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결혼해 독일에서 살기 시작한 후, 남편은 냉장고 없이 살아볼 것을 제안했다. 처음에 나는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지만, 그의 정성 어린 설득과 '편의 추구와 생태적인 삶'에 대한 기나긴 논의 끝에 우리는 더운 여름에만 한시적으로 냉장고를 쓰고 나머지 날들은 냉장고를 사용하지 않고 사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냉장고 없이 살아도 좋은 여러 이유를 대며 끊임없이 나를 설득하던 그의 노력에 눈 딱 감고 '설득 당해' 준 것이다. 논의가 길어지던 중 문득 '냉장고 사용을 고집하는' 나 자신의 모습과 마주했던 것이 치명타였다. '내가 생태적으로 살겠다고 말만 앞서고, 실천은 저 멀리 던져뒀었구나'하는 반성과 함께 나는 남편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의견을 조율한 끝에 냉장고 없이 살기로 결론은 내렸지만, 사실 내 속의 불만까지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다.

"보통 한국 가정에서 쓰는 몇백 리터나 되는 큰 냉장고도 아니고, 게다가 요샌 한국에서도 문 두 개짜리 더 큰 냉장고도 많이 쓴다던데....한국에선 자취생들이나 쓸 법한 한 칸짜리 미니 냉장고(내가 자취할 때 쓰던 냉장고도 이보단 더 컸었다. 에구.)가 전기를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참나....또 우린 전기도 시민이 세운 대체 에너지 단체에서 공급받고 있잖아......."

나는 틈만 나면 혼자 구시렁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신기하게도 냉장고 없이 사는 생활에 서서히 적응해 갔다.

독일의 저장공간 켈러(Keller)의 모습 우리 집 켈러에는 온갖 먹을거리가 보관되어 있다.
▲ 독일의 저장공간 켈러(Keller)의 모습 우리 집 켈러에는 온갖 먹을거리가 보관되어 있다.
ⓒ 김미수

관련사진보기


어라, 냉장고 없이도 살아지네

예전에 살던 곳에서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빵을 사기 위해 어쨌든 유기농 가게를 찾았고, 여름철에는 야채도 그날 안에 먹을 양이나 길어야 2~3일 정도 먹을 분량만 샀다. 그리고 야생허브 먹는 양을 배로 늘려, 퍼머컬쳐 가든(Permaculture Garden)에 갈 때마다 봉지 가득 각종 허브를 수확해 왔다.

서늘한 곳에서 저장해야 하는 김치, 피클, 직접 만든 과일 주스같은 것들은 켈러(Keller, 독일의 지하 혹은 반지하 저장실)에 보관했다. 겨울에는 감자, 당근, 양파 등의 기본 채소를 유기농사를 짓는 농부에게서 몇 킬로씩 사서 켈러에 저장해 놓고 이듬해 이른 봄까지 먹었다. 이 모든 것들을 켈러가 아닌, 부엌 안에 저장했다면 몇 주 지나지 않아 죄다 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니 사놓고 잊어 냉장고 안에서 상하거나 조리하다 남는 음식 재료가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한국에서 냉장고에 음식을 보관해 놓고 먹을 때보다 많은 것들을 더 신선하고 또 저렴하게 먹을 수 있었다. 또 시작은 불평과 함께했지만, 냉장고 없이 살기 버릇하다 보니, 처음 생각보다 그다지 끔찍하다거나, 야만적이지(당시에는 냉장고와 가스레인지가 문명화된 주방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않았다.

신선한 허브를 수확하기 위해 퍼머컬처 가든에 자주 가고, 장을 보러 더 자주 다녔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몸을 더 많이 움직이게 되어 건강에도 나쁘지 않았고, 사람들과의 접촉이 빈번해져 내 독어 실력 향상에도 보탬이 되었다.

독일에 온 후 맞은 첫 여름,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우리 집을 방문했던 시기에만 잠깐 작은 냉장고를 가동한 것 외에는 지금껏 냉장고를 쓰지 않았고, 재작년에 에버스발데(Eberswalde)를 떠나오면서 그 작은 냉장고마저 아예 다른 집에 줘버렸다. 이제 나에게는 냉장고에서 야채를 꺼내는 것 보다 요리에 필요한 야채를 가지러 잠깐 켈러로 향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익숙한 일이 되었다.

