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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밝고 씩씩한 청소년들이었다. 그러니 더욱 고민이었다. 이 친구들의 집안 형편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쉽지 않은 인터뷰에 응해 준 그들에게 무심한 표현으로 상처를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생각다 못해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고민을 털어놨다.

먼저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부끄러운 것 아니냐"는 답이 나왔다. 백 번 맞는 말이다. 허나 돈에는 마냥 후하고 사람에게는 박하기 그지없게 보이는 세상이다. 다른 친구 걱정도 그랬다. "나 스스로는 창피하지 않지만, 솔직히 어떤 반응이 나올지 걱정"이라고, "왜곡된 시선이 신경 쓰인다"고 했다.

그래서 다소 길더라도, '들은 그대로' 표현한다. 수업료 밀린 일은 아직 없지만, 납부기한이 신경 쓰인다. 대학 등록금 마련하려고 밤에 대리운전까지 하는 아버지가 눈에 밟힌다. 객관적으로 종합하면 해외 여행은 잘 사는 집 친구들 이야기로만 알았던 청소년들이다.

희망여행의 위기...자원봉사 나선 예쁜 학생들

2008년 동북아희망여행 중 발해 성터를 바라보는 학생들. 서울시교육청이 지원한 당시 여행에는 25개 중학교, 총 30명의 학생들이 참가했다
 2008년 동북아희망여행 중 발해 성터를 바라보는 학생들. 서울시교육청이 지원한 당시 여행에는 25개 중학교, 총 30명의 학생들이 참가했다
ⓒ 동북아평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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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김인경(17·여·월계고2)·배규창(16·남·월계고1)·양현준(15·남·선정고1). 이들의 공통점은 2008년 '동북아희망여행'을 다녀왔다는 것이다. 연해주, 연변, 백두산 등을 다니면서 역사 유적지를 견학하고 고려인 가정에서 홈스테이도 하는 여행. 잘 살지 못하는 환경의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자는 취지로 동북아평화연대(아래 '동평')가 2007년부터 시작한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이 의미 있는 여행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무산될 위기에 놓여 있다. 금융 위기로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기업 협찬이나 관공서 지원 등 예산 마련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에 '동평'은 대중들의 자발적인 후원을 직접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로 했다. 소액 다수 모금이란 '장기 레이스'로 전환한 셈이다.

그 출발점이 5월 1일 열릴 '2010 오마이뉴스 강화 바다사랑 마라톤대회'다. 대회를 통해 동북아희망여행을 참가자들에게 알리고, 모금 봉사도 하는 마라토너를 모집하고 있다. 캠페인 이름은 '희망 Up-Go 건강 Up-Go', 말 그대로 달리는 기쁨과 함께 좋은 일을 하는 흐뭇함도 느껴보자는 뜻이 담겨 있다.

기특한 것은 이 소식을 접한 동북아희망여행 '선배' 학생들의 반응이다. 기꺼이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자신들이 누렸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고 한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시들지 않는 싱싱함, 반가웠다. 그렇게 적극적인 이유도 궁금했다. 학생들을 <오마이뉴스>로 초대한 것도 그래서였다.

대자연의 품도 좋았지만 "완전 친할머니 같았고, 진짜 가족 같았어요"

말 잘하는 김인경 학생이었지만, 사진촬영에는 소극적이었다. 한사코 민망하다는 데야 … 그의 꿈은 임상심리사다
 말 잘하는 김인경 학생이었지만, 사진촬영에는 소극적이었다. 한사코 민망하다는 데야 … 그의 꿈은 임상심리사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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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서로 안부를 묻지 않았다. 자주 만나는 모양이다.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모인다"고 했다. "싸이에 클럽을 만들어 정모 때면 열 몇 명씩 모인다"고 했다. 2008 동북아희망여행 참가 학생이 모두 30명이니 적지 않은 숫자다. 틈만 나면 눈웃음을 주고받는 모양새가 꽤나 친한 눈치다.

먼저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을 물어봤다. "집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나게 만든 아름답고 드넓은 벌판, 발해 옛터", "그렇게 별이 많이 떠 있는 건 처음 봤다"는 말도 나왔다. 규창 학생은 백두산 천지를 꼽았다. "엄청 멋있고,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대자연의 품만큼이나 그리운 사람, 고려인 친구들.

양현준 : "연해주에서 고려인들과 하룻밤 잤는데 참 신기했어요. 말이 잘 안 통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고, 너무 재미있게 놀았어요. 어색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편했어요. 내가 말을 잘 못해서 계속 혼자 어색하게 있을 줄 알았는데, 같이 갔던 친구들과도 금방 친해지더라고요. 너무 좋았어요."

배규창 : "같이 카드놀이도 하고, 막 같이 과자 같은 걸 먹고 하다 보니까, 너무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완전 친할머니 같고, 진짜 가족 같았어요. 같이 갔던 사람들도, 친구든, 형이든, 누나든, 다 잘 해줬어요. 서로 의지하다보니 금방 친해진 것 같아요."

