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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지난 10년 최고의 책> 특별기획을 진행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전문가와 시민기자, 누리꾼 패널들이 뽑은 <지난 10년간 최고의 책>을 기본 자료로 삼아, 선정자문위원회의 자문 그리고 누리꾼 투표 등을 거쳐 <지난 10년간 최고의 책> 10권을 선정해 최종 결과를 5월중에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와 더불어 <지난 10년간 최고의 책> 서평 기사를 공모해 좋은 기사로 선정된 경우 소정의 특별원고료(사이버머니)를 지급합니다. [편집자말]
나는 전공이 두 개다. 어설픈 생각이었지만 어릴 적 동양의 지식인이 갖춰야 할 세가지의 학문적 영역을 다 섭렵하고 싶다는 욕심을 냈었다. 이른바 문사철(文 史 哲) 철학과 역사학을 공부하고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지겠다는 꿈. 대학시절 사회가 부조리하다고 느꼈지만 그런 일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시각이 너무 편협했다.

그리고 소위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교수들은 좁은 학과의 성 안에서 사회적 목소리 한번 내지 않는 무능한 존재로 비춰졌다. 사회운동에 직접 뛰어들기도 싫었고 불의에 침묵하는 무책임한 지식인도 되기 싫었다. 20대의 시간은 미래에 대한 불안함으로 가득했다. 그 시절. 실지로 우리사회에서 문사철의 영역을 넘나드는 교양인, 그 지식으로 사회에 공헌하는 지성인이 되겠다는 꿈은 공상에 불과했다.

최근 스탠포드 대학의 졸업생들에게 한 스티븐 잡스의 연설은 그 젊은 시절의 꿈을 다시 되짚어보게 만들었다.

"미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재 자신이 믿고 있는 의지에 기반한 사건들이 서로 연결되어 미래를 결정한다."

나는 직업적 동물보호운동가가 되었고 최초로 내 인생을 던져 하고 싶은 일이 되었다. 누군가 동물보호운동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전공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굳이 말하자면 인간사회를 분석하는 사회과학적 방법론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하는 인문학적 성찰 그리고 그 대상인 동물을 이해하는 과학적 지식. 그리고 사회시민운동영역에서의 경험. 동물보호운동은 이론이며 실천이고 종합적 학문과 경험체계로 발전한다.

동물보호운동과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학문이 발전하면 분과학문도 발전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분과 그 자체에 매몰되면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결여된다. 그리고 더더욱 문학과 철학과 역사학이라는 학문의 종합과 통합이 내 일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과거의 점들이 연결되어 현재의 내가 되었다. 이런 나의 목마름을 채워준, 지난 10년간 나를 가장 뒤흔들어놓은 책은 단연코 최재천과 도정일의 <대담>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인문학자와 과학자가 만나 나눈 이야기들. 내가 방황하며 고민하던 것은 나만의 고민이 아니었다는 반가움.

왜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만나야 하는가?
                       

도정일, 최재천의 <대담>
 도정일, 최재천의 <대담>
ⓒ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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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안철수의 부인 김미경씨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김미경 교수는 의사 출신으로 불혹의 나이로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쿨을 전공하고 돌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 성공한 의사가 전공을 바꿔 다른 공부를 했을까?

"의학 분업 사건이 났는데 연구실에서 공부만 하던 동료의사들이 제대로 자신의 의견조차 말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의사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실험실에서의 윤리 역시 더욱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다라는 설명과 맥을 같이 한다. 김 교수는 카이스트에서 생명윤리 등을 강의하고 있다. 이런 방식의 사고가 바로 통섭이다.

통섭이란 21세기 들어 학문분야에 불고 있는 통합의 경향을 의미한다. 점차 환원주의적 분과학문으로만 발전하는 학문적 경향이 새로운 사회의 진리추구에 맞지 않다는 자각. 1996년 <통섭>(consilience)을 쓴 에드워드 윌슨은 19세기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의 'consilience' 개념을 부활시켰다.

이 용어는 라틴어 consiliere에서 온 것으로 con은 with, salire 는 to leap 즉 '뛰어오르다'는 뜻이다. 즉 "서로 다른 현상들로부터 도출되는 귀납들이 서로 일치하거나 정연한 일관성을 보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통섭>은 최재천 교수가 번역하면서 "사물에 널리 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원효의 화엄사상과 기철학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를 차용해왔다.