'켈러' 써보니 '광'이 떠오르네

어릴 적 기억을 잠시 떠올려 보면, 우리 집에도 켈러와 비슷한 공간이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이사 온 이 집에는 그 당시에 아주 흔하지만은 않던 입식 부엌이 있었는데, 그 부엌 한쪽 벽에는 아이 키 높이 정도의 조그만 문을 통해야 들어갈 수 있던 '광'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그곳을 명절에 먹고 남은 유과나 전, 홍시 같은 것 등을 보관하는 데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가 허리를 구부리고 광에 들어가서 하얀 밥 튀기를 바른 달콤한 유과를 꺼내주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집에서 숨바꼭질을 할때 가끔 광에 숨곤 했는데 그 때마다 그 안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곤 했다.

찾아보니, 광이란 살림살이나 그 밖에 여러 가지 물건을 넣어 두는 곳, 또는 그 건물과 시설을 일컫는 말로 사실은 꽤 사는 집에 달린 상당한 규모의 공간을 말한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 집 부엌에 달린 정도의 조그만 공간은 '고방'이라고 불러야 한단다. 우리집 뿐만 아니라 친구 집에도 그런 공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산업 발달에 발 맞춰 집집마다 냉장고가 들어오고, 우리집 광도 실내 욕실 겸 화장실로 탈바꿈하긴 했지만, 광은 그 시대만 해도 그렇게 생소한 공간은 아니었다는 애기다.

몇년 전까지 충북 제천에서 자급자족을 하며 사시던 최성현 선생(마사노부 후쿠오카와 요시카츠 가와구치 선생의 책을 번역해 국내에 자연농을 알리고, <바보 이반의 산 이야기>, <좁쌀 한 알: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 등의 책을 쓰기도 함.)은 집 앞 흐르는 시냇물 속에 김치통이며, 과일 봉지 등을 담가 냉장고처럼 사용하셨다. 산골이라 한 여름에도 냇물이 얼음물처럼 차가운 탓에 최 선생님 댁에서는 이 냇물이 여느 집 최신 냉장고 부럽지 않을 빵빵한 냉장력(?)을 갖춘 자연 냉장고였던 셈이다.

예전에 살던 독일 에버스발데의 어느 집은 켈러가 따로 없었던지, 겨울에는 식료품을 바구니에 담아 창문 바깥 창틀에 두었다. 아주 단순하지만, 가장 손쉬운 대안 생태 냉장고인 셈이다. 다만, 이 냉장고는 창틀이 햇빛을 직접 받는 위치에 있다면, 다소 가동이 어려운 형태라는 단점이 있다.

 텃밭 그늘진 곳에 자리한 '동굴형 냉장고'
 텃밭 그늘진 곳에 자리한 '동굴형 냉장고'
ⓒ 김미수

관련사진보기


인근에 살던 다른 지인은 텃밭 한구석 그늘진 비탈 아래에 작은 동굴형 냉장고를 설치(?)했는데, 그 냉장력 또한 나쁘지 않아서 한여름에도 늘 텃밭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마실 수 있었다. 별다른 단점이 없는 이 냉장고의 최대 장점은 연중 균일하게 냉장할 수 있다는데 있다.

내가 지금껏 본 대안 생태 냉장고 중 가장 인위적이면서도 비교적 장소에 따른 별다른 제약 없이 쓸 수 있도록 손쉽게 만들어진 것은 독일 니더 작슨(Niedersachsen) 주의 프린쯔 회프테(Zentrum PrinzHöfte)라는 생활 공동체에서 본 것이다.

공동체 일원 중 한 명이 만든 이 냉장고는 항상 바람이 통하는 발코니에 둬야 한다. 이는 외부 에너지의 아무런 도움 없이 작동되는 이 냉장고의 작동비밀이 바로 실외 공기와의 접촉에 있기 때문이다. 먼저 냉장고 형태를 잡기 위해 서너 단 정도 되는 뼈대만 있는 철로 된 비키니 서랍장을 가져다 사방을 천 하나로 둘러싼다. 날이 더울 때에는 천 한쪽 끝을 항상 물에 닿게 해 천 전체가 늘 젖은 상태로 있게 한다. 냉장고 위나 바닥에 물이 담긴 통을 두고, 천이 마르지 않도록 2~3일 정도 마다 물을 새로 부어준다.

