것이죠."

그를 움직이게 하는 힘, '삶'

"상담을 하면 여성들의 살아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그들의 삶의 문제와 직접 접촉하게 되는 거지요. 매우 고통스럽고, 그래서 분노를 느끼게 되지만 그것에서 에너지를 받는 것 같아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여성들의 현실 앞에서 '도대체 왜 이런 거야?'하는 분노가 힘이 되어, 여성의 현실과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동력이 되어주는 거죠."

정춘숙 대표는 상담을 통해 그가 직접적으로 접해온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삶이 그를 지금까지 '여성의전화'에서 활동해오게 해준 힘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남자들은 (운동권을 포함하여) 여성들의 삶을 모른다.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취업이나 진급과정에서 차별을 받는 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현실인지, 남편이나 애인에게 폭력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남자들은 잘 모른다는 것이다. 당하는 여성들에게는 그것이 평생을 좌우하는, 일생일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일 수 있음에도 남자들에게 그것은 아주 사소한 일로 치부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평등한 세상, 정의로운 세상을 원한다면서 어떻게 이런 문제들을 외면할 수가 있지요?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들을 함께 해결해가야 함에도 이런 문제들을 사소한 문제로 취급하면서 외면한다는 게 저는 이해가 안 돼요."

그러면서 그는 최근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낙태시술을 하는 산부인과 병원 세 곳을 고발조치(지난 2월3일)하면서 불거진 '낙태'문제를 예로 들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수많은 낙태 건수 중 약 90%이상은 사회경제적인 이유로 발생하고 있어요. 강간이나 미혼의 경우 또는 결혼한 여성 중에서도 셋째 등 원치 않은 임신(원하더라도 경제적인 여유가 없을 경우)이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즉, 우리나라 여성들은 아이를 기를만한 경제적, 사회적 여건이 되지 못해서, 결혼제도 밖의 임신이 도덕적으로 지탄받고 비난받아야 할 행동으로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낙태를 선택하고 있는 셈이에요."

또다시 여성에게 책임을 돌리는 국가

그는 여성들을 둘러싼 이러한 삶의 조건들이 변하지 않는 한 낙태는 근절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과거 낙태 금지 정책을 펼쳤던 유럽국가에서 낙태 시술을 위해 국경을 넘고, 무면허 낙태 시술 중 사망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역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회경제적인 문제들을 도외시한 채 무조건 '도덕적인 이유'로 낙태를 금지하는 것은,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삶 전체에 얼마나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잘 모르는 '남성'들의 이기적인 세계관일 뿐인 것이다. 임신을 하면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하는 처지에서, 그리고 현재의 경제여건상으로는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처지에서 과연 여성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남성은) 여성에게 원치 않는 임신을 강요해선 안 된다. 낙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여성 자신이 선택할 문제인 것이다. 낙태를 금지하기 전에 사회적으로 여성들이 피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평등한 관계가 가능해야 하고, 또한 비혼 여성의 임신과 출산 그리고 한 부모가족 아이에 대한 사회의 따가운 시선과 차별이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 없이 국가의 형벌권만 강화하여 낙태를 근절하겠다는 주장은 무면허 시술자에 의한 위험천만한 낙태시술만 증가시켜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물론, 결국 여성의 몸 권리(임신과 출산의 자유)에 대한 침해로 이어질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문제는 낙태를 묵인하고 방조하면서 1960~70년대 아이를 적게 낳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국가고, 이제 와서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애국이고 낙태가 불법이라고 새삼스레 얘기하는 것도 역시 국가라는 거죠. 둘 다 여성의 몸을 인구조절의 도구로 대상화한 것인데, 과거 국가정책의 잘못에 대한 단 한마디의 사과도 없이 다시 프로라이프 의사회에 기대어 자신들의 저출산 대책을 낙태금지로 이어가려는 정부의 태도를 보면 너무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여성들의 삶에서) 이렇게 중요한 '낙태'문제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아직도 여성들의 '문제'를 아주 사소한 문제로, 정의로운 세상이 된다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로 보고 있는 거예요."

그의 바람, 그리고 '희망과대안'

"어떤 모양보다는 실제를 중시하는 성격이라 처음 '희망과대안'에 참가제의를 받았을 때는 좀 망설였어요."

그러나 그는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에서 선거연합을 통한 연합정치를 실현해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 '희망과대안'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름을 올려놓았으면 열심히 활동해야 하는데 '여성의전화' 쪽 일이 너무 많아 아쉽기도 하고 또 미안하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누군가 한국 사회의 변화, 발전을 위해 지금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말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미래의 사회상에 대해 최근 '무상급식' 등 복지국가론이 등장하고는 있는데, 누군가 정리해서 말해 주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어요. 지난 세기 동구의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몰락하고 난 뒤 많은 혼란을 겪었는데, 혹 '희망과대안'에서 그 일을 해줄 수 있을는지, 지금이야 6월의 지방선거에 집중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희망과대안' 또는 그 회원들은 우리 사회에 대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해요."

그는 '희망과대안'이 현 정치현안에 대한 대응(연합정치 실현)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장기적인 비전제시에도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그렇다고 그가 당장 눈앞에 떨어져 있는 현실의 문제에 눈감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성부를 없애려고 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 이명박정부 들어 여성정책은 아예 사라지고 말았어요. 이명박정부에 '여성은 없다'고 봐야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성들이 6월 지방선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여성의전화'에서도 고민해볼 생각이에요. 4월부터는 정치가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지역모임에서 논의를 시작할 예정이고요…… 알고 있는 만큼 실천을 해야죠. 그래야 세상에 변화가 일어나는 법이니까요."

그는 그 바쁜 와중에도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의 바람이, 그의 희망이 이번 6월에는 '희망과대안'과 함께 모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태그:#정춘숙, #희망과대안, #여성의전화, #선거연합, #야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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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대안은 대안적 메시지 생산 등을 통해 민주주의의 균형회복과 좋은 정치세력 형성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2009년 10월 19일 학계, 종교계, 시민사회 인사 113명이 참여하여 창립된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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