굳이 쉽게 설명하자면 학문의 분화로 인해 학문의 원래 목적인 진리추구에서 벗어나게 되는 현상이 벌어지자 이를 통합하려는 학문적 경향을 의미한다. 도정일과 최재천이라는 우리 사회 최고의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가 만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사회적 자연적 현상을 목격한다. 그런데 그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수많은 오류에 빠지게 된다. 황우석 사건은 생명공학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국가주의 시장주의와 결합해 빚어낸 최대의 해프닝이었지만 그것은 해프닝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대학이 기업의 인력배출공장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인문학과 자연과학 등 순수과학은 그야말로 똥취급을 받는 우리사회에서 이미 예견된 일이다. 기술만 있으면 문화산업이 되는 줄 알고 촬영술이나 특수효과, 실용적 기술 위주로 가르치라고 기술 관료가 학자들에게 지시까지 내리는 사회, 논문 편수가 많이 쏟아질 수 없는 인문학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교수의 능력을 논문편수로 평가하는 사회, BT 가 IT를 대체할 것이라며 새로운 바이오산업의 특허로 돈방석에 앉게 만들 미래산업에만 가치를 투자하려는 사회, 공학적 가치만이 인정받는 사회에서 철학이야말로 쓰레기같은 학문이며 수년 동안 앉아 개미를 관찰하는 동물학자는 연구비나 축내는 비효율적 인간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동도서기를 외치던 양무운동도 조선후기의 실용적 관료들도 서양의 눈부신 기술이 순수과학,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문화, 사고방식 절차가 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서양문화에서의 과학이란 근본적으로 정신활동의 자유, 탐구와 비판, 검증과 논박의 자유를 허용하고 존중하는 문화를 의미한다.

과학보다는 기술이, 연구보다는 정치가 인정받는 사회에서는 토대가 되는 학문의 긴 성과보다 서양과학 기술의 결과물만이 달콤한 열매로 보였다. 학문은 발전하면서 분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분과학문이 고도로 발달한 서구라고 해서 인문학이 경시되지는 않는다.

단기간에 돈이 되지 않고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순수과학이 가진 저력은 인정된다. "동양학의 최고 메카는 중국의 북경대학이나 일본의 동경대학이 아니다. 하바드 대학의 옌칭도서관이다"라는 말이 동양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떠돈다. 제국주의자들의 간악한 음모만이라고 할 것인가.

진리는 학문의 울타리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들로부터 동양학의 자존심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우리도 그만한 투자를 해야 한다. 이집트가 실용적인 측량술만을 발전시킬 때 그것을 기하학과 수학으로 발전시켰던 것은 그리스인이었다. 마당에 앉아 수학도식을 풀다 로마병정으로부터 칼을 맞은 아르키메데스는 마지막으로 "그 그림에 손대지 말라"고 외쳤다.

그의 무덤에는 원통에 원구를 넣은 석조 구조물과 함께 "원통의 내면적과 원구의 면적 비율은 3대2다"는 그의 수학적 발견이 묘비명으로 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런 실용성도 없는 이런 추상적 사고가 눈부신 과학기술발달의 밑거름이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깡그리 무시되고 있다.

학문분과 간의 울타리가 높은 것은 한국대학이 최고 수준이다. 그것을 이 두 학자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문제는 우리 사회 전공의 순수성과 정통성에 대한 강한 집착과 영토수호에 대한 집착이다. "우리는 외침을 많이 받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밑에 붙어있는 "우리는 단일민족이다"라는 문장은 진화론을 공부한 과학자에게는 매우 어처구니 없는 억지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 학문의 영역에서 불가침이란 없다. <통섭>(Consilience)에 있는 최재천 교수의 서문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진리의 행보는 우리가 쳐놓은 학문의 울타리 따윈 거들떠보지 않는다. 학문의 경계란 자연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진리의 궤적을 추적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것이다."

우리 사회의 현재를 보기 위해 모더니티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더니티라는 말에는 시간적 근대와 비시간적 근대성이라는 개념이 다 들어있다. 정치영역에서 근대가 의미하는 것은 인본사상 민주주의 보편인권 등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시간적 근대를 지나왔지만 정치적으로는 근대를 산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적 제도는 갖춰졌으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파벌 학벌 연줄 서열 신분의식이 팽배하다. 사회적 합리성을 점수로 내자면 아주 형편없는 점수이다. 잘 되는 놈부터 밀어주자는 분위기, 일등만을 인정하는 사회, 경쟁과 갈등을 부추기는 사회에 진화론은 이렇게 반박한다. 진화는 목적도 방향도 없다.

다음 세대에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예견하여 일을 하는가? 이것은 분명히 다양성을 축소시키는 방향이다. 미래 사회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 그 사회에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에 투자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시각과 관점의 차이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충돌은 갈등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다윈의 진화론으로 절대적 신으로부터 창조된 인간이라는 진리를 흔들었다. 인간의 조상이 침팬지라는 것은 인간도 동물이며 자연생태계의 다양한 진화과정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사고의 출발점이었다.