김인경 : (지금도 그리운가 묻자) "너무 그리워요. 우리끼리 만나면 항상 하는 이야기가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기회 닿으면 꼭 다시 가고 싶어서 저희끼리 통장도 하나 만들었는데요. 한 달에 5천원씩이라도 각자 모아서 나중에 여행을 가자고. 그리고 돈이 남으면 다른 아이들도 갈 수 있게 후원금 내자고요."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 예전에는 취미도 없다고 썼었는데

인터뷰 내내 수줍은 웃음으로 애타게 만들었던 양현준 학생. 봉사 활동에 열심인 그의 꿈은 훌륭한 요리사다
 인터뷰 내내 수줍은 웃음으로 애타게 만들었던 양현준 학생. 봉사 활동에 열심인 그의 꿈은 훌륭한 요리사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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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모르는 이들과 쉽게 마음을 열었던 경험을 무척 소중하게 여기고들 있는 듯 했다. 자연스럽게 '더불어'의 가치에도 눈을 뜬 것일까. 학생들은 "다시 간다면 여행보다는 봉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물론 인터뷰를 의식한 '립 서비스'일 수도 있다. 여행을 계기로 스스로 변한 점이 무엇인지를 들어봐야 했다.

김인경 :"변한 것 있어요. 그 전에는 학내 행사라든가 무슨 모임이 있어도 '귀찮아 그러면서 안 하고, 나랑 어차피 별로 상관없잖아'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적극적인 자세가 됐다고 할까. 꿈에 대해서도 그 전에는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좀 막연했는데, 목표로 향하기 위한 준비들을 구체적으로 하게 된 것 같아요. 이렇게 현준이처럼 소극적인 아이도(웃음), 좀 변한 것 같고."

양현준 : "학교에 처음 들어가면 취미 이런 거 쓰잖아요. 예전에는 없다고 썼어요. 고등학교 들어와서는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내가 뭘 잘 하는지, 취미가 뭔지, 생각 잘 안 했는데, 여행 다녀오면서 내 자신에 대해서 좀 알게 됐어요.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좀 더 나를, 나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 같아요."

배규창 : "저는 다른 것보다도, 형들이랑 누나들이랑 같이 여행 다녀왔더니, 앞으로는 어떻게 선배들을 대해야 더 예쁨 받을 수 있는지 잘 알게 됐어요(웃음). 그리고 그 전에는 고려인이나 조선족, 우리나라 사람 같지 않고, 별개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러시아나 중국 이야기 나오면 관심을 갖게 돼요. 한 번씩 읽어보고, 생각도 해 보고 그래요."

"저희도 도움을 받았으니까" "나 이제 무조건 달려야 돼"

쾌활한 성격의 배규창 학생. 얼마 전 영화 '분노의 역류'를 보고 소방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멋있고 남들한테 도움도 줄 수 있으니까"는 말이 씩씩했다.
 쾌활한 성격의 배규창 학생. 얼마 전 영화 '분노의 역류'를 보고 소방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멋있고 남들한테 도움도 줄 수 있으니까"는 말이 씩씩했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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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동북아 여행을 '강추'하겠죠?
배규창 : "당연하죠. 누구든 한 번 갔다오면 좋을 거라 생각해요. 러시아 같은 곳은 애들이 잘 가지 않으니까, 색달라서 더 괜찮았던 것 같아요."

김인경 : "역사에 관심 있는 학교 선배한테도 추천해줬었는데요. 해외 자주 나갈 수 있는 학생보다는, 그렇게 하기 힘든 학생, 아무래도 가정 형편이 안 좋다든지 그런 학생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어요."

양현준 : "돈 많은 사람들은, 그냥 돈만 있으면, 자기가 가고 싶은데, 자기가 보고 싶은 거 다 보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그냥 우리나라에만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기회를 통해 다른 나라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 그래서 마라톤대회에서 자원봉사 하기로?
김인경 : "처음에는 마라톤 너무 힘들다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무엇보다 좋은 기회인 것 같았고, 또 저희도 뭔가 도움이 되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도움을 받은 입장이니까요. 흔쾌히 하기로 했어요."

배규창 : "이야기 듣자마자 참여하고 싶었어요."
김인경 : "규창이는 10km 뛰기로 했어요."
양현준 : "이제 빼도 박도 못 하겠다(웃음)."
배규창 : "나 이제 무조건 달려야 돼(웃음)."

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규창 : "선생님들한테도 동평 여행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런 식으로 어른들에게 알리려고요. 제가 뛴 걸로 인해서 다른 아이가 한 명이라도 갈 수 있다면, 저는 계속 뛰고 싶어요(웃음). 제가 했던 경험을 다른 애들도 느낄 수 있게 해 주고 싶어요. 진짜!"

