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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무렵, 옆자리 이 기자의 모바일 전화벨이 울립니다. 성능이 워낙 좋아 듣지 않으려해도 상대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의 아내입니다. 저녁 반찬에 자신이 있는 듯 남편의 퇴근 시간을 묻는 아내의 음성이 경쾌합니다.

"응, 지금 막 가려고, 그래? 그거 내가 열나게 좋아하는 거잖아. 지금 바로 갈게."

기분이 좋아진 이 기자는 속어까지 섞어가며 아내의 비위를 맞춥니다. 평소에도 비슷한 시간이면 이 기자의 올말졸망한 두 아이가 퇴근길에 치킨이나 햄버거를 사오라고 아빠를 조르는 전화가 걸려오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자상한 아빠 '모드'로 척 하니 전환되는 거야 두 말 하면 잔소리입니다.    

이 기자의 통화에서 얼마 전  읽은 김수환 추기경의 글이 불쑥 생각납니다.

"나는 원래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어스름해질 무렵 기차를 타고 가다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초가가 눈에 띄면 가슴이 설레고 더러는 부럽기까지 했습니다. 저 오두막에서 일가족이 화목하게 살고 있겠지. 가족을 위해 하루 종일 땀흘리고 돌아온 아버지는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고, 아내는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며 저녁밥을 차리고, 아이들은 마당에서 재잘거리며 뛰어놀고, 저 집 가장은 얼마나 행복할까."

필부(匹夫)로 살지 못했던 김 추기경이 정말이지 신물나게 평범한 보통 가정의 일상을 정겹고 따스하게 묘사한 내용입니다.

사무실에 에어콘이 있으니 종일 땀흘릴 일은 없지만 그리고 퇴근 후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진 않겠지만, 아내와 아이들 속에서 행복할 이 기자가 저 역시도 은근히 부럽습니다.

물론 저도 이 기자의 아이들처럼 귀여운 슬하의 자식은 아니지만 자식도 있고 남편도 있습니다. 단지 저는 가장이 아니기 때문에 퇴근 시간에 맞춰 맛있는 저녁을 지어놓고 기다리는 아내가 없다는 점만 다를 뿐입니다.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노릇'을 그만 둔 지가 이제 겨우 넉 달째 건만 늘 신고 입던 낡은 구두나 헌 옷처럼 직장 생활이 익숙히 몸에 배던 터라 이 기자 부부의 대화가 마냥 남의 얘기처럼 생소하게 들립니다. 

집에만 있었을 때 저도 이 기자의 아내처럼 남편이 좋아하는 반찬으로 저녁상을 차려놓고 상냥하고 애교 넘치게 전화를 한 적도 있었지만, 낮에 동네 여자들하고 수다를 떠느라 저녁 지을 기운도 없다며 라면으로 때우자고 한 적도 더러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핑계거리를 만들어 어느 날은 외식을 하자고 졸라댄 적도 있었구요.

어떤 때는 그것도 귀찮아 '어디서 좀 먹고 들어와 주면 좀 좋아?' 하고 눈을 흘긴 적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 날을 빼고는 대부분 그렇고 그런 밥상을 차리고 그 밥에 그 나물을 올렸습니다. 그렇게 결혼 생활의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젓가락 한 번 더 갈 만한 반찬을 올려 남편 봉양을 살뜰히 하지 못한 것이 이제 와서 후회된대서가 아니라 김 추기경이 못내 부러워한 일상의 소중함, 옆자리 기자의 행복감을 나는 얼마나 깨닫고 살았는지, 단지 지나간 것이 그리운 것 이상의 아릿한 회한으로 가슴이 먹먹합니다.

가정을 먼저 꾸린 사람으로서 나중 사람이 알콩달콩 사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다 별식을 차리건, 라면을 먹든, 그때그때 온전히 행복할 수 있었건만 그저 시간을 무덤덤하고 무감각하게 흘려보낸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완전한 상실은 아니지만 허전함 이상의 상실의 고통과 자책도 듭니다. 다 자란 자식들이 울타리를 벗어날 때 찾아드는 책임 다한  중년의 쓸쓸함과는 또다른, 가슴시린 안타까움입니다.

아내와의 통화를 마무리하는 이 기자를 앞서 먼저 자리를 뜹니다. 억지 가을 분위기라도 내려는 듯 밤과 함께 턱하니 좌판에 앉아 있는 땡감 몇 개를 사들고 집으로 향합니다. 남편도 아직 안 돌아왔고 아이들도 없는 집에 언감생심 맛있는 저녁밥이 차려져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것이 무에그리 대수랍니까.

오늘은 걸어서 집에 돌아갑니다. 초가을(한국은 봄이지만, 제가 사는 호주는 지금 초가을입니다) 일몰의 서늘한 바람에 얼굴을 씻기며 아직 내게 남은 행복을 헤아려 볼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호주한국일보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퇴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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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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