천의 물기가 수시로 증발하며 주위의 열을 빼앗는 과정에서 온도가 낮아지는데, 이 덕에 이 냉장고 안은 달걀이나 버터 등을 신선하게 저장하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의 온도 유지가 가능했다. 겨울에는 뭐 그냥 베란다에 두기만 해도 저절로 냉장이 되니, 따로 별도의 장치가 없어도 무방하다. 내 마음대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배기가스 제로(zero Emission) 서랍식 냉장고' 쯤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대안 생태 냉장고의 최고봉, '배기가스 제로(zero Emission) 서랍식 냉장고'
 대안 생태 냉장고의 최고봉, '배기가스 제로(zero Emission) 서랍식 냉장고'
ⓒ 김미수

관련사진보기


'냉장고 없이 살기' 해보니 일석이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냉장고 없이 살아가기 프로젝트'는 켈러가 없었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뒤로도 우리는 두어 번을 더 이사했는데, 우리가 집을 구할 때 보는 첫째 조건은 켈러가 있는지 여부이다. 켈러(Keller)는 지하 혹은 반지하 저장 공간을 말하는데 독일에는 대부분의 집에, 심지어 빌라같은 곳에도 이 켈러가 달려 있다. 어떤 사람들은 켈러를 우리의 창고처럼 쓰지 않는 잡동사니들을 쌓아두는 용도로 이용하기도 한다. 반면에 적지 않은 가정에서는 이곳을 병조림, 과일 등의 음식을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한다. (과일 병조림이나 쨈 같은 것을 직접 만들어 먹는 문화가 아직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런지)

우리 집 켈러에는 직접 만든 야채 병조림, 과일 주스에서부터 감자, 당근, 양파 따위의 장기 저장용 야채와 1주일 안에 먹을 채소까지 온갖 먹을거리가 보관되어 있다. 그 빵빵한 냉장력을 자랑하자면, 작년 11월 초에 담은 김장 김치가 아직도 아삭거릴 정도니, 내겐 여느 집 비싼 김치 냉장고가 전혀 부럽지 않다.

우리나라는 밑반찬을 만들어 두고 먹는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이 도시에 살며, 그 대부분의 도시인이 마당도, 지하 저장고도 없는 빌라나 아파트에서 사는 우리나라에서 냉장고 없이 산다는 것은 여간해서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과 독일의 음식문화의 차이를 고려하고서라도, '요즘 한국인들의 삶의 방식이 에너지를 상당히 많이 소비하는 쪽으로 발달해 온 것은 아닌가'란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1990년대 중반쯤 고향을 처음으로 떠나, 다니기 시작한 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도시에서 자란 친구들을 만났는데, 몇몇은 자기 집에는 난방이 잘 되어 겨울에도 짧은 옷을 입고 집에서 생활한다는 말을 자랑처럼(?) 했던 것이 생각난다. 아마 그 시절에도 아파트 생활을 했을 그 친구네 집에는 지금처럼 부엌 안에 몇 백리터짜리 큰 냉장고가 있었을 것이다.

매일 섭씨 30도를 넘나드는 한국의 뜨거운 여름에는 냉장고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피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겨울은 물론이고, 봄이 코 앞임에도 밤이면 여전히 추운 요즘(게다가 꽃샘추위!), 추위를 피하기 위해 방에는 난방하고, 다른 한 편으론 음식이 상하지 않게 냉장고를 가동하는 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일인가 생각해 본다.

완연한 봄이 오기 전, 단 한 두 주만이라도 냉장고 가동 않기 시도를 해보는 건 어떨까. 대신, 베란다 한구석이나 집안의 그늘지고 서늘한 곳에 식료품을 보관할 자리를 만들어 본다면? 첫 시작이 어렵지 해보면 그냥 생활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게다가 덤으로 대폭 '홀쭉해지는' 전기료도 쏠쏠한 즐거움을 안겨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 다음과 My-ecolife.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8,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에코 저널리스트, 쓰레기를 양산하는 조형물 대신 인생을 조각하는 작가(소로우의 글에 감화받아), 2001년 비건채식을 시작으로 ‘생태토양학자’인 독일인 남편 다니엘과 함께 독일에서 지속가능한 텃밭 농사를 지으며‘ 날마다 조금 더 생태적으로, 생태 순환의 삶을 살기’에 힘을 다한다. 올 봄 냉장고와 헤어진 어느 부부의 자급자족라이프, ≪생태부엌≫을 펴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