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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줄거리

22살 미대생 정수연은 자신의 미술 선생이었던 남자와의 연애에 지쳐가는 중이다. 더불어서 형식적이고 발전이 없는 학교 분위기도 큰 의미가 없음을 느낀다. 현실에서 발을 떼지 못한 채 끌려만 가던 수연은 도서관에서 아르헨티나 문화에 관한 정보 도서를 읽게 된다.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인 그녀는 특별한 방식으로 책을 읽으며, 아르헨티나와 탱고의 매력에 빠져든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가상의 인물 페르도를 만나기 위해 책속으로 들어갔다가 보카 마을 어귀에서 한 꼬마와 마주친다.

 

2. 낯선 안내자

 

나무가 일렬로 늘어선 길을 따라서 꼬맹이는 돌을 하나하나 밟으며 걸어오고 있다. 나풀거리는 꽃무늬 원피스에 조금은 얼룩이 묻어 있었지만, 제법 단정히 묶은 머리와 얌전한 몸놀림으로 보아서 착한 아이 같아 보인다. 혼자서 콧노래를 부르던 꼬맹이는 길가의 포석 중 혹여 하나의 돌이라도 밟지 않고 건너뛴 게 있다면, "미안해 , 너를 못 봤구나. 잘 지냈지?"하고 인사를 건네며 그 돌을 살짝 밟고는 원래의 돌에게 돌아와서 "이젠 네 차례야." 하며 토다 토닥 발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이런..외국 아이가 하는 말을 내가 다 알아듣고 있다니..이것도 제법 재미가 괜찮은데."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꼬맹이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벽에 등을 대고 있자니 약간의 한기가 느껴진다. 드디어 꼬맹이가 가까이 왔다.

 

아이의 큼직한 잿빛 눈은 햇살을 받아서 투명하리만치 맑아 보인다. 그리고 그 큰 두 개의 눈이 내 곁을 지나칠 즈음, 주머니에서 알 초컬릿 두 개가 만져진다.

 

"얘, 너 예쁘구나. 이것 먹을래? 너가 예뻐서 주는 거란다."

 

꼬맹이는 큰 눈을 슬그머니 올려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손에 든 초컬릿으로 눈길을 돌렸다가 다시 올려다보더니 대뜸 묻는다.

 

"페르도를 찾고 있지?"

 

아이는 좀 전의 모습과 다르게 다소 격앙된 말투였고 입까지 씰룩 거린다. 그리고  그 큰 눈으로 찬찬히 쏘아보는 것이다. 조금의 반항심 마저 감돌고 있다.

 

'얘가 어찌 내 마음을 알고 있을까?'

조금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으..응. 페르도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 줄래?"

나는 말까지 더듬어가며 아이의 손에 초컬릿을 들이밀고는 침착한 척 웃음을 짓는다.

 

"난 너가 올 줄 알았어."

꼬맹이는 뜬금없는 소리를 하며 계속 사람을 놀라게 만든다. 이 애와는 길게 얘기해선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몰려온다. 게다가 '너'라니..착하고 예쁜 앤 줄 알았더니 이거야 원!

 

"으..응. 그래? 일단은 페르도가 있는 곳이나 알려주겠니?

 

"페르도! 페르도! 모두들 그를 찾고 있지!"

꼬맹이는 포석들을 발로 쾅 차며 심술궂게 소리지른다.

 

나는 잠시 멍해진 눈으로 말문이 막힌다. 그리고 아이의 눈치를 살피며 친한 듯이 머리를 쓰다듬고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묻는다.

 

"왜 다들 페르도를 찾는 거니?"

"너가 잘 알거잖아. 왜 사람들이 그를 애타게 찾는지를! 모든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기 바쁘지.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와서 모든 걸 결정 내린다구. 그러다가 결국에는 진정 원하는 건 자기 자신이야! 스스로를 만나길 원하기 때문에 자신과 동일한 누군가를 찾으려고 애쓴다고!"

 

꼬맹이의 목소리는 건조한 초여름 바람 속에서 멀리까지 울려 퍼지고 있다. 그리고 그 울림은 바다를 한바퀴 휘돌아서 부메랑 처럼 내 곁을 스쳐간다. 오래 전 언니가 죽었을 때, 절규하며 나를 다그치던 엄마의 목소리가 갑자기 떠오른다. 그 해, 나는 심하게 마음을 다친 적이 있었다. 아직도 용서하지 못할 그 녀석들 때문에 나는 마음의 피를 흘리며 고통을 받았고, 더불어서 언니가 고통 받았고, 그리고 자살한 것이라 믿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 제공은 나에게 있다고 엄마가 말했었다. 엄마의 얼굴을 지금 이 자리에서 보고 있는 것만 같다. 꼬맹이가 한 말과는 상관없이..

 

갑자기 힘이 빠진 나는 말이 없어진다. 이 애가 뭐라고 하건 그냥 들어 주기만 해야할 것 같다. 어쩌면 언니에게 잘못한 대가를 이 아이에게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일단은 만나게 해줄 테니..그 다음은 너가 알아서 할 일이야."

꼬맹이는 애답지 않은 말투로 뜻 모를 말만 하더니 앞장서기 시작한다.

 

아르헨티나의 초여름, 오후 4시의 포석 길을 걷고 있다. 저 아래쪽으로 항구의 모습이 보이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은모래 같은 햇살이 반짝이는 바다, 그 위로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 멀리 바다 쪽에서 여러 대의 어선이 뱃고동 소리를 내며 멀고 먼 해원으로 사라지는 모습은 왠지 애달파 보이기 까지 한다. 바람이 한 줄기 불어오자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지는 기분이다. 항구 쪽에서 나무 상자를 나르던 한 무리의 남자들도 그 산들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잠시 허리를 편다.

 

"저 무리들에게 물어봐. 난 더 이상은 가르쳐 주기 싫어!"

꼬맹이는 그렇게 말하고 홱 돌아서서 사잇길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얘! 너.. 너를 ..또 만나려면 어디로 찾아가야 하니?"

나는 황급히 쫓아가며 묻는다.

 

"그 미술 선생에게 물어봐. 그는 알고 있어. 그가 먼저 얘길 할 거야"

"뭐? 무슨 소리야?"

"안녕."

 

꼬맹이는 덤불 속으로 재빨리 달아나버렸다.

 

<계속>

덧붙이는 글 | 내일(일요일)은 연재를 쉽니다.


태그:#아르헨티나, #탱고, #보카, #아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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