확실성과 완전성의 추구를 목표로 삼았던 근대과학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 이론으로 깨졌다. 객관적 실재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부분들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불가능했다. 중요한 것은 다윈으로 인해 종교가 무너지지 않았고 과학도 파괴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학문 간의 만남이 중요한 이유는 더 있다.

인간의 과학적 진리추구는 본성적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인문학적 자각이 없는 과학발전은 그 파국을 예견할 수 없다. 미끄러진 경사이론이 그것이다. 평범한 체세포와 핵이 제거된 난자만 있으면 생명복제가 가능한 사회. 누군가 시도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문제는 복제 과정에서 나타난 결함 있는 존재는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왜 이런 근본 질문을 던지지 않는가?

복제기술이 우생학과 결합한다면 또하나의 사회계급과 차별이 생겨난다. 이는 사회적 혼란에서 그치지 않는다. 진화의 가장 큰 성과는 생명의 다양성이다. 알을 많이 낳는 우량종만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유전적으로 단일화된 종은 면역체계가 열악할 수밖에 없다. AI 라는 바이러스가 발병하면 인근 농장의 닭까지 모두 살처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쁜 유전자를 버리고 좋은 유전자로 갈아 끼우는 과정에서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지극히 취약한 집단이 된 것이다.

인간의 몸과 돼지의 몸이 비슷하다고 돼지의 심장을 인간에게 이식하면 어떻게 될까. 하루를 살 인간이 일주일 생명을 연장했다고 과학기술의 승리라고 자축할 것인가? 일주일 생명연장이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회적 영향은 없을까. 돼지에게 내재된 바이러스가 이후 인간에게 어떻게 발현될 것인가.

우리는 수억의 예산을 들여 이종장기를 연구하며 왜 이런 근본 질문을 던지지 않는가? 우리는 DNA의 구조를 밝혀냈을 뿐 그것이 하나하나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우리는 아직 인간에 대해 많은 부분을 모르고 있다.

최재천 교수의 표현대로 과학은 매우 어려운 학문이다. 왜 인간은 그렇게 오만한가? 생물학은 죽음에 대한 학문이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 인간의 유한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혼불멸의 꿈을 부추기며 생명연장을 실현한다면 그 사회는 행복한가? 200년 이상 사는 노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세금폭탄을 맞고 있는 젊은이들이 폭동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에얼리언과 터미네이터가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재현된다면 그 사회가 과연 행복한 유토피아인가?

차이를 넘은 소통,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공통점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에도 갈등은 있다. 다윈은 당시 빅토리아 시대의 분위기 때문에 자신의 이론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까 고민했다고 한다. 따라서 책을 출간하기 전 다른 사람과의 토론이나 중간점검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이후 소위 다윈의 전도사들은 다윈의 이론을 자기식대로 해석해 이용했다.

약육강식의 자연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 생물학은 오해되고 왜곡되었다. 최근의 사회진화론이 등장했을 때 가장 반발한 것은 페미니스트였다. 사회진화론의 논리를 그대로 보면 남자들의 바람기는 자연스러운 것처럼 받아들이기 쉬웠다.

그러나 최재천 교수는 이것이 사회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측면이라고 한다. 사회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남성은 무해한 존재일 수 있다. 암컷으로만 되어 있는 종은 있어도 수컷으로만 되어 있는 종은 없는 진화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손과 이 자손을 생성하는 여성이지 남성이 아니다.

남성중심 신화는 그저 남성이 권력쟁취를 위해 만들어진 허구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또한 사회진화론 관점에서 보면 생물학=유전학이라는 도식 역시 오해이며 인간이 만든 사회 질서 또한 진화의 산물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다른 존재가 아닌 인간일 수 있는 기반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인간이 역사 속에서 목적과 이성을 세우고 계획을 짜고 실현시키려고 노력해온 정치적 윤리적 개입은 무엇인가? 라는 인문학자의 질문이 그것이다.

차이는 있으나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시선은 고도경쟁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질문을 던져준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며 그를 향한 애정 어린 시선이다. 도정일 교수는 인문학의 소양을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으로 평가한다. 대립 모순적인 것이라도 공존할 수 있도록 세계를 넉넉히 하는 두터운 세계를 위한 윤리학. 또한 최재천 교수는 알면 사랑할 수 있다고 한다.

세계에 대한 무지가 파괴와 공포와 폭력을 낳는다. 무목적의 진화가 반드시 진보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알면 그 존재를 바라보게 되고 이해하면 품고 함께 공존할 수 있다. 단 한치 미래를 알 수 없는 현재에 서서 진화를 더 평화롭고 정의로운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이 보일 것 같다. 돌아서 가는 길은 없다. 진리의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길이 보이면 그대로 가는 것이 정답이다.


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도정일.최재천 지음, 휴머니스트(2015)


태그:#인문학, #자연과학, #통섭, #진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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