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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金朱烈, 1943~1960) 열사의 삶과 정신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다.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대표 백남해 신부)는 다큐멘터리 <친구야 미안하다>를 제작해 오는 4월 17일 마산 3․15아트센터에서 시사회를 연다.

김영만(65, Corea평화연대 대표)씨가 다큐멘터리의 감독과 시나리오, 내레이터를 맡았다. 김영만씨는 김주열 열사와 1960년 마산상고(현 용마고) 입학 동기다. 남원 출신인 김주열 열사는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실종되었고,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떠올랐다.

다큐멘터리 <친구야 미안하다> 제작에서 감독과 시나리오 등을 맡은 김영만씨가 24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인양한 바닷가에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 지시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친구야 미안하다> 제작에서 감독과 시나리오 등을 맡은 김영만씨가 24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인양한 바닷가에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 지시하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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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의 삶과 정신을 담을 다큐멘터리 <친구야 미안하다>의 감독을 맡은 김영만씨가 24일 마산 신포동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인양한 바닷가에서 촬영을 지시하고 있다.
 김주열 열사의 삶과 정신을 담을 다큐멘터리 <친구야 미안하다>의 감독을 맡은 김영만씨가 24일 마산 신포동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인양한 바닷가에서 촬영을 지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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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업회는 지난 1월 초 다큐멘터리 기획에 들어갔고, 2월 초부터 촬영했다. 제작은 시청자영상제작단(촬영감독 심재훈)이 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절반가량 촬영했다. 다큐멘터리는 45분 분량이다.

그동안 김주열 열사의 묘소가 있는 서울 수유리 4․19묘지(가묘)와 마산 3․15묘지(가묘), 남원 묘지를 촬영했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은 마산 신포동 대한통운 택배물류창고 앞 바다에서 인양되었는데, 추모사업회는 24일 이곳에서 촬영 장면을 공개했다.

무용연구가 김영숙(아사달 춤터)씨가 살풀이를 추는 장면을 연출했다. 김영만씨는 현장에서 촬영한 화면을 모니터로 보면서, 몸동작과 촬영 위치 등을 살펴보았다.

"김주열 열사에 관한 왜곡된 주장 바로잡고자 다큐멘터리 제작"

추모사업회는 당시 김주열 열사가 시위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 등 열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를 바로잡고자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식지 <희망세상>(2009년 3월호, 마산 3.15의거 현장을 찾아서)에는 김주열 열사와 관련해 "무학초등학교 옆 이모할머니 댁에서 시위를 구경하러 나왔다가 변을 당했던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이후 추모사업회(남원·마산)가 정정을 요구했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지난해 7월 정정보도문을 통해 "김주열은 형 광렬(당시 19세)과 함께 시위대에서 경찰과 대치하여 투석전을 벌이는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현장에서 산화했다"고 바로잡았다.

김영만씨는 "3․15의거와 관련된 역사를 바로 기술해야 하기에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한편 전라북도 남원시와 추모사업회(남원)는 지난해 김주열 열사의 사진과 유품, 당시의 영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민주횃불, 김주열>(감독 김광호)을 제작했다.

김주열 열사의 옛 마산상고 입학 동기인 김영만씨가 24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인양한 바닷가에서 다큐멘터리 <친구야 미안하다> 촬영에 앞서 리본을 매달고 있다.
 김주열 열사의 옛 마산상고 입학 동기인 김영만씨가 24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인양한 바닷가에서 다큐멘터리 <친구야 미안하다> 촬영에 앞서 리본을 매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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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시나리오, 감독, 내레이터 1인 3역을 맡은 김영만씨를 인터뷰한 내용이다.

-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 동기는?
"올해는 4월혁명 50주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김주열에 대한 폄훼 발언이 마치 진실인양 사람들에게 쉽게 먹혀들고 있는 지금의 마산 분위기가 안타깝고 원망스럽다. 이제는 많은 시민들이 잘못 알고 있는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둘 수 없어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 영상기록물로 꼭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지난해 문제의 기사 건으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지금도 불편한 관계인가?
"아니다. 그 기사로 우리도 힘들었지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결국은 우리의 정정보도 요구를 100% 받아주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도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 시나리오와 감독, 내레이터까지 맡아 제작을 한다는데 다큐멘터리 제작 경험이 있나?
"아니다, 처음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일이라 이틀 만에 시나리오 초안을 작성했다. 그리고 카메라의 초점을 어디에 어떻게 맞추어야 우리의 이야기를 정밀하게 표현할 수 있을 거라는 것도 가장 잘 알고 있으며, 내레이터는 내가 친구에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내용이니까 서툰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1인 3역을 해 낼 수 있다면 제작비가 적게 들 것이라 생각했다."