속으로 감탄했다. 멋있다! 힘없는 사람에게는 박하게만 보이는 세상을 품으려고 하는 어린 친구들, 그들의 웃음이 참으로 맑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하는지가 말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속 좁음이란.

양현준 : "돈이라고 생각해요. 돈 있으면 그래도 자기가 하고 싶은 거 잘 할 수 있으니까요."
배규창 : "가족이요. 뭐니뭐니해도 가족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그럼 현준이는 뭐가 되냐는 말에 일동 웃음)

김인경 : "남은 삶을 어떻게 떳떳하게, 부끄러움 없이 잘 개척해서 살아가나요. 돈은 없어도 행복할 수 있는 거 잖아요. 물론 쪼달리긴 하겠지만요. 누군가에게 무시를 당할 수도 있구요. 그래도 돈 있다고 막 유세 떨고 그러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끝으로 어른들에게 하고 싶은 말 있어요?
배규창 : "남을 도와준다 하면 돈으로 할 수 있는 거만 생각하지 말고, 어떤 단체에서 봉사하거나,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꼭 돈이 아니어도 남을 도와줄 수 있잖아요.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김인경 : "저도 그런 생각했었어요. 무턱대고 돈을 내놓기 보다, 좋은 취지를 느끼고 후원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후원을 안 하신다고 해도, 꼭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좋은 일이 있으니, 주변인에게 참여를 권했으면 좋겠어요."

왜 '하필' 동북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오히려 많은 곳"
참가 학생 후원 참가자와 교육 전문가가 함께 선발할 계획

왼쪽부터 배규창·김인경·양현준 학생. 모두 자신들의 얼굴과 이름 공개를 허락했다.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 동북아평화연대에서 인턴 생활을 하고 있는 나현주씨가 함께 했다
 왼쪽부터 배규창·김인경·양현준 학생. 모두 자신들의 얼굴과 이름 공개를 허락했다.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 동북아평화연대에서 인턴 생활을 하고 있는 나현주씨가 함께 했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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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리더 양성한다는 말은 많다. 하지만 그 기회는 있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 아닌가. 아예 기회를 갖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 솔직히 그동안 나 혼자 살아가기 바빴는데, 이번에 아이들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니 꼭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동북아희망여행 실무작업을 돕고 있는 나현주(23·여·국민대 러시아학과 4학년)씨의 말이다. 좌담에 동석한 나씨는 "어려운 친구들에게 무료 급식도 중요하지만, 자생력을 키워주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소감을 전했다.

우리민족 서로돕기 운동으로 잘 알려져 있는 '동평'이 '하필' 동북아를 청소년 희망여행의 최적지로 보는 것도 그래서다. 지난 달 27일, 학생들과의 좌담 이후 만난 황광석 '동평' 사무총장(사회적 기업 '바리의 꿈' 이사)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곳은 오히려 동북아"라고 강조했다.

그는 "학원 가기도 쉽지 않아 좌절감에 휩싸일 수도 있는 아이들에게 우리 민족의 삶이 서려 있는 연해주와 연변 등 동북아 지역을 탐방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큰 효과가 있겠다는 생각으로 기획했다"며 "절대적으로 사람이 부족한 대륙을 목격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자신감을 스스로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08 희망여행에 동행했던 김순한 '동평' 연해주정착지원팀 부장도 "공부만이 다가 아니라는, 그것말고도 중요한 것이 많다는 걸 느끼게 된다"면서 "그동안 관심이 별로 없었던 지역이기에 오히려 아이들은 신기함을 느끼고, 그 곳에도 기회와 꿈이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동평 여행의 가장 큰 특징은 직접 몸으로 부딪쳐 보는 것이다. 고려인 가정에서 민박하면서 친구들도 만들고 함께 김밥이나 유부초밥도 만드는 기회를 갖는다. 아이들의 뜻에 따라 스스로 지도를 들고 도시를 탐험하는 '필드워크' 역시 중요한 프로그램 중 하나.

2008년의 경우 7월 27일부터 8월 6일까지 10박 11일 동안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중국의 연길, 용정 등을 거쳐 백두산 천지를 여행했다. 윤동주 생가나 강제 이주지역 등을 돌아보는 역사 탐방, 여행 틈틈이 현지에서 역사·문화 특강도 함께 진행됐다.

현재 '동평'은 2008 희망여행을 기준으로 학생 30명을 참가시킬 수 있는 후원금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에게 우선권을 준다는 원칙. 후원 참여자는 물론 교육 전문가와 함께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참가 학생을 선발할 계획이다.

더 자세한 정보나 후원에 관심이 있다면 '동평' 홈페이지(www.peaceasia.or.kr)를 참조하면 된다.


태그:#청소년, #고딩, #여행, #동북아, #동북아평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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