- 문제의 기사로 자신들이 오해를 받을 수도 있던 3.15의거 관련단체에서는 그 기사를 바로잡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가?
"물론 자신들이 직접 발언해 작성된 기사는 아니었지만, 그 단체(3.15의거 관련단체)가 르포작가의 3.15역사현장 안내를 맡았다. 상식적으로 자기들을 인터뷰한 기사에서 어떤 내용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면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그런 기사가 나오게 된 경위와 진상을 파악하고, 잘못된 내용이라면 정정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요 도리이다. 특히 3.15의 역사를 사실대로 올바르게 기록하는 것이 그 단체의 역할이요 의무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 부분에 대해 반드시 짚을 것이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의 시신 인양지인 마산 바닷가에는 안내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의 시신 인양지인 마산 바닷가에는 안내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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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친구야, 미안하다>의 줄거리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주열이에게 큰 죄를 지은 것 같다. 요즘 주열이 일 때문에 맘이 불편해 밤에 잠을 설치기 일쑤다. 주열이와 나의 첫 대면은 꼭 50년 전인 1960년 4월 11일 마산도립병원이었다. 시신 안치실에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끔찍해 어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듯 그 자리를 바삐 빠져나갔지만, 나는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깊숙이 박힌 채 바닷물에 퉁퉁 불어 있는 그의 시신을 한참 동안 응시하며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김주열과 나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날 이후 나는 마산 3.15의거나 4월혁명 이야기만 나오면 "주열이와 나는 마산상고 입학동기"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했다. 세월은 흘러 소년이 청년이 되고 장년, 노년으로 접어들면서 그만큼 세상도 많이 변했지만 마산 사람들이 참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40년이 지나도록 마산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돌멩이 하나 세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1960년 4월혁명 이후 한동안 마산은 김주열이었고 김주열은 마산이었다. 지금도 3.15의거는 잘 몰라도 김주열이라고 하면 "아! 마산"이라고 말하는 국민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김주열은 남원에서 마산으로 유학을 온 학생이었다. 그는 살아서는 남원의 아들이었지만 죽어서는 마산의 아들이 되었고 4월혁명을 통해 국민의 아들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묘소는 무려 3곳에 있다. 서울 수유리 국립묘지와 마산 3.15국립묘지 그리고 고향인 남원에 묘가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1999년 그를 역사의 책갈피 속에서 밖으로 불러냈다. 김주열추모사업회를 만든 것이다. 망국적인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동서화합을 위한 촉매제 역할을 하는 데 주열이야말로 하늘이 특별히 점지한 인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0년, 끈질긴 노력으로 추모사업에 제법 탄력이 붙기 시작했지만 동서화합은커녕 왠지 마산의 분위기가 이상해진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 "김주열은 파자마 바람에 이모할머니집 앞에서 데모 구경하다 죽었다"는 황당한 이야기부터 "그때 죽은 사람이 어디 주열이 뿐인가?" 등등,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웃어 넘겼지만 생각보다 상당히 심각한 수준임을 감지하고 걱정을 하고 있던 중, 지난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희망세상>에 어느 르포 작가가 마산의 3.15현장을 둘러보고 3.15관련단체 인사들과 인터뷰를 한 기사 속에 뜬금없이 "김주열은 이모할머니 댁에서 시위구경을 하러 나왔다가 변을 당했던 것이다"라는 글을 썼다. 어떤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퍼뜨린 이 소문이 정부의 공식기구에 기록으로 남을 뻔했던 이 일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다행히 당시 혁명재판소의 판결문에서 김주열이 시위대열에서 최루탄을 맞은 기록을 찾아내었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정정보도문을 냈지만 그 과정에서 모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후 나는 동서화합이니 뭐니 하는 일로 괜히 주열이를 욕되게 했다는 후회와 함께 살아 있는 인간들도 도저히 해결 못하는 동서화합이라는 국가적 난제를 그의 어께에 지운 것부터 큰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를 떠나보내기로 결심했다.


태그:#3.15의거, #4.19혁명, #김주열 열사,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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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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